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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와 남존여비의 시작
게시물ID : history_184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도바킴
추천 : 0
조회수 : 119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10/17 11:25:57
1. 조선초기 남녀차별의 법제화
남녀차별을 처음 법제화 한것은 태종이 여성의 상속권을 제한한것이 시작이었고
얼마후 성종은 여성을 명실상부한 2등국민으로 끌어내렸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이 그렇다는 것이고
여성개인의 행복추구에 애로사항이 꽃피기는 했지만, 삶이 비참해졌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2. 세도정치의 시작
이러던것이 19세기가 되면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란것이 시작되고
한양의 모든 관직을 김xx들이 독차지하면서
전국의 모든 양반가문들은 강제귀농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중앙권력에서 잠시 밀려나도, 곧 다시 복귀할 수 있었고
또 그간 해먹은게 많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는데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3. 향촌사회에서의 무한경쟁
양반가문이 양반으로 존속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명예입니다.
양반이란 용어는 관료를 뜻하고, 관료를 배출하지 못하는 가문은 양반이 아니라고 할수 있습니다.
김XX들이 해먹고 남은 몇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난이도는 이 조건을 더 극적으로 만들어줬습니다.
가문의 장남은 어릴때부터 고액과외를 붙여 과거머신으로 교육시켰으며
장남이 노답이다 싶으면 방계 몇촌을 뒤져서라도 똘똘한 놈을 찾아 장남으로 삼았습니다.(기존의 장남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

두번째조건은 경제력인데, 권력의 중심에서 따라오던 부를 잃어버린 양반가문들은
자연히 토지관리를 통한 수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양반이 천한 상공업에 뛰어들순 없는노릇이니까요.)
때문에 직계방계후손들을 통해 느슨하게 관리되던 토지들도 장남명의로 일원화해버립니다.
소위 장남위주의 문화라는것이 이때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세번째 조건은 향촌에서의 권력입니다.
양반들은 토지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지방수령과 모의하거나 고리대를 통해 자영농의 토지를 빼앗거나 하는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런 짓을 벌이려면 일종의 지자체라고 할수 있는 향약소에서의 영향력이 중요했는데요.
이 알량한 지방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졸렬한 짓들을 벌였습니다.

향촌사회에서의 경쟁에서 탈락한 가문들은 모든것을 빼앗기고 양인이나 천민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됩니다.
양반들에게 이것은 가문의 존망을 건 전쟁이었습니다.

4. 가문 총동원체제
이때의 양반가문들은 총동원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가문의 구성원들은 너나할것없이 개인의 행복이나 개성을 포기하고, 오직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이용되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은 바로바로 교체되었습니다.

태종과 성종이 만들어놓은 악법들은 이때야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는데
여성의 권리는 합법적으로 무시되었고, 반항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며느리들은 낮에는 훌륭한 무임금 노동력으로 사용되고 종국에는 열녀로 생을 마감하거나 했습니다.

5. 결론
세도정치 이전까지 하더라도 장남과 차남, 남자와 여자의 차이란것이 없거나 크지않았습니다.
찢어죽일 김XX들의 농간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한국 특유의 여러가지 병신같은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모든것은 세도정치의 탓입니다.

6. 반론??
19세기는 전세계에 걸쳐 모두가 모두에 대해 투쟁하던 시대였습니다.
총동원문화는 보편적현상이었고 오히려 서양의 상황은 오히려 더 심해서, 서양에서 여권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지금 서양에서서 여권이 높아진 것은 최근의 여권운동의 영향의 덕분이라고 보는것이 옳다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세도정치고 나발이고 19세기의 여성들은 다같이 비참해질 운명이었다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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