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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야만성
게시물ID : phil_97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향유
추천 : 2
조회수 : 62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19 02:26:12



현대인은 야만적이다.

현대인의 야만성은 문명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이전의 시대, 호모사피엔스가 불을 발견하기 전, 호모에렉투스와 생존 경쟁을 벌이던 때와 비교했을 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 사회 때는 약간 나았을 지 모르지만.


현대인의 이성은 도구적이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일찍이 이를 날카롭게 통찰하고 예리한 비평을 쓴 적 있다. 중세 사회에서 이성의 최종 소유자가 '신logos'이었기에, 신의 관점에서 합리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고, 인간의 손톱만한 이성은 그것과 통하는 유일한 연결 수단이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이성의 주인은 현대인이다. 신logos이 사라진 현대에, 현대인의 이성은 그 소유주의 자기보존을 위해서 강력하게 기능하는 하나의 계산기, 하나의 도구로 추락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난 대학생 이학점 씨는 이렇게 고민한다.

"더 자고 싶은데 9시 수업에 들어가기 싫은데 어떡하면 좋지?"

그는 30분 더 고민한 다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대리출석을 부탁한다. 그의 수면욕은 충족되었고 출석점수도 챙겼다. '대리출석'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은 그의 이성이다.

놀랍게도 도덕적 판단을 하는 과정에서조차 이성은 여전히 '도구적'이다. 예를 들어, 매춘을 합법화 해야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고 치자. 당신은 매춘 합법화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런데,

1. 매춘이 합법화되면 여자처자해서 내 배우자가 그런 일 하던 사람이 될 수도 있잖아? 찝찝한데, 불법! -> 배우자를 맞게 되는 미래의 자신을 안전하게 보존하는 사고를 했다.

2. 피임이 이렇게 발달한 세상에서 과연 성을 파는 것은 노동력을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지? 성교가 문제가 되는 거라면 돈을 받고 손으로 성욕을 풀어주는 것은 괜찮단 말인가, 노동력을 파는 것과 구별되는 성적 가치가 발생하는 지점은 어디서부터인가, 그런 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적 가치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매춘은 직업 선택의 자유에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을 억압하는 것은 과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성매매 특별법을 시행했지만 그 후 지금까지 과연 성매매는 얼마나 근절되었는가, 공창제를 시행하는 국가들은 우리 나라와 비교해서 질서나 치안이 크게 어지러운가, 그렇지 않다면 매춘을 불법화하는 것은 단순히 직업 선택의 자유만을 침해하고 있을 뿐인가... 매춘 합법화 찬성! -> 치열하게 고민한 이성의 소유주는 현재 '성의 가치'에 대한 혼란이 해소되었다. 이로 인해 불안정했던 내면이 안정을 되찾았으므로 그는 자기 보존을 하는 사고를 한 셈이다.


야만성을 얘기하려다 도구적 이성으로 이야기가 많이 샜다. 하고 싶은 말은 '도구적 이성'이 야만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서론부에서 얘기했던 원시인이 자신을 둘러싼 전 세계를 자기 보존을 위한 하나의 거대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원시인의 야망은 자연물에 한하는 것이었지만 현대인의 도구적 이성은 그로부터 말미암아 만들어진 수많은 인위적인 것들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타인, 주가, 부동산, 투기, 테러, 인질극, 시위, 언론, 그 무엇이든 한 개인의 막강한 이성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세계를 도구로 만든 도구적인 이성은 심지어 그가 유일하게 충실하게 봉사해야 할 대상인 그 소유주조차 도구로 만들어버린다.

"쉬고 싶겠지만 연말에 가족들하고 필리핀에 가려면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즐거워하는 아이들 웃음 보는 게 지금 노는 것보다 더 행복할 거다. 물론 매우 피곤하긴 하겠지. 팔다리가 저리고, 어제는 잠을 잘못 자서 어깨가 결린 탓에 목이 30도 이상 돌아가지 않지만 그래도 참고 일해야 한다. 아, 그리고 오늘 결혼 10주년이라서 일찍 퇴근해야 하는데 점심 먹을 시간을 아껴서 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한 끼 정도 제껴도 괜찮겠지,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면 되지 뭐."

->지치고 배고픈 몸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하나의 도구처럼 쉬지 않고 먹지 않고 일한다.



위 내용들은 내 아이디어는 아니고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도구적이성비판'에서 쓴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이제 이것을 인간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야만성과 연결지어보려고 한다.


도구적 이성은 중세 사회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강력해졌기 때문에, 그 출처는 마치 데카르트일 것 같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천명하는 순간 신logos는 사망했고, 데카르트는 신이 가지고 있던 이성을 빼앗아서 전 인류에게 무료 나눔해버렸다.

그러나 사실 도구적 이성의 출처는 데카르트가 아니다. 호르크하이머도 "도구적 이성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 그것이 현대로 오면서 전면화 했을 뿐이다."라고 진단하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도구적 이성의 출처는 생물학적으로 이성 같은 지능을 소유할 만큼 발달한 homo속의 한 생물(인간의 가까운 조상)이지만, 도구화의 욕망은 그보다도 훨씬 더 먼 곳에 출처를 두고 있다.

막스호르크하이머는 이성과 도구화의 욕망을 딱히 구별하지 않고 있지만, 그 둘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이성은 도구화의 욕망을 출실히 수행하는 도구일 뿐이다. 나는 이 도구화의 욕망을 야만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유는 첫째로 그것에 그 어떤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나 잣대가 끼어들 가능성이 없어 보이며, 둘째로 그것이 반드시 소유주를 둘러싼 세계에서 무언가를 약탈하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래에서부터는 그것을 야만성이라 부를 것이다.

아까 야만성의 출처는 진화의 트리에서 인간 이전인 어떤 생물이었다고 얘기했다. 그럼 인간 이전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놀랍게도 그것은 수십억 년 전의 세포까지 올라간다. 믿어지는가? 파충류 어류 이런 수준이 아니라 세포 단위의 얘기까지 가야한다. 그것도 현대의 생물들을 구성하는 세포처럼 발달한 세포가 아니라 원시 세포 중의 가장 원시적인 세포다. 세포라 부르기도 민망한 이 생물은 생명의 기원의 유력한 후보다. 만약 그것이 진짜 생명의 기원이라면 우리의 야만성은 우리가 생물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야만성은 '먹는 행위'로부터 초래된다. 먹는 행위는 '피식자가 만들어놓은 모든 근육과 전분과 지방과 물과, 심지어 피식자가 먹어서 소화하던 중이었던 피식자의 피식자와 그것을 소화하던 소화 장기와 그 속의 소화 효소'까지를 몽땅 약탈한다. 약탈된 이 양분들은 포식자의 몸으로 흡수되어 그를 구성하는 조직이 된다. 타자를 내 일부로 만드는 이 행위는 마치 자연과의 합일에 대한 욕망의 발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정확한 진단은 나의 자기 보존을 위한 타자의 도구화라는 것이다.

이 먹는 행위를 위에서 얘기한 초고대 원시 세포가 했기 때문에 우리의 야만성의 출처는 그가 된다. 물론 그의 경우엔 복잡한 유기물을 분해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맨틀에서 분출되는 환원상태의 지하수로부터 전자를 약탈하는 것 정도였다. 그 원시 세포는 철-황으로 둘러싸인 막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 안팎의 pH차이와 그 막에 있는 철-황 결정의 전자 전달능력 이용해서 지하수로부터 고에너지 전자를 빼앗아가며 생존했다. 어려우면 넘어가도 좋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얘기다. 중요한 것은 그 원시 세포가 자신의 막(여기까지가 세포의 세계이고 막 밖은 외부 세계다) 바깥에 있던 지하수로부터, 에너지를 빼앗아와서 그것으로 생존했다는 거다. 이것은 식행위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명백한 약탈 행위의 일종이다. 아마도 당신은 "그럼 먹는 거 말고, 광합성을 해서 에너지를 생산한다면? 식물들은 야만성으로부터 자유로운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답은 아니오다. 식물은 햇빛과 이산화탄소와 질소와 물을 세계로부터 약탈한다. 이 설명이 비약처럼 보이는가? 이게 비약이면 원시 세포의 전자 약탈도 비약이 될 거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 이유는, 그들이 열역학 제 2법칙을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역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글은 기피 대상 1순위가 된다고 하는데, 그런 위험을 내가 무릅쓰는 이유는 그만큼 이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열역학 제 2법칙을 쉽게 말하면, 자연계에서 '무질서도'는 반드시 증가하거나 일정하다는 것이다. 자, 이제 지구에 조사되는 태양빛과 그것을 바라보는 탐욕스런 토마토를 살펴보자. 열역학 제 2법칙 때문에 자연계는 반드시 햇빛을 우주 골고루 보내고 싶다. 그 경우에만 무질서도가 가장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 빛이 밀집되어있는 상황을 자연은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마토는 그 햇빛을 게걸스럽게 삼켜 흡수한다. 심지어 해바라기는 심지어 그 태양을 향해 머리를 굴려 쫓아가면서 햇빛을 삼킨다.

물은 어떤가. 물 역시 열역학 제 2법칙을 충족하기 위해 세계 곳곳으로 골고루 퍼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토마토는 지하수를 줄기로 빨아들인다. 전자 역시 마찬가지다. 지하수와 함께 방출된 전자는 바다 곳곳으로 골고루 퍼져나가고 싶다. 그러나 철-황 원시세포는 전자를 집어삼킨다.

물론 토마토는 광합성을 하면서 동시에 산소를 방출하여 외부세계의 무질서도를 증가시키므로, 토마토와 토마토를 둘러싼 세계 전체의 무질서도 총합은 여전히 증가한다. 열역학 제 2법칙이 그리 만만한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토마토가 외부 세계와 자신을 분리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무언가를 외부로부터 빼앗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역시 산소를 내뱉고 있지만, 그 이유는 산소를 과다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토마토 역시 세포호흡을 하는데 산소가 필요하므로 광합성으로 만들어내는 산소가 가지고 있는 산소보다 적다면, 오히려 외부로부터 산소를 흡수한다. 필요 없을 땐 버리고, 필요할 때는 쏙쏙 빼앗는 토마토의 모습이 이기적이게 보이지 않는가. 그가 자연계와 하는 거래는 자연계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불공정 거래고, 외부 세계로부터 필요한 무언가를 취해서 나의 자기 보존에 쓰겠다는 그의 욕망은 도구적이고 야만적이다.

토마토 얘기가 길어졌는데, 어쨌든 결론은 나도 당신도 토마토도 그 공통 조상인 철-황 원시 세포로부터 야만성을 물려받았다는 거다. 우리 모두 그의 자손이고 먹어야만 하는 운명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철게에 영혼이 무엇인가, 인간은 자연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등에 대한 의문들이 좀 있는 것 같더군요.. 좀 더 근원적인 세계(위의 예시에서는 철-황 원시 세포)를 탐구해보면 어느 정도 그 답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게 묻는다면 영혼은 뭐 모르겠고, 자연과 구별되는 방법은, 고유한 공간과 시스템 창설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가장 원시적인 욕구는 세계와 분리되고 싶은 욕구이고, 그것에 성공함으로써(막을 만들어냄으로써) 외부 세계에 대한 일방적인 약탈이 가능해져 호모사피엔스처럼 경이로운 현상까지 진화시킬 수 있었다고 답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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