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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_007
게시물ID : wedlock_126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보니님
추천 : 12
조회수 : 195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10/20 00:2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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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내마음 찢어진다. 그러나 마냥 슬퍼하기만 할순없다. 내자식들
굶어 죽일수는 없으니.. 큰아이는 가끔씩 돈을 들고올때 말고는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올곧게 자란아이. 아버지 어머니 대신하여 동생들 먹일걱정뿐이 안하는 내 첫아이 미안하다. 너무미안하다. 내 땜빵은 이제사 기술을 배운단다. 그래.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운다니 내 믿음이 빛을 보는구나. 
땜빵이는 뭘 자꾸 만들어 온다. 돈을 가져오는것을 보니 일을
하긴 하는가 보다. 
하아..또 임신이다. 땜빵이는 신이났다. 주책이다 정말. 
내나이 마흔 막내가 태어났다. 땜빵이를 꼭 닮았다. 땜빵이는 신이나서 어화둥둥 내새끼 란다. 뜨문히 오던 큰아이는 얘는 누구냐며 궁금해 한다. 네 동생이라고 일러주었다. 동생을 왜 이리 많이
낳았냐며 원망할 법도 한데 마냥 귀여워 해준다. 나는 출산의 달인이 되었다. 막내는 내손으로 받고 탯줄도 내가 잘랐다. 고놈 참 퍽이나 귀엽다. 집안의 귀염둥이다. 그사이 시아버지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 식사를 잘 못하신다. 
큰아들은 닥치는대로 일하다가 안되겠는지 운전면허를 독학하여 결국에는 취득하였다. 나와 같은 믿음을 가지며 엄마를 최고 존경한다는 내 큰아이. 인기있는 직업은 아니지만 어찌어찌 공무원이 되었다. 시아버지는 그리 엄하게 굴던 장손이자 내 큰아들의 손을 잡고 위암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는 점점 쇄약해지셨다. 아직은 작은집서 아이들을 돌보셨다.
그래도 이제는 큰아이 덕분에 배는 곯지않고 살게 되었다. 너무 고맙지만 미안하다. 장가는 가야 될텐데.
그사이 이 땜빵이가 음주가무 좋아하는 이 땜빵이가 박가네 집에서 약주를 대접받고 우리 둘째를 시집보내겠단다..우리둘째 외동딸. 이제 스물하나인데 시집보냈다. 이듬해 내나이 마흔 여섯에 할머니가 되었다. 외손자가 생겼다. 집에 자주 놀러왔다. 딸은 엄마팔자 닮는다던가.. 사위가 생활력이 없다. 딸이 자꾸만 집으로 온다. 걱정이다. 잘살아야 될텐데..
 어느날엔가 예쁜 처녀를 데려왔다. 곱디 곱다. 우리집 장손 맏이 큰아들이 결혼을 한단다. 
내나이 마흔여덟 내딸보다도 어린처녀가 내 며느리가 되었다. 
내나이 마흔아홉 큰아들 내외는 딸을 낳았다. 나와 내 땜빵이에게는 첫 손녀다. 그렇지만 우리막내도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들이 더 귀엽다. 내손녀도 지 아버지를 닮았나보다. 나는 이제 시부모님이 이해가 갔다. 내자식이 더 이쁜것을. 
내나이 쉰하나 큰아들내외가 둘째를 낳았다. 나는 너무 좋았다. 이쁜 며느리닮은 이쁜 손녀들. 하지만 사돈께서는 아들이 아니라며 우셨다. 
내나이 쉰넷 우리는 갈곳이 없어졌다. 엎친데 덥친겪으로 시어머니건강마져 좋지않으셨다. 시어머니는 부잣집 마나님으로 사시며 당뇨를 앓고 계셨고 천식도 있었다. 작은집 손주들을 돌볼 수 없는 건강상태가 되어버렸다. 살집도 없어 큰아들이 지은 집으로 들어가 살 수 밖에 없었다. 
방이 세개 다락이 두개 부엌이 하나 화장실이 하나.
나와 땜빵이. 아직 장가들지 않은 아들넷.. 시어머니.
그리고 큰아들네 넷.
열한명. 대가족의 삶이 시작 되었다. 방하나는 큰아들네가 쓰고 다락이며 제일 작은 방이며 아들들이 쓰고 다락달린 방하나는 나와 땜빵이 그리고 시어머니.. 셋이 쓰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과묵하시다. 며느리도 과묵하다. 어찌저리 말이 없을까? 이제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첫 손녀는 쉬지않고 재잘거린다. 날 닮았나보다. 이 아이가 미술학원에서 뭘하는지가 다 보인다. 손녀랑 같이살아 좋다 좋은데 시어머니랑 한방쓰는거는 불편해도 너무 불편하다. 
아무래도 아들이 눈치챈것 같다. 큰아들내외가 손녀들을 데리고 공무원들만 살 수 있다는 사택에 들어가 산단다. 
이제 시어머니랑 한방쓰는 생활은 면했다. 
그런데 과묵하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는 일주일에 한번이고 두번이고 손녀들을 데리고 한시간 거리를 자주도 드나든다. 
어제도 우리시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붕어싸만코를 사들고 와서 잡숫는거 보고갔는데,
내나이 쉰 여섯 시어머니께서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곱게도 돌아가셨다. 최근에는 교회를 다니시며 천국가시겠노라며 가지고 계시던 패물을 헌금하셨다. 내게는 남긴것도 없이.. 선산에 시아버님 모신곳 옆에 나란히 시어머님을 모셨다. 시어머니 장례중에 시외삼촌도 오셨는데, 우리집 땜빵이는 외삼촌때문에 어머니가 말년에 고생하고 돌아가셨다며 원망원망을 하였다. 맞다. 이분때문에 보증을섯던 시아버님은 일군재산이 모두 넘어간채 이사왔기 때문이다. 이분 안동김씨인 내 시댁어른 내 시어머님 친정동생 이분만 아니였어도 나도 아이들도 이 고생은 안했으리라. 나는 입을 닫았지만, 원망이 아니든것은 아니었다.
 이 헛헛함 가시기도 전에 이혼시켜 달라며 떼쓰던 우리 둘째 고명딸이 내나이 쉰 일곱 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사고가 아니었다. 스스로였다. 땜빵이는 이혼은 안될말이라며 일부종사하며 살라고 딸을 다그쳤었다. 그런데 서른넷의 떡국을 먹지도 않은채 홀로 세상을 떠났다. 
딸의 장례중 저멀리 저구석에서 땜빵이는 홀로 아이처럼 엉엉 흑흑 서럽게 울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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