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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 삼양라면 댓글을 보고 쓰는 우지파동과 삼양 추락의 관계
게시물ID : cook_1027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금가루소년
추천 : 2
조회수 : 82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12 18:24:43
글을 쓰기에 앞서, 두가지는 확실하게 해두고 가겠습니다.

첫번째. 우지파동 때문에 삼양이 법정관리까지 간 것은 사실입니다.

두번째. 전 농심 제품을 벌써 10년 넘게 안먹고 있습니다.

삼양의 몰락이 우지파동과 관련이 없다거나, 농심을 두둔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가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을 읽다보면 삼양이 몰락한 것은 우지파동 때문이며 농심은 어부지리로 1위 자리를 차지했다는 식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흠. 10 %의 진실 때문에 100 %를 모두 믿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여기서 사실은 우지파동 때문에 삼양이 큰 타격을 입었다 정도입니다. 그외는 사실이 아닙니다.

결론부터 적고 간다면 삼양이 1위를 내준 것은 시장의 변화를 전혀 체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최초의 라면은 삼양라면입니다. 1960년에 라면을 들여온 후로 80년대초까지 1위를 놓치지 않았던 업계 1위죠.

농심은 초창기엔 롯데공업이라는 사명으로 라면사업을 시작합니다. 그후 1978년에 농심으로 상호를 변경하죠.

삼양의 점유율은 격차가 클 때는 80 % 이상으로 시장을 석권하기도 하였습니다. 업계에서 80 %면 독점이나 마찬가지죠.

이는 당시 농심의 사명이 '롯데공업'이라는, 음식과는 맞지 않는 이름이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문제점은 맛에서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라면은 스프에 들어가는 재료를 거의 탈때까지 고온으로 건조시킨 후 강하게 분쇄하는 방법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양사가 동일했는데 아무리 맛을 달리 주고 싶어도 공정과정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았고 또 살짝 가미된 탄맛 때문에 맛에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됩니다.

때문에 먼저 시장을 선점한 삼양을 농심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죠.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농심에게도 기회가 찾아옵니다. 통일벼가 수확되기 시작한 겁니다.

70년대까지 라면이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 딱히 먹을게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쌀 수확량은 자급자족하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다른 곡식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문에 저렴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라면은 밥을 대신하는 주식으로 자리잡았던 거죠.

그런데 통일벼로 인해 쌀을 자급자족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수확하게 되자 라면 시장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쌀의 가격이 떨어진 마당에 굳이 밥 대신 라면을 먹을 필요가 없었던 거죠. 실제로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라면 시장은 점점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삼양과 농심은 다른 노선을 걷습니다.

업계 1위인 삼양은 굳이 모험을 하려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맛을 지키면서 딱히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합니다.

웃긴 것이 이런 삼양의 자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크게 변한게 없어서,

내놓는 광고가 '라면은 원래 이 맛!'이라던가, 신제품처럼 내놓은 '삼양라면 클래식' 등.. 한사코 예전의 영광만을 바라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농심은 완전히 다른 자세를 취합니다. 주식에서 라면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예상한 거죠.

이후 농심은 라면 맛을 바꾸려고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우선 고온건조로 인해 천편일률적인 맛을 내는 스프 공법부터 바꾸죠.

그로인해 다양한 맛을 내는 것이 가능해지자 본격적으로 '분식' 시장에 뛰어듭니다. 예. 라면을 주식이 아닌 분식으로 바꿔버린 겁니다.

당시 분식으로 인기가 많던 것은 '우동'이었습니다. 농심은 여기에 착안하여 1982년, '너구리'를 내놓습니다.

어차피 주식으로 라면의 활로를 개척하긴 힘들기 때문에 분식으로 팔 수 있는 우동류를 내놓으면서 전혀 새로운 시장을 뚫은 거죠.

시장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점심과 저녁 사이, 그리고 야식으로 너구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농심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83년, 약간 적은 양을 담아 분식에 좀 더 어울리는 '안성탕면'을 출시합니다.

그리고 1984년, 짜파게티가 출시되면서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어집니다. 1986년에 신라면을 내놓으면서 굳히기에 들어가죠.

신라면이 나온 시점에서는 더이상 주식과 분식을 가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라면계에서는 농심이 삼양을 압도했으며 점유율에서도 두배이상 차이가 나버립니다.

삼양도 여러 라면을 새로 출시해서 반격을 바라고 있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살아남은 것은 짜짜로니 정도입니다.

그후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우지파동이 터지면서 겉잡을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죠.

정리하자면 삼양이 라면업계에서 1위 자리를 내놓은 것은 단순히 우지파동 때문이 아닙니다.

시장의 요구를 전혀 읽지 못하고 수성의 입장만을 취했기 때문에 점차 자신의 울타리를 스스로 좁혀버린 결과입니다.

실제로 '나가사키 짬뽕'이나 '맛있는 라면' 같은 제품이 나오기 전까지 삼양의 주력은 40년 넘게 그냥 '삼양라면'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농심은 업계 1위인 아직도 매년 새로운 제품을 내놓습니다. 두 회사의 차이는 얼마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느냐.. 이거였던 거죠.

물론 우지파동이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점유율에서는 두배 이상 차이가 났지만 충분히 해볼만한 상황이었죠.

그런데 우지파동이 터지면서 이런 판이 완전 나가리 되버린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지파동 때문에 삼양이 1위에서 밀려났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미 삼양은 한참 뒤처진 2위에서 우지파동을 맞이했습니다.


한창 농심의 병크 + 미국산 쇠고기 때문에 삼양이 반사이익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사실과 전혀 다른 낭설이 사실처럼 퍼지고 있는 것은 바로 잡아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나 주변의 누군가가 우지파동과 삼양의 관계를 상당히 극단적으로 알고 있다면 이정도 얘기는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녁이네요. 식사 맛있게 하시길.


덧붙임.

우지파동에서 삼양이 쓴 '공업용 소 기름'은 철저하게 미국식 관점입니다. 미국은 소 기름을 식용으로 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공업용'입니다.

그런데 이걸 공장이나 돌릴 때 쓴다고 생각한 모 기자가, 그것도 술자리에서 슬쩍 넘겨들은 것을 터트려버린게 우지파동입니다.

너무 삼양에만 불리하게 쓴 것 같아서, 덧붙여 둡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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