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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 대한 오해와 진실
게시물ID : history_166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리독터
추천 : 11
조회수 : 2447회
댓글수 : 15개
등록시간 : 2014/06/28 13:42:56

성리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성리학이 조선에 넘어와 철학적인 부분이 중점이 되어 마치 현실과 동떨어진 사상처럼 보이기 쉽지만

사실 그 시작은 종교비판과 정치철학이 중심이 된, 상당히 현세지향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유물론적 바탕을 가진 논리적 사상입니다

'군자는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다'는 공자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은 갈아치워야 한다'는 맹자에 뿌리를 두고

주자의 '귀신론'부터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이르기까지

성리학의 기본은

'우주만물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이 가능하며, 설명할 수 없는 미신에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

이라는 겁니다.

 

성리학은 주자가 창시했다고 해서 주자학으로도 불리는데

주자의 저서와 사상 중 많은 부분이 내세, 영혼, 환생 등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중심입니다

당시 불교와 도교의 폐단이 극에 달했음을 비춰볼 때, 미신에 의지하고 사후세계를 약속함으로서 현실극복의지를 잃게 한다는 거죠

 

심지어 주자도 당대에는 조상의 영혼도 모시지 않는 후레자식 소리까지 들었다는....

그래서 제사는 지내기는 하면서도

'이건 귀신이 와서 밥 먹고 가는 게 아니다. 자손들이 모여 고인의 넋을 기리는 것 뿐이다'라고 주장했고,

따라서 기억도 못하는 조부모 이상에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고 한 게 바로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천주교 들어왔을 때 상황이 되게 웃긴 게..

'귀신한테 절 하는 거 아니다'라고 주장하던 성리학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상황에서 '우상숭배'라는 천주교나, 그걸 탄압하는 쪽이나...

근데 사실 제사를 거부하고 그런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며 신에 의존하고 천국을 약속하기 때문에 '사학'이라고 했다더군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그렇게 제사에 집착하고 명당 찾아다니면서 성리학의 상징이 제사가 되어버렸으니..

 

이런 이성적인 바탕이 있었기에

전 같으면 기우제만 주구장창 지낼 것을 측우기를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면서 원인을 찾고 대책을 논하게 된 것이고

무력보다 명분과 논리가 중요한 정치가 자리잡게 된 거죠(그게 지나쳐서 이상한 걸로 몇년씩 싸운 게 문제...)

 

성리학이 신분제를 고착화시켜 계층이동을 막았다?

물론 성리학의 명분은 차별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성리학 사회에서의 신분제의 개념은 일반적인 신분제와는 달리, 계층이동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성리학 이전의 동아시아, 그리고 기타 세계에서는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그저 혈연에 따라, 부모에 따라 관료가 되고 직책이 결정됐습니다

 

하지만 성리학은 '우주 만물은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만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고(그 공부가 그저 책 읽는 거였다는 게 문제지만...)

그렇게 논리적 소양이 쌓인 지식인들이 민중을 교화시킬 의무가 있으며, 직접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거기에서 바로 그런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을 가려낼 수단, 즉 과거의 비중이 급속도로 증가합니다

 

사농공상이란 것이 사실 장사보단 농사를 짓고, 머리 좋으면 공부를 해라 이런 겁니다

비록 있는 집에서만 공부를 할 수 있으니 사실상의 세습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중국에서는 서민 출신 과거 급제자도 상당히 많았고

어쨌든 법적으로는 양인 남성은 누구나 과거를 볼 수 있었기에

농민의 자식도 과거에 급제하면 관료, 양반이 되는 것이고

정승판서 자식도 관료가 되려면 과거시험을 쳐야 하게 된 겁니다

조선의 법적 신분제도 '반상제'가 아니라 '양천제'였죠

양반, 사대부란 말 자체도 어떤 혈연집단이 아니라 관료층, 지식인층을 가리키는 것이었구요

 

물론 실제 양반들은 상당히 핏줄을 중요시했습니다만, 그것은 오래된 고정관념이었지 성리학의 가르침은 아니었습니다.

 

또 이러한 과거제 중심의 사회가 되어버려서 평생 일은 안하고 주구장창 공부만 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지만

공무원시험 때문에 일 안 하는 고시생들이 늘어난다고 공무원시험이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혁명 한번 겪지 않았음에도 낙하산을 경멸하고 능력을 중요시하는 게 당연하게 된 것엔 그 영향도 어느정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리학은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한다?

성리학 하면 충과 효만을 중시하는 케케묵은 할배 같은 이미지가 있는데

저렇게 핏줄보다 능력이 중요한 사회를 만들어놓고 혈연에만 의존하는 왕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했을까요?

오히려 성리학은 1000년 넘게 이단시되던 맹자를 성현으로 추앙하고 사서에 포함시키면서 역성혁명까지도 긍정합니다

 

이 맹자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제 선왕이 맹자에게 탕왕이 걸왕을 몰아내고, 무왕이 주왕을 몰아낸 것을 두고 감히 임금을 쫓아내도 되는 것이냐 묻자,

맹자는 그들이 임금을 죽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백성을 져버린 폭군은 임금이 아니라고요.

 

이렇게 왕 앞에서 대놓고

'잘못된 왕은 갈아치워야 한다. 백성을 착취하는 임금이나 관료는 도둑놈이다. 인간에게 해가 되는 신은 없는 게 낫다' 하며

모든 정치권력, 종교권력의 정당성을 민중으로부터 찾고

민중에게 해가 되면 쫓아내야한다고까지 주장한 게 맹자고(로크의 저항권이 생각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요?)

그런 맹자를 1500년 만에 공자급으로 추앙한 것이 성리학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바탕을 통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고

그 조선에서는 혈연으로 계승되는 왕은 잘못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삼사의 비판을 장려하고, 만인의 상소를 받고, 경연으로 왕을 가르치며 왕과 논쟁했던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인간의 이성으로 만물을 설명할 수 있고','그러한 지식인들에겐 계몽, 교화의 의무가 있으며'

'혈연보다 능력이 중요하고','정부는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는 점에서 계몽사상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김용옥 씨에 따르면

17세기 선교사들에 의해 성리학 고전들이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에게 전해졌을 때

'이성에 근거한 논리적 소양을 충분히 쌓은 지식인 중에서도 시험을 통해 선발된 관료들이 역시 평생 그렇게 교육받은 군주와 함께 무력 대신 논쟁을 통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다'는 점에서(실제 현실과는 별개로...)

마치 플라톤의 이상정치를 떠올리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물론 성리학은 근대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계몽주의처럼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도 못했고, 성차별, 인종차별, 신분차별을 부정하는 논리로 쓰이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계몽사상가들조차도 성차별,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죠

하물며 성리학은 1000년 전에 나온 사상입니다.

이게 토착화, 교조화 과정에서 온갖 부작용을 나으며 조선 후기까지 사회를 지배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000년 전 당대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진보적이다 못해 혁명적이기까지 한 사상이고,

그것이 동아시아 사회를 좀더 이성적이고, 능력 중심적이고, 민본주의적으로 바꿔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온갖 전근대적 악습이 마치 성리학의 이미지로, 그 사상의 본질인 양 왜곡되어 인식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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