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외롭고 허무한 세상에서 주체로 살아남기
게시물ID : phil_81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니미니미
추천 : 1
조회수 : 46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2/03 02:10:54

외롭고, 허무한 세상에서 주체로 살아남기

1. 허영과 질투, 인간 내면 깊숙한 '소외'

허영과 질투는 인간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허영은 타인에게 보여지고 싶은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실제 모습이 일치하지 않을 때 이 갭(gap)을 메꾸기 위함이며, 질투도 이와 유사하며 다만 자기위로의 성격이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간편하게 말하자면 허영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반면, 질투는 종종 질투의 대상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행위로 연결된다. 허영과 질투는 내면을 보호하는 방법인 동시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위선적, 우회적 표출이다. 허영과 질투와 같은 마음은 근본적으로 인간 내면 깊숙한 소외감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존재로써의 인간의 욕구가 이 소외감에서 비롯되는데, 일찍이 매슬로(A. H. Maslow)가 인간의 5가지 욕구중 하나로 명명한 적 있다. 사회적 존재로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이해하여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러한 인간의 소외감을 더욱 자극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소외감을 강화하는 구조들을 더욱 강화하는 형식으로 소외감을 해소하도록 하는 기제에 놓여있다. 그 소외의 치유는 사회적 존재로써의 주체화의 문제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가능하다.

2. 존재망각, 삶의 존재와 사회적 존재

기본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삶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서 존재망각을 통해 나타나는 착시효과의 하나(주체가 사회를 그 대상으로 삼는)로써 그 이름을 명명하고자 한다. '삶의 존재'라 함은, 사회적인 관계와 그 현상, 형식의 총체를 자신 외부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그 대상에 무관심하게 대응(무사유)하는 존재 방식으로 규정하자. 또한,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자를 밝힘으로 내보냄으로써 동시에 스스로를 은폐함을(존재망각) 존재의 본질적 구조로 간주하였으나, 이를 본질적 구조라기보다는 근대 철학의 형이상학적 사건에 대한 명명으로 재해석하기로 하자. 탈사회적존재로 인간이 자신을 고립된 삶의 존재로 사유하게 되는 이유를 추적해보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흔한 말로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느냐'는 문장으로 논의를 시작해 볼 수 있는데, 과거 先개발-後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문장으로 전유되었던 이 논리는, 인간을 삶의 존재와 사회적 존재로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도출된다. 동시에 삶의 존재를 선결 과제로 제시하면서, 사회적 존재로써 존재하기 위한 (정치적인)절차는 앞선 과제의 해결 이후에만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른바 '먹고 사는 것'은 노동을 통해 가능하며, 노동과 임금 분배의 과정이 사회적인 (합의에 의한 것이든 합의로 착시되는 강제가 동반되는 것이든)것임은 자명하다. 따라서 '먹고 사는 것'조차 사회적인 층위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착시효과는 게오르그 루카치(Lukacs Gyorgy)의 말을 빌리자면, “사물화로 인하여 인간 특유의 활동, 인간 특유의 노동이 객체적인 어떤 것, 인간으로부터 독립되어 오히려 인간에 낯선 자기법칙성을 통해서 인간을 지배하는 어떤 것으로서 인간에 대립되어 다가온다.”라고 할 수 있다. 맑스주의자들이 제기했던 화폐의 인간에 대한 지배는 차치하고서라도, 주체/대상의 이분법(여기서는 삶의 존재로써 상품, 화폐등 사회적 현상과 형식을 관망하는 주체)이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느냐"는 담론의 기저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주체가 되고 세계가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전면화되고 있는 기술의 본질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고 말하면서, 기술은 무사유를 절정으로 이끌어 허무주의에 도달하게 하는 동시에 철학을 종식시킨다고 주장한다.

3. 미디어로써의 근대의 과학기술 :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

허무주의에 대한 담론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두고, 하이데거가 주장했던 기술의 전면화와 그 의미에 대해 먼저 다루어보자. 먼저, 실존(existence)은 그 존재의 존재 방식에 맞게 존재하는 것이다. ex는 '~밖의'의 의미이고, istence는 '서는 것'이므로, 실존은 무엇 밖에 서는 것, 즉 자연 밖에의 인간을 존재로써 실존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을 매개하는 미디어, 즉 매개는 선사시대에는 주술적 상상력으로 상징되는 이미지, 즉 3차원적인 조각과 2차원적인 벽화의 시기였다면 합리적 이성 ·문자의 시대인 역사시대에는 1차원적인 문자의 기록에서부터 문자시대 후기에는 자연을 기록하는 인문학자에게서부터 자연을 수량화하고 계산하는 과학자들에게 그 매개의 역할이 넘어가게 된다. 아날로그적인 자연, 연속적인 자연을 디지털, 분절된 숫자로 계산하는 과정에는 자연이 그 틈새로 빠져나가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는데, 이는 17세기 수학에 무한을 도입하는 것을 본질로 하는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미분'을 통해 해결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이 자연을 대상으로써 정복할 수 있는 이론적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이론적 전제조건을 실천적 조건으로써 가능하게 한 것이 1950년대 등장한 컴퓨터였다. 이러한 흐름들은 인간이 자연 밖의 주체로써 대상인 자연과의 관계를 매개하기 위한 끊임없는 사투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해석해왔던 철학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자의 존재를 사유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존재자를 다루는 기술의 허무주의적 의지에 의해 존재가 망각되는 동시에 그 망각이 잊혀지며, 형이상학적 주체의 범주는 종언을 고한다. 하이데거가 과학과 기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기본적으로 자본 종속적인 근대 과학기술이 대상의 질적인 특성을 배제하고 대상을 양적인 것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에 철학이 가지고 있던 지위, 세상을 해석하는(자연을 매개하는)지위는 박탈되며 과학이 이를 대신하게 된다. 오늘날 동양의 전통적 인식론인 성리학(理와 氣로 구성되는)이나 플라톤의 이데아(idea)론을 더 이상 사람들이 세상의 법칙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이와 같다. 근대 이후,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사후적으로 의미부여된 것이라는 인식이 널리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4. 탈신성화 : 반허무주의적 허무주의 VS 허무주의

바디우는 허무주의를 유대(紐帶)의 전통적 형상과의 단절로 파악한다. 즉, 유대의 외양을 띤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의 존재 형식으로서의 탈유대를 허무주의로 본다. 인간은 (특히 니체를 통해)신으로부터 탈유대(탈신성화)되었으며, 보편적 일자의 신화를 철회하게 되었다. 맑스는 인간이 자본을 통해 유대관계로 표상되는 봉건적 압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본다. 특히 유대의 신성화된 형상들, 그 표상들은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들(인간과 자연사이, 인간과 인간사이 등)의 실존을 가정하는데, 자본은 이러한 표상들을 녹여낸다. 화폐가 기본적으로 '수량화'이기 때문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상황에서, 성스러운 것, 본질적인 것에 대한 향수는 기술적 허무주의를 고발하면서 반(反)허무주의적 허무주의를 구성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날 황금만능주의의 시대를 규탄하면서 신성한 본질에 대한 논의(음양 오행과 기(氣)라던지, 신과 같은 보편적 일자(一者)라던지)로 회귀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탈신성화의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반허무주의적 허무주의인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반허무주의적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의 투쟁으로 표상된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타자의 발견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보편성에 억압되어왔던 개별성의 수용이냐, 혹은 가치관의 혼란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하기 위한 신성화로의 회귀이느냐에 있다. 정치의 측면에 있어서는 '그놈이 그놈'이라는 허무주의와 함께, 이에 대조되는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신화의 잔존이 특징적이며, 이 밑바탕의 대의민주주의에는 어떠한 의견의 '가치'가 고려대상이라기보다는 국회의원의 머릿수로 선택이 결정되는 수의 법칙이 내재되어있다. 문화적 층위에서는, 영화나 드라마, 만화와 같은 대중문화는 자본에 포섭되는 동시에 허무주의적 성찰을 담은 내용에서 형식적 허무주의(이른바 '병맛'으로 유행했던)까지 극단에 치닫기도 하며, 이에 대항하는 반허무주의적 허무주의(이를테면 국가주의, 유교적 윤리 등)는 기본적으로 선과 악의 이분법을 통해 보편타당한 법칙을 구제하고자 한다. 이른바 허무주의적 성찰을 담은 내용으로,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며 기존의 윤리체계에 구멍을 내는 작품들은, 탈신성화의 측면도 있으나 대부분 결론은 관객에게 아리송한 고민만 남긴 채 '진리는 없다'(허무주의)로 끝난다. 사랑의 측면에서는, 오늘날 사랑이야말로 반허무주의적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의 투쟁의 첨병이다. 특히 기독교적-유교적 가치관이 혼재된 한국사회에서는, 이른바 '혼전순결'을 그 기치로 내세우는 것이 특징적이다. 반면 'carpe diem'을 쇄골에 새겨넣고, 홍대, 강남 클럽등에서 젊음을 불태우며 지금을 즐기는 청춘들에게 혼전순결은 케케묵은 유교적·기독교적 억압일 뿐이다. 이들에게 사랑에 대한 진리는 없으므로, 장-뤽 낭시의 지적처럼 사랑은 감상성과 섹스사이에서 희생당하며 둘을 공존시킨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대에는 서로 대립되는 실증주의적 과학, 그리고 신성한 종교만이 인류의 등대역할을 하고 있는 형국이다.

5. 다시, 인간의 소외, 그리고 자본주의

문제는 오늘날 탈유대된 인간이, 유대를 세속적으로 자본주의 내에서 재구축(re-construct)하는 방식이 오히려 인간 내면의 소외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데 있다. 이는 사람들이 '삶의 존재'라고 믿는 존재 방식이, 타자 및 사회를 외부적 대상으로 삼는 모순적인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때, 삶의 존재는 사회로부터 독립적인 주체인 듯 하나 그러면서 이러한 존재방식은 대상으로부터 비교가능성을 떠오르게 한다. 즉, 사회적 존재임을 망각한 존재망각의 상태에서도, 모순적으로 끈덕지게 '삶의 존재'의 주체는 오히려 대상으로부터 떠오른다. 나보다 잘 생긴 사람, 돈 많은 사람, 학력이 좋은 사람, 직장이 좋은 사람 등에 비교되는 '나'가 비교방식의 좋은 예이다. 허영과 질투는 이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 깊숙한 소외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위의 예들은 모두 사회적인 자본으로써, 자본의 일정한 축적과 노동의 투입 없이는 획득 불가능한 것이다. 상위 계층의 생활양식은 '훌륭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모든 계층의 선망의 대상이 되며(의식적으로 저항하는 계층을 제외하고)이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시스템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이러한 자본의 피라미드 형태는 피라미드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따름이다(역은 대체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망각의 상태, 삶의 존재로써의 존재방식의 모순을 이해하고 새로운 주체를 확립하는 데에 이 소외의 뫼비우스의 띠를 벗어나는 해결책이 있을지 모른다.

6. 대상 없는 주체

오히려 철학을 사장시켰던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통찰에서, 새로운 주체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3차원의 조각, 2차원의 회화, 1차원의 텍스트, 그리고 오늘날 과학은 원자(atom)단위의 0차원의 세계까지 도달했다. 0과1의 문자로 이미지를 그리는 세상이다. 더 이상 주어진 것(datum)의 시대가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factum)의 시대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이전에 없던 것(이를테면 새로운 물질)을 창조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선언적 의미에서) 자연을 매개했던 주체(subject)와 대상(object)의 구별은 용이하지 않다. 세계를 만드는, 기획으로서의 인간(project)이 대두된다. 흔히 (인문학적) 창의력으로 대변되는 그것이다. 이제, 인문학은 세상에 대한 해석의 지위를 내려놓고, 세상을 창조하고 기획하는 일에 참여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대상 없는 주체'를 운위할 수 있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 사건이 상황에 속하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개입의 과정을 통해 진리는 상황에 유통되고, 이 사건에 충실한 주체들이 출현"한다. 이때 진리란 '상황에 존재하지만, 존재의 질서 속에서는 파악되지 않는 공백들의 출현'이다. 진리는 유적 절차(정치, 예술, 과학, 사랑)에서 생산되며 철학은 이러한 유적 조건들이 공가능하다는 것을 사유 속에서 엮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를 사유함으로써 그 진리가 어디에 위치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작업을 철학은 수행한다. 그리고 이 때 지식 체계에서 벗어난 공백이 주체들의 후사건적 실천을 통해 그 진리를 옳은 것으로 인정할 때 상황을 지배하는 법칙은 최종적으로 바뀌게 된다. 이 때의 주체는 '대상 없는 주체'로 대상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철학은 정치 혹은 과학(그 자체)에 대한 사유나 설명이 아니며, 오히려 '근거없는(sans raison)' 선언 혹은 선 긋기이다. 이 선언적 행위는 순수하게 주체적인 동시에 어떠한 대상도 갖지 않고 그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으며 오로지 사건과 진리에 의존적인 의미에서 '대상 없는 주체(objectless subject)'이다. 이렇듯 바디우의 주체는 어떤 실체와 등치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과 진리가 주체의 실천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 없는 주체'에서 새로운 존재방식으로의 전회를 이끌 은유적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나 밖의 대상을 내 삶의 준거로 삼지 않고, 내가 처한 상황[명명되는 사건]과 그 진리(질서로 파악되지 않는 공백으로써의)에 충실한 주체를 삶의 매 순간 창조하는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은 분명 나에게 대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상 없는 주체'란 그저 대상성을 참조하는 것에 그치는 동시에 그 대상성에 포획되지 않고, 대상으로부터의 끊임없는 탈주를 감행하는 것이다. 이는 자본/개념화로부터의 탈주를 그 숙명으로 삼아온 현대 예술에 비유된다. 유명한 예술가가 작품을 하나 내놓으면, 그 작품은 곧바로 경매의 대상이 되며, 개념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로부터 탈주하여 그 개념화의 잔여를 계속해서 만드는 것, 차이의 무한 반복을 통해 대상성으로부터 벗어나 사건과 진리에 충실한 주체를 만드는 것이 '대상 없는 주체'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존재로써 대상 없는 주체로의 주체화.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으며, 삶을 대상성에 의한 소외의 늪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나는 사회적 범주가 나를 규정하도록, 아무개보다는 못생겼지만 학력이 높으며 아무개보다는 돈이 많은 인간인가? 아니면 이러한 범주화를 거부하고 현재에 던져진 사건에 충실한 주체로써 나를 창조하는 인간인가?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