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책속의 명언66 -밤이 선생이다/황현산<유신을 부정하는 지식인의 산문집>
게시물ID : lovestory_679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아헤
추천 : 0
조회수 : 53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06 19:15:06

출판일 13.06.25
읽은날 14.08.05

11p.
생각하면 우습다. 내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커피라도 한 잔 뽑아다 미스 아무개에게 권했어야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것이, 당시에는 자판기가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도 그때가 유신시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우리는 모두 괴물이었다. 불의를 불의라고 말하는 것이 금지된 시대에 사람들은 분노를 내장에 쌓아두고 살았다. 전두환의 시대가 혹독했다 하나 사람들을 한데 묶는 의기가 벌써 솟아오르고 있었다. 유신시대의 젊은이들은 자기 안의 무력한 분노 때문에 더욱 불행했다.

12p.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23p.
세상도 군대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군대 문제는 여전히 젊은이들을 괴롭힌다. 대학에 입학한 남학생들이 한두 해를 방황 속에 허송하다가 '복학생 아저씨'가 되고 나서야 공부에 전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군대 생활이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군대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32p.
용산참사를 해결할 수 있고, 해야할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 이 참사가 잊히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주검이 땅에 묻히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이 제풀에 지치고, 릴레이를 하는 사람들의 힘이 바닥나고, 그래서 갑자기 국가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살라는 대로 살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봤자 결국은 '저만 손해'라는 것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일까.

65p.
집안에 큰일이 있을 때 할머니들은 새벽녘에 마당으로 나가 샘물 한 그릇을 상 위에 올려놓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도를 비손이라고 하는데, 거룩한 존재의 영검을 빌리자는 것보다는 대사를 앞두고 마음을 경건하게 닦는 데 더 목적이 잇었다. 그 시간에는 지극히 회의적인 남정네들도 기침 소리까지 조심했다.

76p.
체벌 없는 교실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달 전에도 한 중학교 교사와 체벌 금지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 실력과 인품과 열정을 두루 갖춘 젊은 교사다. 노력하겠지만 성공할 자신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중고등학생들의 사회는 '동물의 세계'라고도 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한국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체벌에 의지하는 교육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난폭한 아이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이 우리 동기들의 자아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듯이, 지금의 교실도 학생들이 앞으로 살게 될 세상의 그림이 아닐 것인가.
학생들에게 언제까지나 폭력은 폭력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다거나, 맞지 않고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남들이 벌써 하는 일을 우리만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 이유는 없다. 우리 사회의 지성을 총동원하여 체벌 없는 교실을 상상해내야 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79p.
역사는 과거와 나누는 대화라고 흔히 말한다. 유령의 역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편협한 주관성으로 역사의 입을 틀어막고도 대화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이번 국사 교육 번복 소동에서 보듯이, 역사의 입을 막았다 열었다 하며 그 눈치를 보는 사람들의 이상한 대화법이다.

89p.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보려면 특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데, 내가 준비를 끝낼 때까지 영화관이 기다려주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107p.
... 그 국문과 교수가 정식 표현이라고 부른 것을 나는 절대적 표현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이라고 말할 때는 '어머니는'이나 '할아버지는' 같은 다른 비교의 대상을 암암리에 상정한다. 그 표현은 상대적이다. 그러나 '아버지를'은 어떤 비교의 대상도 없이 곧바로 그리고 오로지 아버지를 문제의 중심에 놓는다. 그 표현은 절대적이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여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도 이 절대적 표현에 의지한다. 그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여 자기 마음을 온전하게 전한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이 사랑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사랑이다. 이 사랑은 어쩌면 그에게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삶의 여러 난관이 그의 사랑을 둔하게 만들고, 그의 미숙한 정신이 작은 일도 고깝게 생각한 나머지 사랑 속에 미움이 싹틀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의 그는 완벽한 사랑을 꿈꿀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떨리던 순간의 추억을 되새겨 삶의 고비마다 무디어지거나 빗나가는 사랑을 다시 날카롭게 바로잡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109p.
지금 어떤 사람들이 학생들의 교과서에서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써서 민주주의에 선을 그으려 한다. 자유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말이 이 땅에서 자유를 억압한 적은 없지만, 민주주의 앞에 붙었던 말은 민주주의도 자유도 억압했다. 이를테면 '한국적 민주주의'가 그렇다.

114p.
... 그러나 그 이후 이상하게 학교 폭력이 고개를 숙였다. 그 폭력 학생들이 선생의 말을 이해하고 설득이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교내에서 널리 존경받는 한 선생이 자기들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어떤 연구 같은 것을 했다는 사실에 일종의 감동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폭력에 대해 부적 높아진 관심이 부질없는 것일 수는 없다. 이 역시 맥없는 말이 되겠지만, 사회의 관심은 적어도 그 가해자 학생들에게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문제는 이 관심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한때 들끓던 여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닫게 되면, 그때 모든 학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지옥이 된다.

137p.
모교의 시청각 자료실에서 조교를 할 때, 평화봉사단으로 와 있던 미국 청년이 제법 유창한 한국말로 물었다. 강릉 경포대에는 달이 다섯이라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이럴 때는 대답해줄 의무가 있다. 다섯이 아니라 일곱이다.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경포 호수에 하나, 술잔에 하나, 앞에 앉은 여자의 두 눈에 하나씩, 그리고 …… 손가락셈을 하며 듣고 있던 유타 청년이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마지막 하나는 나도 알겠다. 당신의 가슴에 하나, 맞지? 맞긴 한데, 이럴 땐 가슴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는 거야. 왜냐고 묻지 않는다. 그는 짧게 "원더풀!"을 한 번 외치고 자리를 떴지만 "참, 한국 사람들이란!" 이 정도가 하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174p.
사소한 것과 우리가 잘 아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이다. 일상에 묻혀 살아온 사람이 거창한 지식을 갖기는 어렵다. 까다롭고 복잡한 이론체계에 친숙해진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하고 있는 지식이 반드시 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주부가 여성주의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지만, 자기 친정이 어떻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구별하여 키웠는지는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다.

179p.
루쉰은 그의 유명한 소설 '아큐정전'에서 중국인들의 '정신승리법'에 관해 말한다. 아Q는 가족도 정확한 이름도 없는 날품팔이 농민으로 비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을 늘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날마다 모욕당하지만 날마다 승리한다. 누구에게 뺨을 한 대 맞으면 자신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맞아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 돈을 한 푼 빼앗기면 불쌍한 녀석에게 적선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달라질 것은 없으니 일찌감치 마음을 고쳐먹자는 것이 그 내용인 이 정신적 승리가 은폐되고 왜곡된 패배주의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패배주의는 매우 편안하다. 무엇보다도 정신의 승리는 실제적인 노력을 면제해주기 때문이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