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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임금과 사관(史官)
게시물ID : history_178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1
조회수 : 268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8/20 19:21:00
"사관(史官) : 넓은 의미로는 고려·조선시대에 사초(史草)를 작성하고, 시정기(時政記)를 찬술하는 사관(史館)·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또는 춘추관)에 소속된 수찬관(修撰官) 이하의 모든 관원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사초의 작성과 시정기의 찬술에 전념한 예문춘추관(또는 춘추관)에 소속된 고려시대의 공봉(供奉)·수찬(修撰)·직관(直館=直史館)이나, 조선시대에 기사관(記事官)을 겸대한 예문관의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관이라 할 때는 협의(좁은 의미)의 사관을 의미하였다."
- 민족문화대백과​
 
사관1.png
(사진에서 등을 보이고 붓으로 뭘 적고 있는 사람이  조선의 속기사 사관임)
 
보통 사극 드라마 보면 임금과 신하들이 회의를 할 때 옆에서 열심히 오가는 이야기들을 받아 적는 신하들.
사관의 자리는 세종 대왕 재임 시절부터 겨우겨우 어느정도 자리가 정착됨.
어느 왕이던 사관은 참 얄미운 존재였음.
까딱 잘못했다가는 임금이 말실수 한게 몇백, 몇천년 이상 전해지기 때문임.
 
 
태종 임금 때 사관(史官)과 가장 많이 투닥거렸던 시절이고 보면 아마도 그 시절부터 사관의 자리가 기반을 다지던 시기라
왕과 마찰이 가장 심했나 봄.
태종 임금과 사관의 여러가지 일화들 몇가지 소개함.(약 2% 정도 각색된 내용들임)
 
1. 일단 사관은 임금과 신하들의 오가는 말을 재빠르게 받아 적어야 하는데 임금이나 신하들이 우리말로 하면 이걸 가장 적절한 한자를 선택해서 글로 적어야 함. 물론 궁서체로 적다가는 다른 관리들에게 진지하게 사관 자리 다시 한번 생각해보란 소리 듣지 않겠음.
영어는 필기체, 한자는 초서체로 속기사 수준으로 휘갈겨 썼다가 나중에 다시 정자로 적었음.
또한 사관이 되려면 순간순간 말의 뜻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한자를 선택해야 하니 문장력 또한 탁월해야 함.
이게 근데 상당히 어려운 일임. 글자 하나 잘못 써놓는 바람에 탄핵 받고 귀향 가기도 했었음.
임금이 어떤 고급관리의 범죄 비슷한 행위를 "문제 될거 없다"라고 이야기 한걸
사관이 "문제 삼지 않겠다"로 적어 놓았다고 탄핵 받은 적도 있음.
'문제 될거 없다'는 죄가 없다지만 '문제 삼지 않겠다'는 죄가 있지만 봐준다는 의미가 된다고... 
 
2. 태종 즉위 초에는 사관이 임금 곁에 다가가서 임금 이야기를 받아 적으려다가 궁궐 문지기 보던 사금(지금의 대통령 경호원 정도)에게
"사관? 그거 뭐 먹는거냐?" 하고는 불싸다귀 맞고 쫓겨 날 정도로 사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 하였음.
 
3. 사관은 보통 2명이 입장해서 글을 적었는데 중국의 예를 들자면 좌사관(左史官)은 임금이나 신하의 액션을 보고 적었고 우사관(右史官)은 임금이나 신하들의 말을 적었다고 함.
그러니까 좌사관은 "임금의 노하여" "임금이 허리를 굽혀" 등 등의 액션을 적었다고 추정됨.
  
4. 임금이 매사냥 하러 가는데 따라 갔다가 쫓겨날뻔.
"아 저자는 무슨 케릭터이길래 붓으로 사냥하러 다니는고? 저거 무슨 스킬 배운거래? 짜증나는데..."
눈치 빠르게 이숙번이 중간에서 자리를 잽싸게 정리함고 상황 종료. 
며칠 있다가 임금이 승지에게 사관이 왜 자꾸 사냥터까지 쫓아 오냐고 따짐. 
승지. "임금님하. 사관 뿐만 아니라 승지도 사관 역활을 겸하니까 앞으로 승지들 앞에서도 말조심 좀 하쇼~!
저번에 나한테 욕한거 다 적어 놓았음^^ 우하하하하하"
임금이 화들짝 놀라며 "이거 무슨 마리 앙투와네트 보리밥 비벼 먹는 소리냐? 난 몰랐는데... 지금까지 한 말 다 취소.
앞으로는 니네들이랑도 말 안할란다~!" 하고는 태종 할배가 엄청 삐졌다고 함.
 
5. 태종 임금은 사관들을 상당히 두려워 한 듯 함.
신하들의 처벌이나 자신의 행동과 말이 사관에게 어떻게 비춰질지 고민을 한 것이 여러차례 실록의 기록에 나옴.
나중에는 신하들과 논쟁을 벌이다 태종 임금이 말발에서 좀 밀리게 되면,
"야! 이거 투닥거리다가 사관이 보고 듣고 또 욕 적어 놓는다. 고만하자. 고만!" 하고는 회피 스킬도 연마 하심.
 
6. 승지들도 임금이 이야기 한것을 나중에 정리도 하고 기록도 하기 때문에 승지=사관과 같은 입장임.
그러나 승지들은 직급이 다들 높기 때문에(정3품) 젊은 사관들(7,8,9품) 보다는 있는 그대로 쓰기가 힘들었을듯.
당연히 젊은 사관들과 승지들간에도 "저런 애송이들", "나이들어 욕심만 생긴 노망난 늙은이들" 하고 싸울때가 많았음.
하루는 임금과 승지들이 모여서 뭔가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관이 이거 듣고 받아 적으려 입장 하려고 하다가 문지기에게 제지를 당함.
나이든 관리인 김과(金科)라는 할배가 사관에게 "여기 승지들도 많은데 꼭 사관이 들어와야 하냐?" 고 면박을 줌.
젊은 사관인 수찬(修撰) 노이(盧異)가 김과에게 "승지가 사관일을 다 해먹을꺼며 사관 따윈 필요 없겠네?"
하고 삐져서 나가버렸음.
태종 임금은 그 장면을 보고 계시다가 계속 보고만 계셨음.
마음 속으로는 아마도 '김과 이겨라''김과 화이팅!'을 외치며...
 
7. 그래도 가끔은 임금이 기분 좋을때면 웃으면서 사관과 대화도 하고 잘모르는 것도 물어 봤다능.
사관도 전대의 임금들이 했던 말이나 기록들을 복습하고 다니므로 지금의 네이버 지식in 정도 되는듯.
당시 사관은 기록만 하는게 아니라 임금에게 정책현안에 대해 토의도 하도 탄핵도 하고 그런 자리였음.
 
8. 한번은 사관이 대궐에서 나오다 삼군총제(지금의 군사령관 정도)를 만났는데 깍듯이 인사 안한다고 딱 걸림. 
솔직히 안그래도 사관을 담탁찮게 여기던 태종 앞에서 임금 말씀 힘들게 듣고 그거 요점 정리랑 줄거리도 파악 해야 하고
임금 앞에서 제대로 붓으로 받아 적지 못한 거 외워서 얼른 자기 책상에 가서 써야 하기 때문에 중얼중얼 거리며서 갈 수 도 있었는데
이 삼군총제(권희달이란 할배임)가 웬 젊은 벼슬아치가 인사도 안하고 지나침에 왕뚜껑이 열려 버림.
"너 뭐하는 자냐?" 
"(아까 임금이 누구를 좌천 시키라고 했는데 누구더...) 어! 총제님. 저 사관임" 
"이생퀴 봐라? 임금 곁에서 붓질한다고 육군대장 우습게 보이지? 너 그 따위로 해서 사관 생활 끝나냐?" 
차마 사관은 못 때리고 사관 수행하던 서리를 한대 때림.
보통 관직에 있는 관리들끼리는 계급의 차이가 있어도 절대로 서로간에 꿀밤 때리기는 할 수 없었고 몸종을 잡아 가둬 버리는게 관례임.
몸종이 들고 있던 관리의 우산이나 서류 보따리를 양반 신분인 관리가 직접 들고 나가야 하게 때문에 몸종이 없는 경우 관리들은 일단 동작 그만이 되어버림.
게 당시에는 정말 쪽팔린 일임. 벼슬하는 양반이 몸종도 없이 짐을 들다니...!!!
이건 짐을 들고 어쩌구의 개념이 아니라 목숨 보다 소중한 양반 체면 문제임.
(만약 요즘 그룹 회장단 회의 하는데 다른 회장들은 기사들이 모셔 오고 비서가 문 열어 주고 그러는데 어떤 회장이 직접 운전해 와서 평행 주차 못해서 낑낑데면 쪽팔리지 않겠음?)
그런데 이유 불문 사헌부에서는 사관의 몸종을 허락 없이 가두었다고 삼군총제를 바로 탄핵 함.
삼군총제. 그 무섭다던 태종 이방원 앞에 끌려가 다른 신하들 보는데서 있는욕 없는욕 다 먹고 폭풍 개갈구 당했다고 함.
제 실록에 보면 "니가 나이살 처먹고? 어? 아직도 또라이 짓이냐고? 어?" 정도의 말도 나왔다고 함.(汝年旣不少, 狂肆不減, 何也!)
이게 태종 할배가 사관을 위해서 그런게 아니라...
"괜히 사관들 건들지 마라. 사관들 잘못 건들였다가 잘못하면 몇날며칠 너 탄핵 한다고 전부다 난리 피운다고...
형도 피곤해지기 싫으니 좀 잠자코 찌그러져 있어라." 정도로 다행히 훈훈하게 마무리...
 
9. 사관이 육조 간부회의 할때 참석이 가능한 것은 태종5년때 부터.
그전까지는 문지기한테도 쫓겨나고 몰래 임금이 거처 하는데 숨어 들어가서 임금의 말을 엿듣다가 들켜서 귀양도 가고...
그러나 때때로 임금이 기분 좋을때는 곁에 있는것을 허락하다가 또 어떨때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등 태종때는 사관의 자리가
불분명했음.
 
10. 사관이 경연장에 처음으로 나와서 임금과 신하의 말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것은 정종1년때 부터.
그전에는 그냥 임금이 신하들과 한말을 옆에서 듣거나 공문서, 임명장 등을 통해서 사초를 모으고 또 다른 신하들이 
"나 임금과 그때 이러이러한 말 했다. 여기 같이 들은 증인도 있다." 이 정도 말도 글로 모아서 사초를 만들고 실록을 편찬함.  
거 뭐 사극에 보면 임금 아랫자리에서 두사람이 개다리소반상에 붓들고 뭐 받아 적는 모습은 좀 나중의 장면임. 
 
11. 밤중에 궁궐에 불이나 임금도 화재 대피하는 소동.
임금이 불타는 궁궐을 바라 보며 궁궐이 다 타는것 은 어쩔수 없으나 "사람은 상하게 하지 말라. (부의금 많이 나간다!!!)"라고 명함.  
그런데 사명감이 뛰어난 숙직 보던 사관 한 명이 불타는 궁궐에 뛰어 들어가 지금까지 기록했던 사책(史冊. 실록의 바탕이 되는 기초 자료들)을 꺼내어 왔음. 이럴 경우 보통 칭찬하고 뭐 좀 하사품 내려줘야 하는게 관례임... 임금, 그냥 멀뚱히... 그걸로 끝.
아마 태종의 생각은 "그거 뭐 내가 저번에 욕한거도 받아 적은거 같던데 그냥 다 태워버리지... 생퀴가 눈치도 없어 ㅠㅠ" 이러 했을듯...
 
12. 임금이 간만에 활쏘고 사냥하다가 아드레날린 분비 과다로 말에서 떨어짐.
한때 오랑캐며 왜구 때려 잡던 아버지 태조 할배 따라 다녔던 태종 이방원.
임금 체면에 창피하기도 하고 또 낙마(落馬) 했다는 소문나면 안그래도 뭐 한건 특종 건질거 없나 안달이 난 신하들이 옥체를 보존하라는 상소를 빗발 칠듯하여 
"나의 낙마를 사관들에게 알리지 마라"고 함. 그러나... 그 말을 어떤 경로로 전해 들은 사관이 "오~ 이거 임금의 낙마도 특종이지만 낙마한 사실을 알리지마라고한 말이 더 특종이군^^ 얼릉 이계덕 기자에게 제보 gogo"
낙마 한 사실을 알리지 마라고 한 말까지도 사초에 다 적어 버렸고 그게 결국 실록에도 뜨악~ 하게 실려 있음.
(인터넷에 태종이 헛발질 한것 적지말라 한것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실록에는 없슴. 이 이야기가 와전된듯함.)
물론 며칠 후 궁궐안에 임금의 낙마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임금이 만나는 신하마다 한소리씩 하고 그랬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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