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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책속의 명언93-너를 봤어/김려령<늪지에서 핀 연꽃같은 사랑>
게시물ID : lovestory_687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아헤
추천 : 0
조회수 : 104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10 20:22:19

출판일 13.06.28
읽은날 14.09.10
203쪽.

16p.
갓 서른 넘은 여자의 표정치고는 볼이 지나치게 굳었다. 웃어본 적이 단 한번도 없는 사람처럼. 아내의 편집자가 아니었다면 한자리에 그토록 오래 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차를 마신 뒤 잔에 닿은 입술 자국을 수시로 닦는 행동도 거슬렸다. 옅은 살구색 립스틱을 발라 잔에 묻었을 것 같지 않은데도 마실 때마다 닦았다. 나 좀 보아요, 하는 의식된 행동. 그러니까 그게 자연스럽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이 불편하다. 의식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척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냥 드시지 그래요? 빨대라도 드릴까요? 그런 말, 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해 뒤 우리는 결혼식을 올린다.

46p.
영재가 나를 찬찬히 훑어보고 보조석에 앉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켠다. 그리고 썬루프를 열어준다.
"담배 피워도 돼."
영재가 담배를 꺼내 허벅지에 몇번 툭툭 치고, 나를 휙 본다.
"왜?"
"내가 이 바닥 밥이 벌써 오년이거든요. 저한테 왜 그러세요? 나 진짜 웬만한 소문은 그냥 흘리는 사람인데, 선배님 정말 후배 건드리는 사람이에요? 내 담배를 왜 사와요?"
후후후.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영재가 문 담배에도 불을 붙여준다.
"왜 웃어요, 사람 말하는데. 나야 워낙 개 같으니까, 이 새끼 작업 들어갔구나 하고 마는데, 아시잖아요. 글 쓰는 애들 은근히 순진한 거. 가끔 선배님이 하도 유명하니까, 작가답지 않게 좆나게 예쁘게 생겼으니까, 아 뜨거워. 아 씨, 이 담배 왜 이렇게 짧아."
주유소에서 받은 물티슈로 영재의 손가락을 감쌌다.
왼손. 검지와 중지 안쪽으로 작고 붉은 반점이 돋았다.
"이거 봐, 이거! 막 벌렁벌렁해. 이렇게 해서 꼬신 애들 몇명이에요? 왜 자꾸 웃어요!"
"너 예뻐서."

52p.
아내가 그랬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그 용이 개천을 다 책임져야 하느냐고.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용으로 보이겠지만 다른 용이 보면 아직 이무기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온갖 것들이 달려든다. 그러다 용이 추락하면 이제 올라뎌볼 용조차 사라진다. 자기들 스스로 없앤 희망이다. 아내는 개천에서 나오는 사람의 손은 잡아줘도, 끌어당기려는 사람은 손목을 잘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천 것인 내 가족의 손목을 잘랐다. 나만 샀으니까.

60p.
차를 몰아 서교동으로 달렸다. 자정을 넘긴 까페 골목은 한산했다. 빌라 앞에 차를 세우고 영재의 집으로 올라간다. 일층, 이층, 삼층. 머리 위 쎈서등이 꺼졌다. 벨을 누른다. 누구세요? 늦었지? 영재가 문을 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들어오세요."
현관에 들어왔는데 신발을 쉽게 벗을 수가 없다.
영재도 신발장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너 좀 안아도 될가?"
"선배님 지금 별로 섹시하지 않은데……."
툭 웃음이 났다. 섹시라니. 내게 그런 게 있었나? 영재를 본다. 머리띠로 앞머리를 모두 뒤로 넘겼다. 염색한 갈색 머리가 새로 난 검은 머리에 일 쎈티미터 정도 밀렸다. 화장 지운 얼굴이 더 앳되다. 어쩌면 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병풍 뒤 남자로 머물러야했는지 모른다.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만 잠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는. 그래야 했을지도. 나는 머리띠에 물린 머리칼 몇 가닥을 빼주고 한 걸음 물러났다.
"미안하다. 후후후."
그냥 웃었다. 영재가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나를 꼭 안는다. 왜? 예뻐서요. 나도 영재를 안는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이렇게 안고 싶었다. 영재가 내가 아닌 남자와 함께 있어도 괜찮았다. 거기서 음식을 먹어도 좋았고 누군가와 떠들어도 좋았다. 등 뒤에라도 내가 느낄 수 있는 거기에 있으면 되는 거였다.
"앞으로 내가 예쁠 때마다 안겨."
"아."
"뭘?"
"혀."
영재의 볼을 가볍게 감싸고 혀를 넣어준다. 영재가 나의 혀를 맛있게 받는다. 침이 달고 혀에 닿는 치아가 매끄럽다. 길게 입을 맞춘 뒤 다시 영재를 안고 집 안을 둘러본다. 
...
영재의 허벅지에 얼굴을 기댔다.
"자고 싶다."
영재가 하얀 파티션 뒤 자신의 침대를 가리킨다.
"주무세요."
"같이 잘래?"
"침대가 하나라서요."
꼭 안고 무척 단 잠을 잤지 싶다.

99p.
싫은 것에 초연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가. 어릴 때 밟은 압정도 기억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잊나. 정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운 정마저 가지않았다. 싫은 것도 관심이라는 말, 나는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악의에 찬 관심은 혐오다. 너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 하는 관심은 살기다. 싫다면서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좋아하는 거 아냐? 오, 당신 현자시여. 조롱 뛰는 심장에 단검이 꽂히기를. 싫다면 싫은 줄 아는 게 낫다. 굳이 미련이나 긍정적인 관심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싫어서 죽을 수도 있고, 싫어서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107p.
영재에게 할아버지가 있다면 내게는 어머니가 있다. 죽이려면 확실히 죽이고 살리려면 확실히 살려라. 몇번 찌르고 정신 차렸겠지, 하는 건 니 생각이야. 살았다 싶으면 또 같은 짓을 해. 화투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래. 저놈은 주둥이로만 하는 놈이니 두면 알아서 죽을 것이고, 저놈은 두면 지 패로 나 죽이고 저도 죽을 놈이니 초장에 죽여야 하고, 같이 좀 놀 놈이다 싶으면 내 패 접어 확실히 밀어주고, 이놈 순 꾼이구나 싶으면 거덜을 내버려야 하지. 놀 줄 모르는 놈하고는 상대하는 게 아니다. 딴 돈 판 밑에 감추고 기어이 남의 돈으로 커피 마시는 놈도 마찬가지고. 초반에 힘준 놈치고 끝까지 가는 놈 못 봤다. 그런데 애초에 패가 큰 놈은 초장부터 커. 저놈은 저게 끝이지 까불다가는 좋은 패 들고도 죽는다. 똥쌍피 들었다고 광 셋 든 놈한테 섣불리 까불면 광박에 피박까지 쓴다고. 죽일 패하고 살 패는 꼭 같이 가지고 있어라. 그중 너도 살고 남도 사는 패가 가장 좋은 패다. 혼자 살아남아봐야 아무 소용 없어. 판은 절대 사라지지 않아. 노는 놈들이 바뀌는 거지. 패거리로 다니는 놈들과는 패 섞지 마라. 비고도리밖에 안된다. 내내 버리다 어쩌다 한번 쓰고 또 버려. 멍청한 것들이나 한번 써먹고 잔돈푼 쥐여주면 좋다고 하지. 피를 나눈 형제하고도 한패가 못되는 세상이다. 패거리일수록 지 실속만 챙기는 놈이 더 많아. 영재가 그랬던 것처럼 어린 나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다.

116p.
나는 직장 선배 송부장의 연애사를 하나 알고 있다. 그녀는 다른 회사 편집자와 일년쯤 교제하다가 헤어졌다. 
"저나 나나 곧 사십인데 딱히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하기에는 내 나이가 많은 것 같고, 그럼 뭐라도 내세울 게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으니, 이게 내 신경을 슬슬 건들면서 간을 보는 거야. 그래서 바로 헤어졌잖아. 그제야 다 관심이 있어서 괴롭힌 거라고 매달리는데, 웃기지도 않아. 여자들은 그럴수록 더 싫어해. 사랑은 잘 놀고 있는 고무줄 끊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무거운 쓰레기통을 살짝 들어주는 거거든.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헷갈리게 굴지 않는다고. 고무줄 끊는 건 진짜 나쁜 놈도 하잖아. 사랑은 앞뒤 잴 것 없이 명확한 거야."

121p.
그사이 진행 중이던 도하의 소설 '졸지에 빠른 형'이 출간됐다. 고등학교 남학생 둘이 자위행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무래도 삼분 안에 끝내기 힘들다는 한 녀석의 말에, 옆의 녀석은 육십초 만에 끊을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린다. 마침 동네 형이 나타나자 한 녀석이 묻는다. 형은 몇초 만에 끊을 수 있어? 동네 형은 백 미터 달리기를 말하나 싶어 십육초라고 말한다. 그 바람에 졸지에 빠른 형이 되고 마는 것이다.

133p.
영재는 누구와 함께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행이라는 게 여기 가려다가도 저기로 갈 수 있고 그냥 숙소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함께 움직이면 그것이 어렵다. 정해진 코스 때문에 가고 싶지 않은 장소까지 가야 하는 피곤함이라니. 일행 중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여행은 이제 고행이다. 그런 이유로 영재는 혼자 다니는 게 낫다고 했다. 한적하고 고요한 파묵칼레는 문득문득 가만히 앉아 있기 좋아하는 영재에게 매우 적합한 곳이지 싶다. 

147p.
"마음에 있는 여자한테 처음 고백하실 때 뭐라고 하셨어요?"
"너 단편 하나 쓰자."
"대상이 너무 포괄적이잖아요. 보통 때는 뭐라고 청탁하시는데요?"
"단편 원고 하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하고 정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164p.
깔깔 웃던 영재가 계단을 내려가는 나를 서둘러 부른다. 왜?
"파이팅."
그러면서 주먹 쥐듯 살짝 오므린 손가락을 살살 비빈다. 붙어 앉아 이야기하며 내 고환을 가지고 놀 때 하는, 나만 아는 동작이다. 몸무게 몇이에요? 칠십이 킬로, 칠이…… 왜? 문 비밀번호 바꾸려고요. 선배님 앞 나 뒤. 넌 몇인데? 비밀이라는 말 모르세요? 하하하, 아퍼. 미안, 미안. 만지지 마요? 아니. 나 바쁠 때는 직접 열고 들어오세요. 나도 내 집 대문 열쇠를 영재와 같이 무게 있는 번호로 바꾸었다. 언제든지 와. 이야기 중 내게서 불쑥 아! 낮은 탄성이 튀어나오면 영재가 입을 맞춰준다. 그것은 상상이나 환상처럼 저 먼 감각이 아니다. 영재의 손안에서 노는 생생하고 실제적인 내 고환과 성기의 감각이다. 그리고 내 손이 기억하는 영재의 부드럽고 촉촉한 사타구니. 여자들은 자기 몸무게는 일이 킬로 줄여 말하고, 다른 여자는 일이 킬로 늘려 말한다는데, 맞나? 남자들은 자기 건 일이 쎈티 크게 말하고, 다른 남자 건 일이 쎈티 작게 말한다는데, 맞아요? 그게 그런 거였군. 그런데 전에 싸우나에서 보니까 시 쓰는 도욱이 물건은 정말 대단하더라. 진짜요? 잠깐, 거기! 하고 잠시 눈 감고 낮은 숨소리를 내는 영재에게, 나도 입을 맞춰준다. 너, 누구거 상상한 거니? 뭐요? 영재야. 네. 하자. 녀석이 단단하게 몸을 키웠다. 도하의 상상 팔할에 영재가 막강한 실제 이할을 보탰다. 너희는 진짜…… 나는 싸인회 내내 테이블보를 무릎담요처럼 덮고 있어야 했다.

178p.
"좀 괜찮니?"
"보면 몰라요? 안 괜찮아요."
서둘러 식탁에 도시락을 펼쳤다.
"오늘 성게알이 좋다고 해서 넉넉하게 해달라고 햇어. 너 성게알 좋아하잖아. 근데 우럭이 없더라. 그래서 광어를 우럭처럼 썰어달라고 했어. 달걀은 이 정도면 되지?"
영재가 내게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왜? 아. 영재가 입을 벌렸다.
"뭐로 줄까?"
"혀."
아! 젓가락을 내려놓고 영재의 입에 혀를 넣어준다. 처음 그날처럼 떨리고 달콤한데, 마음이 아프다.

181p.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손이 나가지 않는다. 차마 때릴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다 싶으면 그저 보내줄 뿐이다. 끝난 사랑 싫은 사랑은 반드시 몸으로 드러난다. 눈이 보기 싫어하고, 귀가 듣기 싫어하며, 심장이 숨쉬기를 거부한다.

183p.
영재가 칩대에 눕는다. 나도 누워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정수현, 이리 와봐."
나는 영재 옆에 누워 팔베개를 해준다. 영재가 그날처럼 내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두르고 폭 안겼다. 예쁘면 다야? 그렇게 영재는 잠결처럼 꿈결처럼 말하고 깊이 잠들었다.

193p.
사랑하면 그 사람의 전부를 안아야 한다는 말 또한 영재를 억압햇다. 사랑, 그게 뭔데 자신과 상관없이 벌어진 일까지 모두 떠안아야 하는가. 그것이 그렇게 쉬운 거면 십자가 진 예수가 빽빽하게 재림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 과연 합리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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