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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 이야기 몇가지(90년대 초중반)
게시물ID : baseball_865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애비28호
추천 : 10
조회수 : 1493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4/11/04 19:07:08
김성근 감독 이야기 몇가지(원년~89년)  ☜ 못 보신분 클릭
 
1990년 김성근 감독의 태평양돌핀스 2년차 감독 생활
1월 초순 태평양은 김감독의 주도하에 2박3일 간의 훈련을 떠남.
고참, 신참, 코치, 김감독 포함 전 선수단과 코치진이 함께 하는 훈련인데 장소는 괌이나 오키나와가 아니라
하물며 제주도도 아닌 오대산 월정사 계곡.
야간에 영하 15~20도 까지 떨어지고 눈도 1미터 이상 쌓여 있다고 함.
여기서 맨발로 눈길 구보를 시작으로 여러가지 실외 훈련과 참선, 명상등의 정신 훈련 등을 함.
이 훈련의 백미는 무려 10여센티 두께로 얼어 있는 계곡의 얼음을 깨고 하루 두차례 주간, 야간으로 알몸 입수를 함.
물론 얼음물에 들어가는 순서는 김감독 > 코치 > 선수.
언론에서 이 미친듯한 얼음물 알몸 입수를 '돌고래쇼'라고 칭함.
당시 현역으로 극기 훈련에 참가했던 선수의 최근 회고 인터뷰에 "말도 안되는 훈련이었다."라고 평가함.
당시 이종도코치가 1분 20초 정도로 가장 오래 알몸 입수를 견뎌냈다고 함. 일반 선수는 30초 정도...
 
임호균 각서 파동
1989년 시즌 3위로 마감하였으나 1990년 시즌은 이렇다할 전력보강이 되지 않고 선수들과 구단의 자잘한 문제 등으로 인해
시즌 5위로 마감함. 당시 타구단의 엄청난 선수 확충에 따른 성과에 비하면 5위라는 성적은 그마나 선방 했다는 평가였음.
그러나 90년 시즌이 끝난 10월. 계약 기간이 아직 1년이 남은 김감독을 구단측에서 해임함.
표면적인 이유는 성적부진이지만 90년 시즌초 퇴물이 되어버린 투수 임호균을 방출하려 하는 구단에 맞써 김감독은 임호균이
5승 이상 못하면 자신이 물러 나겠다는 다소 억지스런 각서를 썼다고 함.(구단이 쓰라고 한건지 자발적인건지는 알수 없음)
물론 임호균은 시즌 7게임 등판 승수 없이 방어율 4.6의 성적을 올리고 김감독은 약속되로 사임했다고 함.
김감독이 임호균을 감싼 이유는 선수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걸고 선수를 끝까지 보호 했다고 전해짐.
구단과 사사건건 트러블이 있던 김감독을 해임하기에는 좋은 명분이었음.
 
1990년 태평양에서 물러난 김감독은 곧바로 삼성에 감독으로 취임함.
김감독의 이때까지의 행보를 보면 삼성 시절이 가장 김감독 답지 못한 감독으로 지낸듯.
더 길게 쓰자면 삼성팬들 콜로세움 열릴듯해서...
최근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에서 김감독의 인터뷰 중 삼성라이온즈에 대한 평가 한마디만 옮겨 적어봄.
"감독을 감독답게 생각 안하는 팀이 그 팀이었어요..."
결국 김감독은 91년 시즌 3위, 92년 시즌 4위로 마감하고 한국시리즈 한번 먹겠다고 난리치던 삼성에서 쓸쓸히 물러남.
 
92년 후반기 삼성 감독자리에서 물러난 김감독.
이후 여러 구단의 감독 자리의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93년 한 해는 이렇다할 활동이 없었고
1994년 4월 한국야구위원회 규칙위원과 야구 해설 등으로 다시 활동 하기 시작함.
이후 94년 5월 말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 코치(인스트럭트)로 채용되어 다시 지도자 생활을 함.
그리고 95년에는 해태의 2군 감독으로 임명됨.

임창용과 김감독
94년 말 진흥고 출신인 임창용이 해태에 입단함.
당시 프로에 적응하지 못한 임창용은 불성실한 훈련 태도 등으로 김감독 눈에 찍힘.
결국 팀에서 쫓겨난 임창용은 당일로 다시 김감독을 찾아가서 3시간 동안 감독실 앞에서 기다렸다고 함.
3시간뒤 김감독은 감독실 문을 열어 임창용을 맞이하고 임창용의 손에 사탕 하나를 쥐어 주며
"딱 1년만 참고 나랑 야구 한번 하자"
이후 95년 김감독에게 혹독하게 조련과 정신 개조를 당한 임창용은 통산 방어율 3.33 109승 70패 199세이브 등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두말하면 잔소리의 역대급 투수로 성공함. 김감독이 없었다면
야쿠르트의 수호신, 창용불패라는 단어도 없었을꺼임.

광주 빠삐용 이호준
93년 말 광주일고 졸업예정으로 해태에 입단한 이호준
지금은 SK에서 노련한 배테랑 선수로 팀의 정신적인 지주 역활을 하지만 처음 프로에 입단 할 당시는 상당히 문제아였음.
본인은 타자를 원했지만 구단에서는 투수로 키울 예정이었던 모양.
이호준은 94년 8경기 12.1이닝 10.20의 방어율의 성적으로 2군으로 내려감.
이후 94년 말부터 새로 입단한 임창용과 함께 연습장 보다는 나이트에서 더 자주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야구가 하기 싫어졌다고 함.
하도 연습 안하고 도망만 다니기 때문에 빠삐용이랑 별명이 생긴듯.
이때 해태 2군 감독이 누구인가? 바로 김성근 감독 아닌가?
김감독이 자질이 있는 이호준을 당시 2군 코치였던 김일권씨와 협의해서 이호준을 제대로 된 야구 선수를 만들기 시작함.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이호준의 인터뷰에서는 "맞아 죽을까봐 무서워서 야구를 했다."고 전함.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현재까지 통산 .280의 타율을 기록중임.
2009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성근 감독에 대한 이호준의 한마디.
김감독을 만나 "“야구를 길게 하려는 마음"을 배웠다고 전함.
 
김감독과 하일성
아마도 80년대 이전, 그러니까 70년도 시절인듯.
당시 김감독은 여러 아마추어 야구단 감독 생활을 하다가 중간중간 사임이나 해임 되어 쉬는 시간에 라디오 야구 해설도 하신듯.
그런데 감감독은 출신이 재일교포인지라 중계방송 중에 간혹 일본말을 무의식적으로 사용 하셨다고 함.
'이빠이', '쇼부' 등 이런 단어를 사용하다가 방송을 듣던 시청자들에게 항의를 많이 받아 중계방송 해설 자리에서도 쫓겨 나심.
당시 고등학교 체육교사였던 하일성 위원이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급하게 김감독이 그만두고 공석이된 해설자리를 이어 받으셨다고 함. 후일담으로 하일성 위원이 말하길 그때 김감독이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도 학교 선생으로 정년퇴임 했을꺼라고 하심.
 
90년 대 초반 음성정보 서비스가 한동안 유행하던 시절.
90년 초반부터 허구연 해설위원이 프로야구 음성정보 안내 서비스를 가장 먼저 시작했고 뒤이어 하일성씨도 이 사업에 뛰어 들었음.
후발주자인 하일성씨는 허구연씨와 경쟁하기 위해 친하게 지내던 김성근 감독도 영입하여 서비스의 질적 수준 향상을 노렸다고 함.
다만 이후 급속하게 보급되던 컴퓨터와 인터넷 때문에 음성정보 서비스는 망하게 됨.

95년 10월 김감독은 하위권을 맴돌던 쌍방울 감독에 취임함.
당시 쌍방울은 91년부터 95년까지 7,8,7,8,8위를 하던 최하위 약체팀이었음.
김감독 취임 후 코치로는 이종도, 이광길, 이홍범, 계형철, 김준환 등을 임명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삼는다.
당시 김감독이 파악한 쌍방울의 문제점은 '1점 승부에서 지키는 야구를 못한다'는 진단.
95년 시즌 1점차 패배가 21번, 38번의 역전패의 기록이 김감독의 이야기를 뒷바침 함.
쌍방울은 당연히 늘 그렇듯 95년 말 부터 지옥 훈련에 돌입함.

96시즌 관리야구 VS 자율야구
96년 시즌이 임박한 시점.
당시 언론에서 각 구단의 감독들에 대한 야구 스타일의 분석 한토막.
LG(이광환), OB(김인식), 롯데(김용희) - 자율야구, 스스로에 대한 책임 강조
삼성(백인천), 쌍방울(김성근) - 관리야구, 스파르타식
해태(김응룡), 한화(강병철), 현대(김재박) - 절충 스타일
96년 시즌 최종 성적은,
1위 해태를 선두로 현대, 쌍방울, 한화, 롯데, 삼성, LG, OB 순서임.
관리야구든 자율야구든 감독 스타일도 중요하지만 그게 팀 분위기와 맞아야 성적이 나오는듯 함.

김성근 감독의 야구에 대한 원칙 중 하나.
"버려도 되는 선수는 없다."
 
 
(출처-본인 블로그. 출전-한국 야구위원회 공식 홈페이지, 당시 신문기사, 본인 기억?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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