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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간 백두산의 오해에 대한 오해
게시물ID : history_164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바가바드
추천 : 12
조회수 : 1115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4/06/21 02:21:26
오랜만에 역게 글쓰네요.
 
역게안에만 있으면 그냥볼텐데 베오베까지 가서 오해가 있을까봐 적어봅니다.
 
사실 바로 밑에 글써주신 고려님의 생각이 좀더 합리적인 추론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일단 명나라 영토문제 부터 살펴볼건데요.
 
아마 인터넷에 검색하시면 명나라 영역이 참 다양하게 나올겁니다.
 
만주지방을 장악한 지도는 거의 중국측 지도구요. 그외의 지도가 보편적인 세계인식입니다.
 
현실적으로 명나라는 요서와 요동일부가 영토에 가깝습니다만 장성이북의 경우 과연 명나라 영토인가하는 문제는 논쟁거리가됩니다.
 
먼저 베오베간 글이나 우리가 쉽게 실수하는 것은 지금의 영토관념을 과거에 적용해버린다는 겁니다.
 
일상적감정이입에 가까운 사고인데 아쉽게도 역사적 감정이입범주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장성이남에 대해서는 확고한 영토였으나 만주지방에 관해서는 강대국으로써 강력한 영향력이지 딱히 영토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일시적으로는 점령한적도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중앙정부중심의 행정력은 미치지 못했고 북방민족의 영역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이들이 명에 눌려
 
복속에 가까운 처지였을 뿐이죠.
 
명나라는 건국 초부터 요동을 비롯한 만주지방을 제대로 장악한 적은 없습니다.
 
고려말 조선초에 요동공략설은 사실 이 당시에 요동이 무주공산이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명나라사서에도 조선,고려가 요동을 공격할까봐 걱정하는 대목이 나오거든요.
 
건국 초 명나라입장에서는 북원이 있는 상황에서 요동은 장악하지 못한 공토였습니다. 
 
그래도 요동 즉 조선과 국경선을 맞닿는 의주 인근 부근까지는 명나라 영토로 보는 경향이 큽니다. 하지만 백두산이 있는 영역까지요?
 
 
가장 중요한것은 이 당시 국경관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국경처럼 철저한 편은 못됬다는 것이고 백두산에 대한 영토관념이
 
당시에 명이나 조선에서도 분명한 사료기록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일단 적어도 명나라 영토라고 확신찬 표현은 용감한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4군 6진의 경우도 사실 말이 4군 6진이지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후 지도에 표시까지를 고려했을 뿐입니다.
 
역사의 특성당 4군 6진의 영역도 100%사실도 아예 부정도 아니란것이고 여기서 백두산을 넣은건지 뺀건지를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는겁니다.
 
 
청나라의 경우는 만주가 확실하게 청나라의 소유입니다.  다만 중국과 우리와의 국경선 문제는 애매하거든요.
 
1. 사료에 나온 청과 우리의 국경선은 백두산 정계비에서 그나마 명확하지만 이마저도 애매합니다.
2. 청이 봉금지을 내리고 나서는 더욱 흐려집니다. 양쪽다 서로 국경선은 명확하지않고 그냥 어림짐작 됫던거고요.
3. 청은 백두산을 신성시 했는지는 모르겠네요. 청이 봉금지를 내린 이유는 그 지역을 신성시 했다는 것은 명목상의 표현이고
실제적으로는 당시 만주지역이 북방민족이 힘을 길르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를 견제했던 것과 중국지배가 용의치 않을때 언제든지
짐을싸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4.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질때 조선내부에서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청의 요구를 무시하자 따르자 물론 숙종때입니다. 조선 중후기쯤이라 하겟네요.
어찌되었던 백두산을 기점으로 청과 조선의 영토가 윤곽을 보이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백두산의 소유문제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유목민족인 청이나 농경민족인 조선에 입장에서 평야지대가아닌 산하나를 두고 딱잘라서 니땅내땅 양보못한다라고 주장하기에는...)
5. 청이 간도를 개척한것은 1880년도쯤 부터입니다.  이 마져도 조선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발생하는 일이고요. 임호군란 이후에 청의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청의 주장은 더욱 높아지지만 이후로 조선도 한발도 안지고 영토찾기에 나섭니다. (조선이 백두산인근 간도지역을 버린적은없습니다.)
6. 1902년 이범윤을 간도시찰원에 임명해 간도 실태를 조사한 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직접 관할권을 부여합니다. 여기서 청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자 선후장정을 체결하고 양국은 서로 영토를 증빙할 자료가있더라도 양국대표의 합의결정이 필요하며 예전처럼 대충대충 남기자라고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도가 어디쯤부터 어디인지를 사실 잘 몰라요.  그래서 백두산이 여기에 꼈는지 백두산 정계비내용과 어떠한 관련이있는지도요.
다만 선후장정에서 백두산정계비가 언급되는 걸로보아 간도지역에 상당부분 포함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후로는 간도협약이후 아시는대로구요.
 
 
결론적으로 딱부러지게 청나라영토냐? 중국만 그렇게 답변할 것 같습니다.
 
 
물론 백두산이 전적으로 우리영토였느냐?  백두산이 정확한 표현이냐? 그것도 참 애매하죠.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이 백두산대신 장백산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문에 과거부터 백두산이라고 불렸는지 정확한 표현이 몬지
 
그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어느시점부터 우리는 백두산이라고 부르고 중국은 장백산이라고 고정된것 같습니다.
(장백산이라는 표현은 과거부터 존재해왔던 표현입니다.)
 
  
북한과체결된 내용은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처지도아니고 그 내용이 확실하게 공개된 정식조약인지도 불투명하기 때문에 알길은 없습니다.
 
다만 한반도 국가와 중국이 정식적으로 현대관념의 국경선을 확립한 내용인 것 같고 백두산이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김일성덕분이다? 이것도 알수 없죠.  그 이전에 누구소유인지를 잘모르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국경선은 김일성이
 
만들었다 라고 할 수는 있죠.
 
 
 
그럼 여기까지 읽었을때 질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뭐? 백두산 누구땅이야 그럼?
 
과거의 사례로는 알 수없다가 정답니다. 다만 현재의 영토로는 북한과 중국이 공동관리하고 있다는 점이구요.
 
장백산이라는 표현이 중국식표현이냐? 그것도 잘모릅니다. 당시 그 지역민이 월래 그렇게 불렀던 걸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구요.
 
때문에 우리가 장백산이라는 표현에서 독도와같이 극렬하게 반발하는 것은 지나친 민족주의일 수는 있습니다.
 
누구땅이냐 문제는 통일 이후 간도협약의 부정과 함께 표면상 드러날 문제입니다. (다만 그때 우리가 중국과 힘겨룰만한 국력을 전제로..)
 
지금은 물론 영토분쟁지역은 아닙니다. 북한하고 중국이랑 잘지내잔아요.
 
사실 백두산만 단독으로 무엇이 맞느냐 하는 것은 실질 소유자인 북한의 입장이 큽니다. 남한에서 모라모라해봤자 제3자취급일뿐이죠.
 
통일이후 즉 간도문제 이후에나 영토분쟁되겠지요.
 
 
 
다만 중국이 역사적으로 백두산과 관련하여 고구려나 발해사에서 우리나라를 배제하려는 다분히 정치적 행동을 한다면 그때는 사정이 다르겠죠.
 
이런경우 자국민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적절하긴 할 겁니다.  물론 정도라는 것을 지킬 필요는 있겠지요.
 
결론적으로 장백산이라는 표현에서 중국이 자국역사중심의 입장에서 이런 표현을 쓴다면 우리가 반발할 필요는 있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중국이 장백산과 백두산 모두 공용표현으로 하자는 입장이라면 우리쪽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유도하는게 적절한것 같구요.  영토문제는 문제의식을 통일까지 가지고 있다가 그때 제기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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