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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와 노는 고양이 (한국고전번역원)
게시물ID : humordata_5568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비누줍기달인
추천 : 2
조회수 : 124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9/12/05 17:17:00
내가 세든 집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쥐들이 살고 있었다. 그 쥐들은 항상 밝은 대낮에 떼지어 다니며 제멋대로 갖은 횡포를 우렸으니, 침상(寢牀) 위에서 수염을 쓰다듬는가 하면 흑은 문틈으로 머리를 내밀기도 하고, 담벼락을 뚫고 농짝에 구멍을 내어 집안에 온전한 구석이 없으며 옷을 담은 상자나 바구니를 마구 갉아 옷걸이에 성한 옷이 없었다. 심지어 부엌문을 밀치고 들어가 음식을 덮어둔 보자기를 들치고서는 사발을 딸그락거리고 항아리를 핥는가 하면 곡식을 먹어치우고 책상을 갉으며 시렁에 올려둔 귀한 책까지도 모조리 쏠아 망가뜨리는데, 얼마나 날쌔고 빠른지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다. 그놈들은 항상 줄기차게 오르내리고 끊임없이 드나들며 밤새도록 시끄럽게 뚱땅거리므로 벽을 치며 고함을 질러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아, 슬그머니 일어나 몽둥이를 집어던져 놀라게 하면 잠시 엎드려 있다가 곧 다시 일어났다. 쥐구멍에 물을 붓자니 담벼락이 허물어질까 염려되고, 불을 지르자니 집이 탈까 염려되고, 돌맹이를 던지자니 그릇이 깨질까 염려되어 손으로 때려잡아볼까 하였으나 구멍 속으로 숨어버렸다. 애석하게도 나에게는 당(唐)의 두가균(杜可均)이 사용한 부적(符籍)도 없고, 송(宋)의 소동파(蘇東坡)가 지녔던 신검(神劍)도 없으니, 나의 물건이 손상되 는 것만이 염려될 뿐만 아니라 내 몸이 물어뜯기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몹시 걱정하던 끝에 이웃집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빌려와 으슥진 곳에 놓아두고 쥐 를 잡게 하였더니, 그 고양이는 쥐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전혀 잡으려들지 않았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쥐들과 한 패가 되어 장난을 하니, 쥐들은 쥐구멍 앞에 떼지어 모여 거침없이 더 심하게 횡포를 부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이 고양이는 편히 사람의 손에서 길러져 제 할 일을 게을리하니 말하자면 나라의 법관이 부정한 짓을 한 자를 제재하는 일에 힘쓰지 않고 장수가 적을 방어하는 일에 태만한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며 한참 동안 개탄하다가 실의에 빠져 이 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지 며칠 후 어떤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우리 집에 고양이가 있는데 매우 사납고 날쌔어 쥐를 잘 잡는다.' 하므로 그놈을 부탁하여 데려와 보니, 부릅뜬 눈동자는 금빛이 번쩍이고 무늬진 털빛은 표범의 가죽 바로 그것이었는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밤낮으로 집 주위를 맴돌며 살피고, 쥐구멍 가까이 가서는 조용히 코를 대보아 쥐냄새를 맡으면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앉아서 허리를 웅크린 채 공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가 쥐수염이 구멍 입구에서 흔들거리는 것을 보자마자 쏜살같이 달려들어 머리를 깨부수고 창자를 끌어내며 눈알을 파내고 꼬리를 잡아 빼버리니, 10여 일이 채 안되어 쥐떼가 잠잠해졌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닌 공중을 날고 나무를 타고 헤엄을 치고 구멍을 뚫고 잽싸게 달리고 하는 잔재주를 부리지 못하게 되니, 방으로 드나들던 구멍이 말끔해지고 저들이 살던 굴의 입구에는 거미줄이 쳐짐으로써 그전에 찍찍거리며 갖은 횡포를 부리던 자취가 깨끗이 사라져 집기며 의류 등 물건이 하나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대체로 쥐는 본디 숨어사는 동물로서 항상 사람을 무서워한다. 전에 그처럼 횡포를 부리고 피해를 끼친 것은 그것들이 어찌 깊은 꾀와 뱃심이 있어 사람을 깔본 것이겠는가. 대저 사람이 그것들을 막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처럼 멋대로 굴었던 것이다. 아, 사람은 쥐보 다 슬기로운데도 쥐를 막지 못했고 고양이는 사람보다 슬기롭지 못한데도 쥐는 고양이를 무서워하였으니, 하늘이 만물을 세상에 내면서 이처럼 제각기 할 일을 부여하였다. 돌이켜 보면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 명예를 훔쳐 의리를 좀먹고 이익을 탐하여 남을 해치는 짓을 쥐새끼보다 심하게 하는 자들이 많으니,

.

나는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을 볼 때 마칙 부정한 자를 제거하는 것과 비슷하였으므로 마음 속에 느낀 점이 있어 이 글을 쓴다. ㆍ참고사항 최연(崔演 : 1503(연산군 9)∼1549(명종4))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강릉, 시호는 문양(文襄). 1525년(중종20) 문과에 급제하고 1530년(중종25)에 사가독서하였으며, 벼슬은 형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 당시의 대가로 불리는 소세양과 신광한의 찬사를 받았으며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의 애책(哀冊) 등 국가의 중요한 글들을 많이 지었다. 이 글은 그의 문집 《간재집》권11 잡저에 실린 것으로 원제는 묘포서설(猫捕鼠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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