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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쉽게 죽지 않는다
게시물ID : military_406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eio
추천 : 46
조회수 : 7592회
댓글수 : 27개
등록시간 : 2014/04/01 04:29:19
 
 어느 화창한 날. 나는 터벅터벅 내무실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다. 우리 분대 분대장이 전역하고 분대장이 바뀌면서
연병장 한 구석에서 약식으로 분대장 이취임식을 마치고 들어가는 길이었다. 새로 분대장이 된 고참의 어깨에 달려있는
칙칙한 녹색의 견장이 그때는 왜그리 부러웠는지 모르겠다. 나는 언제쯤 저 견장을 달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만
남은 군생활을 생각하니 깝깝할 뿐이었다. 분대장이 바뀌면 새로 분대장임명장이 나왔고 내 손에 든 분대장임명장을
바라보니 한숨이 나왔다.
 
보통 분대장임명장은 액자에 끼워서 걸어 놓는데 우리소대는 좀 특이한 방법으로 액자를 전시했다.
처음 자대배치를 받고 내무실에 들어갔을 때 내 눈에 들어온건 공중에 떠있는 액자였다. 허공에 떠 있는 액자를
보며 적어도 염력정도는 써줘야 분대장이 될 수 있는거구나 라고 생각하며 고참들을 우러러 보았다.
하지만 알고보니 액자를 낚시줄에 매달아 천장에 고정시킨 거였다. 이 부대에는 망치랑 못이 없나? 라는 생각과
저걸 왜 굳이 저렇게 매달아 놨을까? 아니면 기존의 벽에 거는 기성적인 액자전시의 관념에서 탈피해 분대장의 위엄을
아방가르드적인 설치미술로 표현하려 한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거 말고도 할 고민이 많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천장에 액자를 매다는 일은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고 그 작업은 후임들의 몫이었다.
먼저 액자의 구석을 낚시줄로 묶은 후 천장 석고보드의 나사를 풀어서 나사에 줄을 묶고 고정시켜야 했다.
이 때 어느 한쪽이 기울어서도 안되고 너무 높거나 낮아서도 안되었다. 가장 중요한건 액자의 각도였다.
4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해 누워있을때도 서 있을때도 액자가 잘 보이는 각도로 매다는게 핵심이었다.
그러다보니 처음 액자를 매달 때는 거의 한시간을 액자와 씨름해야 했다.
문제는 우리 부대가 거의 격주로 토요일 마다 전투준비태세 훈련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무실을 비워야 하니
당연히 액자도 따로 떼어내 보관해야 했고 그때마다 이 정신나간 짓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도 액자를 떼었다 달았다 하다보니 어느정도 숙련이 됐지만 그래도 한 번 달때마다 거의 20분씩은
소요가 됐고 이제는 액자만 봐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날따라 몸은 더더욱 천근만근 이었다.
내무실로 들어가 일단 액자를 내렸다. 그리고 나서 드는 생각은 그냥 액자 뒷면만 열어서 종이만 바꿔
끼우면 되었을걸 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바닥에 내려놓은 액자만 허망하게 바라보다 나는 다시 액자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제대로 달리지가 않았고 짜증은 짜증대로 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잔머리가 떠올랐다. 어차피 다음주면 훈련때문에 다시 뗄 액자인데 굳이 정성들여 매달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에 나는 주변 눈치를 살피고 테이프를 가져와 천장에 액자를 대충 붙혀버렸다.
나의 이런 기지에 스스로 감탄하며 천장에 매달린 액자를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모든 사고의 원인은 안전불감증이라고 했던가. 그날 밤 이었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괴성이 조용한 내무실 안에 울려퍼졌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내무실에 불이 켜지고 보이는 것은 인중이 붉게 물든 고참의 얼굴이었다. 테이프가 액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떨어진 액자는 자고 있던 고참의 인중에 적중했다. 그것도 소대에서
제일 지랄맞은 고참의 인중으로. 싸구려 스카치 테이프의 장력은 액자의 무게를 견디기엔 역부족 이었고
나는 수능시험을 본 이후 처음으로 학창시절 과학공부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했다.
 
이미 고참의 얼굴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고 나는 극도의 공포심은 극에 달했다. 제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단순한 사고로 넘어가기를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지만 결국 분노에 찬 고참은
치밀한 현장검증 끝에 천장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발견했고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은밀하게 계획한 테러가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오늘 액자 단 놈이 누구야라는 고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아름다웠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것이 주마등이라는 이었으리라. 앞으로 나선 날 바라보는 고참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내 인생이 여기서 마감되는구나 라고 직감했다. 앞으로 내 군생활 남은 시간의 전부를 널 파멸시키는데
사용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후로 그 고참이 제대할때 까지 나는 숱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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