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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강독세미나> '안티크리스트'
게시물ID : phil_105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퐈우스트
추천 : 1
조회수 : 18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1/15 00: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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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크리스트에 관한 배경>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니체의 저서 힘에의 의지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저서가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가스트라는 인물이 자의적인 첨삭, 삭제 등으로 374편의 단편들이 훼손된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가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의 저서를 준비 안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1885년에서 1889년 까지 준비했다. 하지만 이후 니체에게 닥친 정신병과 건강악화로 더 이상의 유고는 써지지 않았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힘에의 의지는 책세상에 나온 전집판으로는 유고 3(1885년 가을 ~ 1887년 가을, 1887년 가을 ~ 18883, 1888년 초 ~ 18891)으로 나와있다. “힘에의 의지라는 저서는 이 기간을 지나면서 니체에 의해 4차례 정도 걸쳐 번경되고 변경된다. 결국 끝에 와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제목을 포기하고 가치의 전도로 바꾼다.
가치의 전도는 기획되어 있던 바는 4부작으로 기획되어 있었다. 1부는 안티크리스트. 그리스도교 비판 시도2자유정신, 허무주의 운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비판’, 3비도덕주의. 숙명적 유형의 무지 및 도덕에 대한 비판’, 4디오니소스, 영원 회귀의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니체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 악화로 예정되어 있던 것을 1부였던 안티크리스트만 완성된다. 이후 우상의 황혼도 완성되지만 이것이 힘에의 의지라는 저서가 없는 내력이다.
 

<서문>
 

(pg 213, 1째줄) 삶의 의지를 거세시키는 금욕주의적인 그리스도교에서 해방된 사람
 

(pg 213, 2문단, 7) 이성적인 진리는 존재를 니체는 부정하기 때문
 

(pg 214, 2) 힘에의 의지
 

<1>
 

히페르보레오스 =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민족으로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지구 북쪽에 살며 끊임없는 행복, 기쁨, 봄을 즐긴 민족으로 나온다. 아지만 이쪽에 그리스인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북풍이 이곳에 이르려는 그리스인들을 모두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는 육지로든, 바다로든 가는 길을 발견할 수 없다를 인용
 

(pg 215, 11) 그리스도교의 이러한 덕목들이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2>
이기심 = 건강한 이기심, 다른 저서에서는 건강한 이기심과 병든 이기심으로 나누는데 건강한 이기심은 건강한 삶의 생존조건이고 병든 이기심은 퇴화된 삶의 생존조건이다. 이후 다른 저서에서 심도 있는 이해를 하자
 

<5>
 

(pg 218 1~5) 그리스도교 또한 남을 이길려는 이기심 힘에의 의지에 만들어졌다. 이기심과 이기심이 대립하면서 이긴 이기심이 도덕을 만들었으며 자신들의 권위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이기심을 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권위에 순응하는 멍청한 자들을 최고의 인간상으로 만들었다.
 

<6>
 

(pg 218, 5) 기존의 신성은 힘에의 의지를 가진 자들이 만든 것이니 이미 도덕 자체도 모순적이라는 것
 

<7>
 

(pg 221 3)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맹목적인 의지들의 활동하는 장으로 보았다. 의지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지이다. 따라서 맹목적 생에 의지는 항상 결핍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고통이 된다. 따라서 의지가 발현되는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이런 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예술적 명상과 삶에의 적극적 부정을 해야한다. 예술적 명상은 단지 순간적인 방법이다. 결국 최종적 해결책은 같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의 공감’, ‘동정이다. 그러므로 동정은 개별적 고통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니체는 그래서 쇼펜하우어에게 동정이 도덕이 되어 버렸다고 이야기한다.
 

<11>
 

(pg 226, 마지막 줄) 칸트의 선험성에 대한 문제
 

1) 어떤 조건들에 하에 필연적, 보편적 도덕이 있다.
2) 이 조건은 경험이 아닌 선험적 순수이성으로 도래된다.
 

그런데 선험적인 것은 경험 이전의 것이기에 경험되지 않는다. 그러면 선험성은 결국 경험 외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관념이거나 아니면 단순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가지고 태어난 관념이라 해도 다시 해명되지 않기에 믿음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선험성이란 단순 믿음의 차원이 된다. 그러므로 칸트는 인식에 대한 믿음, 인식의 선험성에 대한 믿음이 적법하다는 전제를 근거할 뿐이다.
 

<15>
 

(pg 231, 1)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은 욕구를 못느끼지도 또 완전히 지배당하지도 않는 사람이듯이 실재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종교를 만든 것이다. ex) 연애를 27년 동안 못한 영욱형은 천국에 가면 3천 궁녀가 자신을 반겨줄거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17>
 

(pg 233, 15) 결국 성경에 나오는 신은 약자들이 보상심리로 만든 가상체에 불과하다.
 

(pg 234, 아래서 2) 칸트는 인간 인식의 영역을 현상으로 제한하고, 물자체의 존재는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물자체에 관한 오성적 인식은 부정한다. 물자체는 사유의 대상이다 라는 것. 하지만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의 관계를 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가 인과율을 현상의 영역으로 한정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입증할 수 없는 신을 이성의 요청으로 제기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해석할 권리도, 해석을 거부할 권리도 포기한 셈이다.
 

<21>
 

(pg 237, 1)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점은 두 개가 있다. 첫째는 두 종교의 목표는 현실의 삶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둘째는 두 종교는 인산의 자연적인 욕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차이점은 첫째 불교에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전제하는 신의 개념이 없다. 둘째 에 대한 싸움을 말하기 보다는 현실에서의 고통에 대한 싸움을 말한다. 셋째 도덕적 정언명령을 의무로 삼기보다는 복수, 혐오에 대한 경계를 말한다. 넷째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라는 이기주의, 불교는 고통에서의 해방과 평정함을 목표하지 그리스도교처럼 완전성에 대해 열망하지 않는다.
 

<24>
니체가 반유대주의자’, ‘나치즘창시자로 오해 받는 대목이다. 니체는 여기서 2,000여년 전에 유태인들이 만들어낸 개념을 최고이자 최악의 발명이라 보며 그들의 천재성을 칭찬했다. 유의해야할 점은 니체가 비판한 것은 2000여년 전의 유태인이지 1880년대의 유태인을 혐오한 것이 아니다.
 

<27>
 

(pg 250, 7) 예수는 예수 당시의 유대교가 가지고 온 데카당스에 대항하며 봉기한 인물, 예수는 유대교회에 대항한 봉기이다.
 

<29>
 

(pg 252, 9) 르낭 = 프랑스 종교학자 <예수전>이란 논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감받은 철학자로 해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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