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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스포/쁘금] 수녀 - 카나메 준코
게시물ID : animation_3175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vangelion
추천 : 2
조회수 : 36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3/17 00:07:30




 있잖아. 자고 있니?


있잖아


 그래, 자는구나. 그냥 들어줘.

 아닌가, 대답을 못하는걸까. 그렇다면 더욱 좋고.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 남편은 바른 생활 사나이인데다가, 술도 잘 하는 편이 아니야. 그런 점이 맘에 들어서 결혼하게 된거고, 그런 점 덕분에 더욱 사랑하는거지만, 어찌되었건. 그래서 이따금 퇴근이 늦어지는 날엔 이렇게 혼자 캔맥주를 마시게 되거든. 집안일로 피곤할텐데 굳이 깨울 생각도 들지 않았고, 부부 사이라도 혼자의 시간은 필요한 법이지. 남편에겐 낮이 그런 시간이고, 나에겐 밤이 그런 시간일 뿐이야. 함께하지 않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거든. 아무튼, 그래서 이렇게 미용에도 좋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가면서 들이키고 있는 중인거야. 오늘 열어서 마시는 건 기네스야. 흑맥주는 간단히 먹기에 좋아. 안주 없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

 나는 한 모금 더 들이켜. 목넘김이 좋아. 거품도 적당해.


엄마가 그랬었지


 그러게, 왜 이 맥주를 골랐을까. 술을 가리진 않는 편이긴 해. 생각해보니 내가 딱히 가리는 술은 없는 편이지만, 그래서 다양한 맥주를 냉장고에 늘상 채워둬. 이렇게 채워두긴 하지만, 애들, 아니 타츠야 앞에서는 먹기 그렇다보니 며칠이고 몇주고 맥주가 줄어드는 일은 적은 편이야. 그래도 이렇게 가끔씩 먹는 때는 있는 법이지. 이건 몇주는 된 거라서, 빨리 해치워야하기도 했고.


 내가 왜 이렇게 혼자 마시고 있냐고?

 그러게.

 아니, 이유는 있어.

 있잖아. 수도원, 가본 적 있어?

 쉬는 날이었던 어제, TV에서 다큐멘터리 하나를 봤어. 이탈리아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녀들의 모습. 조용함이 미덕이라기보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나 다름 없어 보이는 그 조용한 공간. 현실과 지금 이 공간을 사랑하는 나에게 크게 와닿는 이야기는 아니었어. 애초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진행하는 방송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성이 엉성했거든. 남편은 그래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크게 감화하는 사람이라 감동적으로 본 모양이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어. 그래도 풍경은 아름답긴 했으나, 뭘 전하려고 하는지는 요원했지. 무엇보다도 내가 살고 행복을 느끼는 곳은 여기인걸.

 그런데 나는 한 수녀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어. 진홍의 붉은 머리, 국적이 일본이었다고 하는 한 수녀님. 자신을 규정하는 국가와 이름을 모두 버리고, 언어조차도 라틴어와 생활을 위한 이탈리아어만을 사용한다던 그 어린 수녀의 담담한 목소리. 신에 대한 올바른 찬양으로 가득한 그녀의 인터뷰는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 없었지만, 그랬기에 불편했어. 인간답지 않았거든. 그러던 와중에 듣게 된거야. 그 한 마디를. 왜 떠났냐고 묻는 질문에, 무려 2분간 침묵하고 일본어로 내뱉은 그 말을.


외로워서요


난 괜찮아


 나는 그 인터뷰를 보고 울고 있었어. 남편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난 대답 못했지. 나도 이유를 몰랐거든. 외로워서요. 그 한 마디가 왜 나를 울렸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 속에도 저 수녀처럼 외로움이 한켠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아니었어.

 외로움을 가진 누군가를 잊은 것 같다는 죄책감이 스믈스믈 마음을 잠식했거든.

 왜냐하면 나는 뭔가 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저 수녀처럼 외로움을 견뎌야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어. 내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적은 없었고, 앞으로 있더라도 아직 도달하진 않은 지금인걸.

 그런데도 내가 그걸 어떻게 깨달았는지 알아?


나도 기억하고 있어


 술병 하나가 있었어. 그것도 꽤나 고급 와인이었단 말이지. 사실 난 그게 타츠야가 성인이 되는 생일날을 위해 둔 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내 아이디어였고, 나름의 꿈이었거든. 아들이 성인이 되는 날에 20년이나 된 와인을 함께 마신다는 거.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아들에게 선물해줄 수 있다면 좋은거고. 그것도 무리라면, 남편과 천천히 좋은 술을 즐기는 계기가 되겠거니 생각했지.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어서 며칠 전 라벨을 살펴봤어. 그날 직장에서 큰 프로젝트가 끝나고 와인 전문점에서 친한 사람들끼리 잠시 들렀다 왔거든. 그때 이런이런 계획이 있다고 자랑했는데, 술이 어디 산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거야. 날짜야 타츠야의 생일일 게 뻔했으니 17, 아니 날짜 세는 방식으로는 16년인가, 술 마셔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네. 어찌되었건, 프랑스라는 건 기억이 나는데 어느 지방이었는지 까먹고 있었거든. 그래서 집에 돌아오자 마자 확인했었지.


내가 성인이 되면, 같이 마시자고 했지


 라벨은 103일을 표시하고 있었어.

 프랑스였으니까, 10.3.97.

 이렇게 간결한 잉크로, 고딕의 특이한 손글씨로. 맨 처음 떠오른 건 당황스러움이었지. 날짜만 봐도, 이건 타츠야와 함께하기 위한 술이 아니었거든. 남편에게 물어도 내가 온전히 주도했던 일이라 잘 모르는 눈치였기도 했고. 그래도 그건 당황스러움일뿐이었고, 그저 술이 제조된 날짜와 내가 그 술을 받아서 기념하기로 했던 날짜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렇게 납득하려는 논리를 짰지만, 나는 납득하지 못했어. 나는 분명 저 술을 소중한 추억이라고 기억하고 있었으며, 누군가를 위해 아껴두고 있다고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그것은 타츠야보다도 좀 더 멀고, 남편과는 조금 더 가까운 시기였거든. 20년 전의 일이었고.


나도 많이, 그러고 싶었어


 그게 바로 며칠 전의 일.

 오늘은 2017103. 며칠 전, 확인 했을 땐 20년 좀 안된 술이었고, 오늘 내가 이렇게 혼자 술을 홀짝이는 지금, 저 술병은 막 성인이 된거지.

 오늘로 20년이 된 술병이라는거야.

 그런데, 왜 나는 술잔을 맞댈 사람을 잊은걸까.

 나는 그래서 슬펐던거야. 그래서 수녀를 보고 슬펐던거야.


 외로워서요.


 그 수녀는, 지구 반대편까지, 인간을 버리며, 신을 쫓던 그 소녀는 어째서 외로워서 떠났을까.

 아니, 떠나서 외로운 것은 아니었을까. 외로운 것이 이유가 되는 그 사무친 감정을, 버린 인간성의 일본어로 표현했던 것은, 신의 언어일 라틴이 아닌, 새로운 언어인 이탈리아가 아닌 언어를 그런 식으로 표현했던 그 마음을 나는 알 수 없었거든.

 그것은 내가 모르는 와인과 닮았어.

 내가 모르는 사라진 기억 같아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와인과 내가 목격한 외로움의 수녀는 하나 같았던거야.

 두 개가 하나였을테고,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수녀, 와인에게서 분리된 수녀를 보고 울어버린거야. 그렇게,


미안해


 미안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








카나메 준코는 딸이 성인이 된다면 함께 술자리를 가졌을 것 같습니다.

그 사이의 이야기입니다.

외로워서, 혹은 떠났기에 외로울 여신.

성모 마리아처럼 혼자 남겨진 자신을 돌아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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