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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푸드, 돼지고기 김치찌개
게시물ID : cook_965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ㅂㅎ한
추천 : 41
조회수 : 1990회
댓글수 : 48개
등록시간 : 2014/06/06 08:17:15
한때 유행을 타던 단어 '힐링푸드' 진짜 그런건 허세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와서는 그저 허세를 포장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하던 일들 다 실패하고, 엉망진창으로 망가져서, 월 10만 원대 고시원에서 1년 넘게 살고 있어요.
 
햇볕이 직격으로 강타하는 층인대다, 내창방이라서 정말 덥더라구요.
 
그 방에서 선풍기도 없이 살다가, 누군가 버린, 목 부러진 선풍기 하나 주워다가 눕혀놓고 바람 쏘이면서
 
'그래도 어제보단 오늘이 좀 더 낫다'며 애써 현재 상황을 긍정하려는 저 자신을 바라보면서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만큼 한심한게 뭐 있겠냐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폐끼치는 것도 아니니 나쁠 것도 없겠죠.
 
 
 
새 알바 자리를 아직 구하지도 못했고,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느라 그나마 있던 돈도 다 떨어지는 바람에
 
요 며칠동안 아침은 간장에 밥 비벼 먹고, 점심엔 밥에 케쳡 비벼 먹고 있노라니, 이렇게까지 먹고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 동기들, 후배들은 아무렇지 않게 5천원 7천원 넘는 식당 밥을 먹고, 돈 없다면서 한 끼에 2천원 하는 학생식당에서 밥 먹는데
 
'간장밥이라도 도시락 싸서 갈까'생각하고 있는 저 자신을 보니까
 
'내가 저 사람들이랑 같은 학교 다니는 거 맞나.. 같은 사람이라고 같은 종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구요.
 
정말 너무너무 억울하다는 심정이 들더라구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내가 뭐 얼마나 못나서 이렇게 사나!
 
 
 
나도 한 때는 저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살던 때가 있었는데.. 정말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어요.
 
그때.. 갑자기 너무 미친듯이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더라구요. 비계 반, 살코기 반, 묵은김치 냄새 팍팍나는..
 
두부도 냄새 심하게 나는 600원짜리 두부 말고, 1200원짜리 찌개용 두부 넣어서 밥에 비벼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런 거 어머니께서 해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거만 먹으면 고등학교 급식, 군대 급식, 집밥을 먹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문뜩 지갑을 보니, 지갑엔 4500원이 있더라구요. 교통비로 써야하는 돈이었지만, 정말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너무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학교 근처 시장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겼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장 정육점에 이르렀고.. 충동적으로 뒷다리살을 한 근을 샀습니다.
 
매번 뒷다리살만 한 근만 사면서, 늘 '작게 썰어주세요'라고 부탁드려서 그런지, 직원분이 절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제가 정육점에 가자마자 알아서 뒷다리살 한 근을 국거리용으로 썰어주시더라구요.
 
그렇게 2500원을 쓰고.. 수중엔 2000원이 남았습니다. 사실 목살을 사고 싶었지만 목살은 너무 비쌌어요.. 한 근에 4500원..
 
 
 
뒷다리살 한 근과 2천원을 쥐고, 두부를 사러 집 근처 슈퍼로 향했습니다. 헌데 1200원짜리 두부 옆에 한 모에 500원 하는 모두부가 있더라구요.
 
정말 1분 넘게 고민했습니다. 충동적으로 돼지고기를 사버리긴 했지만.. 정말 굳이 1200원짜리 두부를 사야할까.. 차라리 모두부를 한 모 사고
 
남는 700원이면 김치라면 살 수 있는데.. 그런데 모두부는 냄새가 너무 심하고...
 
 
 
하지만 그날만은 그렇게 찌질하게 살기 싫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200원 짜리 두부를 샀죠!
 
그렇게 두부와 돼지고기를 사서 고시원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돼지고기 김치찌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충족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김치가 없었어요.. 고시원 원장님께 가서 김치를 좀 얻어 올 생각이었는데.. 원장님이 외출하셔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이더라구요.
 
 
 
그래서 원장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렸습니다. 운좋게도 마침 공용식당에 배치된 밥이 있어서 미리 제가 먹을 분량의 밥은 키핑해둘 수 있었습니다.
 
[저희 고시원은 하루에 딱 한 번만 밥을 지어줍니다. 이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 인생들이 다들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밥을 미리 키핑해두지 않으면
 
그 밥도 못먹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찬 밥을 전자렌지에 돌려먹어야 하는 점은 아쉽지만, 밥도 못먹고 자야하는 건 더 아쉽습니다.]
 
 
 
몇 시간이 지나고 원장님이 돌아오신 후,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겨우겨우 김치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일 수 있게 됐습니다.
 
 
 
먼저 돼지고기를 살짝 굽습니다. 돼지고기 색깔이 변할 때까지, 익히는 동안 김치를 냄비에 넣고 물을 붓습니다.
 
두부는 씻어서 잘게 썬 이후, 물이 끟을 때 쯤, 돼지고기와 함께 넣어줍니다.
 
한 5분 쯤 끓이니 정말 김치찌개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냉장고에 키핑해둔 밥을 전자렌지에 데웁니다.
 
 
 
저녁 밥과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완성됐습니다. 냄새가 너무 좋습니다. 방에 돌아와 책상에 앉으니 간장이 보입니다.
 
물론 평소엔 고맙고 소중한 반찬이지만, 오늘만큼은 간장은 보기도 싫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버립니다.
 
한 1분 간, 냄새만 맡다가 이내 허기를 참기 힘들어 밥을 한 수저 뜹니다.
 
김치 한 조각과 돼지고기 한 점을 건져내 밥 위에 얹고 반 수저 베어 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군대 있을 때, 집에서 부모님과 살 때 먹었던 그 돼지고기 김치찌개입니다.
 
물론 뒷다리 살을 넣어서 고기가 살짝 질기긴 하지만 뭐 어떤가요. 고기는 씹을 수록 맛이라지 않습니까
 
고등학교 시절, 군대 있던 시절, 집에서 살던 시절, 좀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던 시절 느꼈던 그 때 그 맛입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공유하고 있는 그 맛입니다.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아직도 이어져 있구나..' 새삼 깨닫습니다.
 
그날 밤엔 고향집 꿈을 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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