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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호 침몰 사고 (1970년)
게시물ID : sewol_110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엑수티
추천 : 1
조회수 : 69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4/21 11:43:10
해양사고 관련해서 블로그 찾아보고 있었는데 

세월호+유가족들의 과거와 미래 모습을 본듯해서 올립니다.

남영호 침몰 사고 (1970년)


남영호 침몰사고는 1970년 12월 14일 16시 쯤 승객 338명과 감귤을 싣고 부산~제주간 정기여객선인 남영호가 제주 서귀포항을 출항하여 부산항으로 항해하던 중 12월 15일 새벽 1시 50분 쯤 전라남도 상일동 동남쪽 28마일(대마도 서쪽 100여km) 해상에서 선체가 갑자기 기울어져 전복돼 침몰한 사고이다.


인명 피해는 326명이었으며, 재산 피해는 선체와 화물가격을 함해 1억 700만원에 달했다.

적재량을 초과한 과적, 항해 부주의, 긴급신호 발신 후 신속하지 못한 대처 등으로 피해가 컸던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남영호의 선령은 2년으로 선체도 큰 편이었지만, 사고 당시 정원인 302명보다 36명 초과한 338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본격적인 감귤 수확철로 밀감, 배추 등 화물도 160t에 달했다.이는 적재정량의 4배 가까이 되는 양이었다.


이 때문에 남영호는 성산포항을 떠난 시점에서 이미 좌현으로 10도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국내 해경은 침몰 직전 남영호가 보낸 긴급구조신호를 수신하지 못했고, 승객은 8시께 일본 어선에 의해 처음 구조되었다.

12시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있었지만 해경은 '연락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했고(자랑이다),
일본 순시선 출동보다 네 시간 늦은 오후 1시에야 겨우 출동했다.

그 사이 생존자들은 추가로 구조된 6명을 제외하고 겨울 바다에서 동사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1973년 12월 15일 여객선 운항관리제도가 도입됐다.


상효동 남영호 조난자위령탑 (일부 인용)


1970년 12월 14일 오후 4시 부산선적 남영호가 승객 338명(승무원 20명 포함)과 감귤을 가득 싣고 출항했다. 성산항에 잠시 기항후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선체가 기우뚱거리기 시작하더니 빽빽이 쌓여있던 감귤상자가 무너져 내렸다. 바람은 초속 3.7m 서남풍. 선실에서 잠을 자거나 쉬고 있던 승객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일어나 허둥대기 시작하면서 배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결국 남영호는 복원력을 잃은 채 바다 속으로 서서히 침몰했다.


사고 현장부근을 순시하던 일본 해상 보안순시선 구사사카마루호가 남영호의 참사현장(장소는 교토통신은 대마도 서쪽 1마일 해상, 국가기록원은 전라남도 상일동 동남쪽 28마일 해상, 해양경찰전자신문에는 여천군 소리도 동남방 9마일 해상, 왕실도서관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에는 여수 소리도 근해, 동아일보에는 거문도 동쪽 33마일 등으로 나와 있음)을 확인, 일본 해상보안청에 직접 보고했다.

이에 따라 일본 교도통신이 이를 특종보도했으며 15일 오전 11시에는 국내 라디오 전파를 타고 남영호 침몰참사 소식이 도민들에게 전해졌다.


사고 뒤처리는 한심하다 못해 국가적 망신까지 불렀다.

침몰 직전 발신한 긴급구조신호(SOS)를 단 한 곳도 수신하지 못하고 일본에서만 희미하게 잡았을 뿐이다.

승객들이 처음 구조된 것은 오전8시께 일본 어선에 의해서다.

일본 측의 무선연락을 받고도 해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교도통신의 보도가 나온 정오에도 '연락을 받은 바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던 해경이 출동한 시각은 오후1시.

일본의 순시선 급파보다 네 시간이나 늦었다.(서울경제)


당시 치안국은 처음에는 남영호 침몰사고에 대한 방송보도가 어선조난 사실을 오보한 것이라고 부인했으며 국내통신은 이날 오전 11시40분께에도 침몰여객선의 이름을 월미호(月尾號)로 타전해 혼선을 빚게 하기도 했다.

사고가 발생한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당국은 그때까지 정확한 탑승인원과 사고원인을 확인치 못해 도민들을 실망시켰다.

(40년이 지났는데도 똑같죠?)


또한 해군과 해경합동구조대도 15일 밤을 꼬박 새우며 수색작전에 총력을 펼쳤으나 감귤 150상자를 건져내는 데 그쳤다.

(세월호는 컨테이너를 건져내겠죠 )


당국은 17일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승객 12명과 그 간의 수사자료를 토대로 사고의 원인을 상갑판에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으며 적재방법이 잘못돼 배가 기울어질 때 복원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요새 매일듣는 내용이네요)


또한 여객정원은 302명이나 승선자는 338명으로 36명이 더 탔으며 64명은 승선자명부에 등재를 않고 승선(이건관례인가요?)한 것으로 확인됐다.

부산지검은 선장과 선주, 부산해운국직원 3명 등 5명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남영호가 130톤인데도 250톤으로 선박명부의 내용을 변조했다가 사고후 다시 130톤으로 고친 제주지방해운국 해무계장은 공문서변조혐의로 구속했다.

제주지검은 인검경찰관 4명을 직무유기혐의로 구속하고 서귀포경찰서장을 입건하기도 했다.

박경원 내무부장관백선엽 교통장관이 이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를 정도로 국민들의 감정과 분노는 좀체 사그러지지 않았다. (링크 찾아보세요 어떤분들인지)


구조된 사람은 12명뿐이었으며 이 중 8명은 일본 어선에 의해 구조됐다.

그 중에는 선장 강씨와 통신사 김모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조 당시 모두들 실신 직전 상태였다.

시신도 300여구는 찾지 못했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 중 놀라운 것은 선장과 기관장 등 6명이 무자격자였으며 선원명부에 등재되지 않은 선원들이 배를 탔다는 것이다.(서귀포인터넷일간신문 2010년 12월 9일)

해양경찰과 경남경찰국 합동수사반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힌 책임을 물어 당시 남영호 선주, 선장, 통신사를 구속하여 부산지검에 송치하였다.(해양경찰전자신문)

선박검사를 맡았던 경찰관 4명은 직무유기로 구속됐고,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치안당국에 비판이 쏟아졌으나 치안당국은 SOS 수신을 받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네 역사와 전통입니다. 요 몇일 본  TV내용 하고 똑같네요).

당시 구조신호를 받지 않은 순경도 직무유기가 인정됐다.(서귀포인터넷일간신문 2010년 12월 9일)

 '쌍고동에 허공 실어 침몰된 남영호야'라는 가사가 들어간 가요 '밤 항구 연락선'조차 국가 위신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다.(서울경제)


위령탑이 세워졌다. 남영호 위령탑은 배 침몰로 인한 326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남영호 조난 수습대책위가 1971년 3월 30일 서귀포항에 세운 것이다. 제주신문 1971년 7월 17일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이승택 도지사는 위령탑 제막식에서 “슬픈 탑으로 남기지 말고 슬픔을 극복하고 지성으로 바다를 다스려 힘차게 전진하는 탑으로 남겨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원래 서귀포항에 건립된 탑은 항만 확장으로 인해 현재 위치로 1982년 9월에 옮겨졌다.

당시 서귀포시 주요 인사들이 “서귀포항을 관광미항으로 조성하는 데, 참사라는 역사적 사실이 혐오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위령탑을 바다와도 한참 거리가 먼 중산간 지역에 옮기게 됐다.

(대한민국 정치인님들 대단하십니다. 선진국도 다 이러겠죠?)


묘역은 법성사와 우리들리조트 골프장 사이에 끼어 있다. 법성사 앞에서 골프장 쪽으로 휴경지를 가로질러 가야 쉽게 갈 수 있다. 2006년 조성된 골프장은 공동묘지 진입로를 막고 별도 보상도 없이 지었다. 길이 따로 나 있거나 안내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입구에는 ‘남영호 조난자 공동묘지’라는 녹슨 간판이 있다. 이곳에는 무연분묘 14기를 포함한 무덤 17기, 비석 3기가 안치됐다. 꽃다운 나이에 숨져, ‘영혼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의 비석도 있다.


--> 이런말하기 그렇지만 세월호도 똑같이 진행되겠죠. 진도 관광미항을 만드는데 문제가 있어 묘역을 골프장 옆으로 옮길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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