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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발.... 진짜...
게시물ID : humordata_5355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타향만두
추천 : 1
조회수 : 114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09/08/23 15:44:05
이시발 [李時發, 1569~1626] 조선 중기의 문신. 이몽학의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군사시설 설치, 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했다. 경상도·함경도 관찰사, 예조·형조·병조의 참판 등을 지냈다. 이괄의 난 때 부체찰사로 진압군을 지휘했다. 군사, 행정 실무에 밝았다. 본관 경주. 호 벽오(碧梧) ·후영어은(後潁漁隱). 자 양구(養久). 시호 충익(忠翼).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발발로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경주에서 명나라 장군 낙상지(駱尙志)를 접대하였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종사관으로도 활동하였다. 1594년에는 명나라의 유격장을 따라 일본군 부대를 방문하여 정탐하였으며, 1596년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李夢鶴)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밖에도 군사시설의 설치와 군량의 조달 등에 많은 활동을 하였다. 종전 후 성주목사 ·경상도 ·함경도의 관찰사, 예조·형조·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으나 북인들의 권력 독점으로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 옥사와 관련하여 삭탈관직된 바 있으며,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을 반대하여 낙향하였다. 1619년 광해군의 특명으로 찬획사(贊畵使)를 맡아 평안도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한성부판윤·형조판서를 지냈다. 이괄의 난 때는 부체찰사로 진압군을 지휘하였고 남한산성의 정비 임무를 수행하였다. 군사와 행정 실무에 밝았고 정치색은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저서로 《주변록(籌邊錄)》 《벽오유고》가 있다.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출처:네이버 사전 ================ 있네요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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