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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대통령 - 대통령 못해먹겠다.
게시물ID : sisa_55772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of
추천 : 1
조회수 : 335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4/10/22 11:48:50

제목 내용처럼


그당시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라는 발언을 자주 하셨다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검색해도 찾기 어렵네요.


전반적인 배경부터 이유까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상도 출신이신 장인어른이 항상 새누리쪽 뽑으시는데 얼마전 대선은 투표 안하셨다고 (해야 하는데 차마 못하신듯)


그전 대통령은(mb) 뽑았지만 후회한다고 하시고


고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못해먹겠다 이 발언이 할 수 있는 말이냐면서 저희 부부에게 가끔 말씀하십니다.


반박을 하고 싶은데 제가 배경을 모르니 말을 못하겠네요. 추가로 탄핵 당했던 이유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시사/질문 올려도 되는거 맞죠?  - (수정) 지식인 게시판이 있었네요.. 옮겨주시면 감사합니다.


ps.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제16대 대통령이다.[1]

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대전지법 판사로 1년 재직하다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기도 했다.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해 1988년 부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90년 김영삼3당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았다.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서 2002년 대선에서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2003년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고 2004년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대한민국 헌법 위반을 이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이후 국회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정당들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패배하였고, 얼마 후에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면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으며 임기 내내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활황을 보였는데, 이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2013년 기준)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다만 같은 시기 비슷한 처지의 싱가포르와 대만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6.6%, 4.6%로 세계 경제가 호황을 누릴 때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았다.[2][3] 또한 부동산 투기 근절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IMF사태 이후 악화된 소득분배가 노무현 정권 하에서도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는 점은 민심이반을 초래했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으로의 교체 원인이 되었다.[2]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보수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재벌 총수들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재벌개혁 중 하나인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시행, 재벌기업들 사이의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도 강화한 것 등이다. 대통령이 자기 진영의 불법대선자금을 앞장서 밝힘으로써 정경유착을 상당히 완화한 것도 높게 평가받는다.[2]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응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합법화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검토하였고, 행정수도 이전을 계획하였으나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에 따라 행정도시인 세종특별자치시 건설로 선회하였다. 이 외에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해서 평가가 엇갈린다. 2007년 10월 4일 김정일 방문시 NLL에 관한 발언 또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2012년 대선에서 보수 언론의 많은 공격을 받았다.[4]

임기 내내 조선일보 등의 보수언론들과 관계가 안좋았는데, 이것은 업적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지지율이 하락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5] 보수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많은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좌파 진영으로부터는 오히려 노무현 정권의 정책이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6]

퇴임 이후에는 고향인 경남 김해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도 금전을 수수했다는 의혹으로 인하여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당시 검찰은 포괄적 뇌물 공범죄를 주장하였다.)[7]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사후 1주간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그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8]        http://ko.wikipedia.org/wiki/%EB%85%B8%EB%AC%B4%ED%98%84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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