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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기리며, 6.25 최악의 전투 "현리 전투"
게시물ID : history_161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잉여시대
추천 : 11
조회수 : 2309회
댓글수 : 38개
등록시간 : 2014/06/06 21: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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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처.PNG


제가 3군단에서 군복무 시절, 유해발굴을 몇 달해서 그런지, 현충일이나 6.25 때 면
가장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도 할 수 있는, 1만 9천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해
3군단 자체가 전멸해버린 현리전투의 전사자분들이 떠오릅니다

현리의 왠만한 산에서는 조금만 삽을 푸면 각종 6.25 물품이 나올 정도로 희생이 컸던 전투입니다.

유재흥이라는 당시 우리말도 못하던 친일파가 자기 휘하의 장병들을 뒤로 하고 파렴치한 도주를 했죠...
박정희 일본육사 3년 선배라 그런가..죽을 때까지 국방부장관, 태국/이탈리아/스웨덴 대사를 하는 등
91세까지 잘먹고 잘살았던 인간이라 더 슬픕니다.

출처 : http://top-dog.tistory.com/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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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5913020252_1.jpg


앉아있는 사람이 유재흥.


지금부터 쓰는 글은 대한민국 국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인 현리전투의 이야기

자세한 작전상황은 밀덕(밀리터리 덕후)이 아닌 이상엔 의미없을테니 간략하게 쓰겠음


3군단은 1950년 10월에 창설되었음. 주로 후방작전을 담당했으나 중공군의 참전이후

최전선에 투입되어 중동부 방어선을 담당하게됨



사건은 강원도 현리에서 벌어짐. 현리는 국군 3군단이 방어하는 거점이었으며 좌측에는 미군 10군단

우측에는 국군 1군단이 방어전선을 구성하고 있었음

중공군은 현리에 주둔중인 3군단을 목표로 공격작전을 수립하고 공격을 감행



당시 3군단의 보급로는 오마치 고개라는 작은 통로하나뿐이었는데 3군단장 유재흥은

그곳에 일부 병력은 배치했으나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고 중공군은 밤사이에 산악지형을

30키로나 돌파해서 오마치고개를 점령해버림.

당시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병력은 달랑 중공군 1개중대 백여명.

포위당한 3군단은 총병력 2만 2천명.


하지만 포위당했다는 공포에 휩싸인 군단장은 소식을 듣자마자 경비행기를 타고 1등으로 도주해버렸고

지휘관을 잃은 부대는 고위 장교들부터 차례로 겁에질려 계급장을 떼버리고 뿔뿔히 흩어져 도망침.

군단의 지휘체계는 순식간에 공중분해.

병사들은 아무런 지휘를 받지 못한 상태로 처절하게 패주.


중공군의 추격으로 70킬로미터 이상 밀려나고나서 미군이 급히 구원부대를 파견해 겨우 정신을 차린 국군은

병력의 절반이상 장비의 대부분을 잃게되었고 역사상 최악의 패전으로 기록됨



미군 총사령관 밴플리트가 이후 유재흥을 만나 물어봄

밴: 자네의 부대는 어디있는가?

유: 잘 모르겠습니다.

밴: 당신 예하 사단들은 어디간거야. 모든 포와 장비는 상실한건가?

유: 그런거 같습니다.

밴: 당신의 군단을 해체한다. 다른 일자리나 알아봐



지휘관 유재흥 약력

대표적인 친일파 일본군 출신 장교. 미군에 의해 해방이후 국군장교로 발탁


의정부에서 패배로 2사단 해체

- 6.25 발발 직후 바로 옆지역 1사단이 파죽지세로 달려드는 인민군의 T-34 탱크에 맞서

대전차 무기 하나없이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피를 쏟으며 기적에 가까운 방어를 해내며 버텼으나

유재흥이 담당한 2사단이 순식간에 공중분해 당하면서 곧바로 방어선이 뚫렸고 이로인해

서울이 그대로 점령당하고 전쟁초반에 저항할 수 있는 시간, 공간적 여유를 날려버림.

결국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림.



중부전선에서 패배로 2군단 해체

-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UN 군과 국군이 북진하여 북한을 완전히 점령하기 직전의 상황에서

대규모의 중공군이 기습적으로 투입되었고 대부분의 부대가 기습에도 불구하고 각부대의

영웅적인 저항 ( 예를들면 미 해병대의 장진호 전투 ) 에 힘입어 단번에 망가지지 않고 버틴 상황에서

유재흥의 2 군단이 곧바로 공중분해


뚫린 방어선으로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전면적인 전선붕괴로 1. 4 후퇴 시작

결국 사라진 2군단의 지역을 터키군 1개 여단( 군단의 10 분의 1병력 ) 이 대신 틀어막고 버틴덕에

겨우 완전 포위를 면하고 UN 군은 후퇴함. 하지만 역시 서울을 다시 빼앗김.



현리전투에서 패배로 3군단 해체

- 휴전선 부근에서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진 전쟁후반부에 군단장이 단 백수십명의 적군에게 겁에질려

부대를 버리고 도주. 군단은 결국 전멸당했고 다시한번 방어선에 대규모 구멍이 남.

이 패배로 전선이 다시 수십킬로미터 밀려났고 그 거리는 수십만의 국군과 UN 군 병사의 피와 목숨으로

다시 회복해야 했음.


정전협상 당시 남한측 옵저버로 참석하였으나 일본군 육사 출신이라

"" 한국어 "" 를 제대로 못알아듣는 바람에 통역을 데려감.


본인이 지휘한 부대는 전부 전멸 혹은 해체당함.

4. 19 혁명이후 군에서 쫓겨났으나 박정희의 군사반란이후 요직에 중용.

(유재흥은 박정희의 일본군 육사 3년 선배)

국방부장관, 각국대사, 대통령 특별 보좌관 등 각종 자리에서 활발하게 활동함.

이후 성우회(퇴역장성모임) 회장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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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전 통제권 환수논의당시 성조기를 들고 앞장서서 반대운동주도


당시 현리전투에서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어 북송. 북한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죽도록 고생하다가

1994 년 전쟁종전 후 40 년 만에 남한으로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에게 면담을 요구했으나

끝까지 면담거부.


원균과 다른점은 그래도 원균은 전투에서 패전후 죽었으나 유재흥은 살아서 나라를 망치고 다녔음.

작년에 91 세의 나이로 잘먹고 잘살다가 사망. 이명박 정부는 즉시 국립묘지 장군묘역에 안장.


원균: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영 파괴, 임진왜란 후기 칠천량 해전. 조국의 운명을 말아먹는급의 무능 2회.

유재흥: 6.25 초반 서울 북부 방어선 파괴, 6.25 중반 1.4 후퇴 직접적 원인, 6.25 후반 3군단 전멸

조국의 운명을 말아먹기 3회 달성. 500 년 만에 원균을 능가하는 업적 달성.



현리전투에서 죽어간 수많은 젊은이들을 위로하는 위령비. 강원도 인제군. 

1335913020252_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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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끝

현리전투는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제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
지 같은 넘 때문에 전작권이 사라져서 그른가...
전작권 환수 반대에 가장 앞장 섰다네요

1차 출처 : http://top-dog.tistory.com/268
2차 출처 :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park&wr_id=29732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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