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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엔 소주와 컵라면
게시물ID : cook_1240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ㅂㅎ한
추천 : 21
조회수 : 118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11/13 11:11:35

저녁 7시를 조금 넘겼을까? 은행일을 보고 돌아오던 중, 바람이 참 매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춥다니, 입동을 넘긴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조만간 첫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던 중, 첫눈 한 송이가 콧등에 얹혀졌습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니, 눈송이라고 부르기도 부끄럽지만 눈임에 분명한 싸라기눈들이 내려오는게 보였습니다. '첫눈을 생각하자마자 곧장 첫눈을 만나다니, 올 겨울은 퍽 낭만적으로 찾아왔구나'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에 친구들에게 첫눈 소식을 알리고, 다시 고시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달빛도 고운데, 싸라기눈이나마 첫눈까지 내리는 저녁이라 퍽 여운이 남을 저녁이라는 생각에 즐거운 맘으로 고시원 문을 마주했을 때, 갑자기 욕지거리와 고함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하는 복도 끝 방 아저씨가 또 술을 자시고 행패를 부리는구나 싶었습니다. 


아무리 고운 눈이라고 해도 체온에 닿으면 녹아 없어지는 것마냥, 첫눈의 여운도 욕지거리에 닿자마자 증발해버리고 어느새 짜증과 불쾌감이 흐뭇함의 자리를 빼앗아 앉았습니다. 흐뭇한 저녁시간을 불쾌한 사람의 주사로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짜증이 더 치밀어 올랐습니다. 어서 방에 들어가 이불 속에서 밀린 웹툰들이나 보려고 신발도 대강 팽개친 채 고시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내가 일을 잘하는데, 내일부터 나오지 말래 나 일 잘하는데 오지 말래"


방에 들어가기 직전, 그 아저씨의 고함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아마도 매일 나가던 인력사무소에서 내일부터 나오지 않으셔도 된다는 소리를 듣고 오신 모양입니다. 하기야 날씨가 추워져 일거리가 크게 줄어들었을테니 그럴법도 합니다. 겨울이면 항시 있던 일입니다. 문득 지난 주말에 그 아저씨가 고시원 원장님께 방세를 이번주까지 드리겠노라고 사정했던 일이 기억났습니다.


"오지 말래, 나 일 잘하는데 오지 말래, 일이 없다고 오지 말래"


그 아저씨는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같은 말을 계속 고함칩니다. 60 가까운 나이에 집도 가족도 없이 홀로 사는 노인의 목소리가 저런 말을 읊으니 새삼 더 기분이 착잡합니다. 누군가로부터 필요없는 사람 취급받았던게 퍽 상심이 크셨던뿐더러, 당장 내일 생계도 문제일 겁니다.


벌어둔 돈도 조금 있고, 만날 친구들도 많고, 도움을 구할 가족들도 있는 저에겐 어제 저녁 첫눈은 낭만적인 소식이었지만, 제 고시원 이웃들에게는 가혹한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비보였던 모양입니다. 지난 겨울에 그러했듯, 이번 겨울도 점점 고시원 월세가 밀리는 사람들이 생길테고, 어느날 갑자기 고시원에서 보이지 않게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고시원 조리실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는 점점 희미해지고, 소주 페트병과 컵라면 용기만 늘어나기 시작할 겁니다. 힘도 돈도 친구도 가족도 없는 사람들이 고시원 복도에서 술취한 채, 흩날리는 먼저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목소리는 더욱 많아질 겁니다.


아침 반찬을 만들러 조리실에 들렀습니다. 비워진 소주 페트병과 600원짜리 컵라면 용기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힘겨운 겨울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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