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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국인의 파륜궁에대한 회상
게시물ID : sisa_5673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거긴앙돼형아
추천 : 0
조회수 : 76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24 22:52:59
나는 어수선한 베이징의 한 공원에 쓸쓸히 앙상하게 키만 큰 나무에 걸린 하얀색 종이 앞에 섰다. 사람들이 공고문을 보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중국어 실력이 부족해 내용을 어렵사리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거만한 중국 관리가 아니라면 누구든 공기에 가득 찬 불길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이 공원은 늘 사람들로 북적이면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지만, 그날은 썰렁했다.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던 소리와 웃음소리는 없었고 생기 넘치던 활력은 온데간데없었다.  매일 아침 나왔던 20~30명의 사람이 그날 아침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1999년 당시 그 정적이 나를 얼마나 압도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나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만약 근처에서 새들이 지저귀고 자전거 페달이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해도 그때 나는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다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무엇이 이토록 공원의 분위기를 갑자기 180도로 바꿔놓았는지?  사실 공원의 적막은 비정상적이 었고 이는 절제한 표현이다. 보통 매일 아침 공원은 거대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공원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단체로 명상하고 연공하기 위해 모이는 장소였다. .  하루 7000만 명 이상  1999년 7월, 공원은 내가 한때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했던 칭화대학교 캠퍼스 근처에 있었다. 학생, 교수, 학교 직원들이 매일 아침 파룬궁을 연마하기 위해 공원에 모였다. 남녀노소, 교수와 관리인 누구나 함께 모여 파룬궁을 수련했다. 이는 공동체 활동의 하나였다.  나는 오랫동안 중국인들의 체력 증진을 위한 문화 활동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교류하고 동기를 북돋는 문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고유한 전통 수련 문화다. 중국 전통 수련법인 파룬궁은 1980년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중국서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었던 수련법이다. 수백만 명에서 수억 명에 이르는 중국 시민은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신체 단련을 위해 인근 공원을 찾아 연공했다.  중국 문화 및 비교 종교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던 나는 파룬궁 수련으로 특별한 경험을 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아팠던 곳이 나았고,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가졌다.  많은 미국인은 이런 현상에 대해 1993년 기공에서 얻은 습득과 경험을 다룬 빌 모이어의 ‘치유와 마음(Healing and the Mind)’ 시리즈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극소수 사람들만이 수련의 규모, 범위, 열정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대학 4학년 때 중국서 온 수련자와 인류학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 중국의 기공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1999년 당시 기공의 모든 종류를 통틀어 가장 크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음에도 미국서 파룬궁에 대해 들어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보급된 지 단 7년 만에 7000만 명 이상의 수련자가 모였고 중국 내 대부분의 공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중국서 파룬궁은 미국의 요가나 필라테스와 거의 맞먹는 인지도를 가졌다.  하지만 1999년 1월 내가 여행 계획을 세우던 때까지도 파룬궁에 대해 다루는 문헌은 없었고 서구 언론도 단 한 줄의 내용도 다루지 않았다. 문화적 사각지대에 있었던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해 대학 캠퍼스에 들어서자 파룬궁에 대해 자연스럽고도 명백히 알게 됐다. 중국어 수업을 들으러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에는 어디나 수련자들이 연공을 하고 있었다. 파룬궁 수련자 1~3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과학자와 지식인, 파룬궁을 받아들이다  파룬궁은 대학 캠퍼스에 뿌리를 내리고, 중국의 과학계 엘리트의 마음에 스며들면서 중국 을 뒤덮었다. 1999년 여름 300명 이상의 칭화대 동아리 회원들에게 파룬궁은 생활의 일부였다. 그중에는 중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화학자, 대학원생들도 있었다.  그 시기 몇몇 비평가들이 파룬궁을 음해했던 것과는 달리, 파룬궁은 토속 미신이나 속임수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기공은 사실 고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통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 사회는 근대화와 어두운 과거사만을 강조했고 한때 기공도 전통을 잃고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신비와 사실 사이의 공간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더욱 고양된, 참된 것이 태동하기 전, 다리 역할을 했던 셈이다. 중국의 미래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시각은 달라진다.  마오쩌둥의 통치 아래 혁명적 운동이라는 명분으로 중국 전통 문화유산의 상당 부분이 파괴됐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은 일부가 전해졌다. 그렇게 살아남은 부분 중 하나가 기공 문화로, 다시 새롭게 생겨났다.






 파룬궁은 다른 기공에서 나타난 불신을 배제하고 중국 문화유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중국인들은 쉽게 파룬궁을 받아들였다. 파룬궁은 상당히 과학적이며 현대적 삶과 조화를 이룬다. 이런 이유로 중국의 MIT라 불리는 칭화대학교에도 파룬궁은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끌었다.  폭풍전야  내가 칭화대에 도착했던 때는 최고의 시기이자 최악의 시기였다. 좋았던 점은 파룬궁 수련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지역 파룬궁 수련자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고 곧바로 공원에서 함께 수련할 수 있었다. 저녁엔 파룬궁 수련서를 읽으며 파룬궁의 가르침에 대해 토론하는 팀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졸업생인 자오밍을 만났다. 우리는 북쪽 문 밖 자오밍의 작은 아파트에 모였다.  그 시기 사람들은 서로 격려하면 수련에 정진했고 파룬궁 수련에서 얻은 체험과 경험을 서로 나눌 수 있었다. 명상이 끝나면 언제나 공원에 함께 앉아 저린 다리를 풀며 대화를 나눴다.  나는 대학원생이던 황쿠이와 부교수로 일하던 준과 특히 친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불길한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던 나에게 도움의 손길과 미소를 보냈고 관용과 정직을 보여 주었다. 나는 파룬궁 수련에서 느꼈던 놀라울 정도의 신체적 변화와 감각뿐만 아니라 파룬궁의 가르침 안에 담긴 세계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너의 것이라면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도착하면 자전거를 자물쇠로 잠가뒀다. 이는 자전거를 훔치는 도둑에 대비하기 위해 도시의 관례적인 규칙이었다. 파룬궁 수련자 중 한 명이 나를 보고서 웃으며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 역시 함께 웃으며 다른 파룬궁 수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훔쳐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의 대답을 들은 파룬궁 수련자는 미소를 지으며, “아니, 그 누구든 훔쳐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정말로 너의 것이라면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만약 너의 것이 아니라면, 자전거를 한동안 가지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언젠간 잃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의 논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형이상학적인 작용에 대한 것이라는 것과 아마도 아직 습득하지 못한 파룬궁 수련 지침서의 내용에 근거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 그 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굳게 잠근 같은 반 학생의 자전거가 도난을 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깜빡 잊고 잠가 놓지 않은 나의 자전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신뢰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법칙을 살짝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었다. 






삶과 인과관계, 운명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겸허해졌다. 파룬궁 수련 친구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좀 더 높은 단계의 존재를 접했던 것일까?  더 많은 시간을 이들과 보낼수록 사람들이 왜 그렇게 파룬궁을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작스런 침묵  한 인간으로서, 한 학생에 불과한 내가 이런 경험을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당시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얼마나 좋지 않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베이징에 도착했던 날 바로 다음날, 바로 공산당의 50주년을 기념하여 중국 당국이 중국인들을 조직적으로 처형이 있었다.  아침 공원에 붙어 있던 공고가 바로 그 처형 소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후덥지근하고 불쾌한 공기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천안문 사건 이후 10년간 중국서 보지 못한 중국 당국의 정치 운동의 시작을 목격하게 되었다.  파룬궁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금지됐으며, 파룬궁의 수련하거나 파룬궁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불법으로 취급받았다. 비슷한 목적으로 자료를 배포하는 것 역시 불법이라는 내용의 공고였다. 계속 읽어나갔지만 더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1999년 7월 22일, 파룬궁이 공식적으로 불법으로 간주됐다. 하룻밤 사이에 친구들과 지인들의 삶이 불법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칭화대학교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들을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황쿠이와 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자오밍도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중국 당국의 대선전과 분서  파룬궁 금지에 대한 뉴스가 모든 곳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뉴스를 보도한 언론사는 모든 국영 매체로 무시무시할 정도로 똑같은 내용을 반복 또 반복했다. 객관성 있는 보도를 하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모두 파룬궁을 근절하려는 공식적 움직임의 일부였다.  파룬궁 지지자들을 비이성적이고 미신을 숭배하는 위험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훗날 공식 허가를 받은 폭력이 파룬궁 수련자들에게 자행되는 발판이 되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뒤 인민일보는 단독으로 파룬궁을 비난하는 347개의 기사를 쏟아냈다. 방송에서는 같은 내용의 대본을 가시돋힌 듯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앵커들이 가득했다. 파룬궁 수련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바로 이 점이 공산당이 노렸던 것이었다. 이는 파룬궁 수련자들을 침묵으로 몰아 그들을 부숴버리기 위한 첫 행보였던 것이다. 당국은 파룬궁의 입을 막아 파룬궁의 진실을 가리고 허구의 내용을 조작해 파룬궁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세심하게 조작된 가짜 파룬궁 내용이 담긴 문서가 곧 뒤따라 나왔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파룬궁  칭화대는 공산당의 파룬궁을 음해하는 주장에 대한 반증을 제출했기에 심한 출혈을 감당해야 했다.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와 과학자들은 파룬궁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애썼다.  당국은 총기로 무장한 군사력을 동원해 캠퍼스를 덮쳤고 이는 공산당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시사했다. 하지만 천안문 사건과는 달리 피바다가 되진 않았다. 파룬궁은 공산당에게 정치적이기보다는 도덕적인 위협이었다. 사람들은 파룬궁 수련을 통해 삶에서 공산당의 계획 경제에 의한 지배가 아닌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었다.  이는 공산당이 존속할 수 없도록 하는 잠재적인 위협을 의미했고, 경제적 성취가 새로운 정신세계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즉, 이는 공산당 고위층이 원하는 대로, 공산당이 지배하는 현대화와 정확히 맞물려 돌아가지 않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부지불식간에 건강과 행복을 향한 형이상학적 길을 따라 명상가들의 모임은 당의 엄격한 정치 연구나 애국 교육으로 얻을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언가, 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파룬궁의 금지는 중국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감시, 연행, 처형  몇몇 파룬궁 지지자는 대중의 눈에 확연히 띄는 공공장소에서 연행되어 사라졌다. 칭화 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수련자들도 큰 압박을 받았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다른 이들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나도 당국의 감시를 받는 대상이 되었다. 주기적으로 비밀경찰들이 나를 미행했고 사진 촬영하는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휴대전화는 도청되고 있었고 이메일도 해킹당해다. 처형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내 귀에도 전해졌다.  1년으로 계획했던 칭화대 유학 기간은 2개월 만에 끝났다. 지금까지 배웠던 내용과 자료를 모두 압수당했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베이징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베이징을 떠나기 전까지 가장 친했던 파룬궁 친구들 중 그 어떤 이도 찾아볼 수 없었다.  2년이 지나서야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다. 뉴스를 보고 쿠이와 준이 체포됐고 5~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준의 죄명은 인터넷에서 파룬궁 정보를 가져와 홍보물을 만든 죄였고, 쿠이는 독립신문을 만들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그 신문이 바로 대기원시보다.  이후 두 명 모두 구금 중 고문을 당했다. 한 명은 아직 연락이 닿지 않는다. 다른 한 명은 최근 중국에서 탈출해 미국에서 새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오밍은 베이징 교외에 있는 노동교양소에서 수개월 전기봉으로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미래에 대한 의문  1999년 여름 중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중국어 공부를 위해 갔던 베이징 유학은 내가 알고 있던 중국과 상당히 달랐고 이 사실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파룬궁에 대한 경험과 이를 지지하던 이들에게 닥친 탄압은 중국에 대해 매우 많은 부분을 다시금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나라가 시민들의 정신적이고 개인적인 삶에까지 침범해 독단적인 힘을 행사하고 그런 힘을 합법화하는 법적 규제를 만드는가? 이토록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나라의 미래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그 결과가 아직 중국서 가시적으로 명백하게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 계속 드러날 것이다. 







 중국을 떠나기전 나는 종종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정직과 선량함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자국민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지도자가 지배하는 한 나라의 미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한 사회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범죄라고 할 때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중국서 흘러나오는 오염된 제품과 그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그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제시한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국민을 입 다물게 하느라 너무 바쁠 뿐이다. 꽤 오랜 시간 칭화대에 가보지 못했지만, 공원은 크게 바뀌지 않은 채 고요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매튜 쿠토로브스키




http://www.epochtimes.co.kr/2014/12/고요한-여름/



왠지 남일이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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