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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변화에 대한 리포트(삭제각오&스압주의)
게시물ID : economy_121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강연1
추천 : 0/6
조회수 : 65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5/12 01: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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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변화에 대한 리포트*



당신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제 글을 한 번 읽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현 사회는 화폐만능주의로 이루어진 화폐시장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함께 하는 자본주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자본 = 화폐‘ 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는 현재에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 = 자유시장경제체제 로 볼 수 있다는 것에
별 다른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화폐만능주의(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이념이나 종교처럼 맹목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는 체제가 됐죠.
그 이유는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일종의 진리처럼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것이 분명히 옳은 또는 현재에서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체제일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화폐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가장 먼저, 인간의 본성 또는 본능이라 일컫는 것을 건드려 보겠습니다.

우선 보통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열거해볼 텐데요.
성악설이나 성선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생존‘ 이라는 키워드를 두고,
어떠한 전제조건 없이 자유롭게 작성해보겠습니다.
생존은 생명체로써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경쟁, 욕심, 시기, 배반, 음모, 이기심, 희생, 배척, 양보, 협동.

물론 더 많을 수도 있지만 합집합인 부분이 많기에 커다란 울타리로 적어봤습니다.

살펴보니 희생, 양보, 협동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옳고 그름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상생의 조건에서 봤을 때는 상당히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단어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오히려 상당히 친근한 단어들이기도 하죠.
그런데 과연 이러한 본성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 우리들의 본래 모습일까요?
태어날 때부터 그런 뇌의 구조와 잠재적인 의식의 구조를 가지고 탄생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반증하기 위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에 위 단어들을 주입해보겠습니다.

희생, 양보, 협동. 글쎄요, 이것들이 없어도 자본주의는 그 체제를 돈독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경쟁, 욕심, 시기, 배반, 음모, 이기심, 배척은
그 단어의 순수한 뜻만으로도 체제와 상생하는 조건이 충분합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내면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우리가 사회 체제 속에서 자라나면서
겪고, 듣고, 봐온 모든 것들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군중심리나 그런 특정 상황 따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유는 ‘인간들’ 이 아닌 ‘인간’ 이라는 주체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쟁, 욕심, 시기, 배반, 음모, 이기심을 완전히 지워버리고
희생, 양보, 협동이라는 상생의 키워드만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죠. 화폐는 수없이 찍어내지만,
분명하게 확실한 것은 그 양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개인마다 가질 수 있는 한정이 없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줍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체제입니다.

이 체제에서 우리는 더 많은 돈을 가지기 위해서 더 많은 임금을 지급받는 노동력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고, 서로를 밀어내야 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경쟁은, 눈에 보이지만 공론화 하지 않는 여러 계층들을 만들어냅니다.
쉽게 말해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가 된다는 것이죠.

평등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런 것이므로, 참고 이겨내어 남들보다 잘 살아야 합니까?
네, 맞습니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무조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태초부터 경쟁의 연속이었고, 약육강식의 구조에 따라 살아남은 자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이것에는 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사이에는 우리가 잊고 있는 한 가지의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기술입니다.

세상은 누가 발전시켰습니까? 문명의 혜택은 누가 만들어낸 겁니까?
우리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것이 연필을 타고 종이에 그려지고,
그것을 형상화하는데 성공한 ‘기술’ 이라는 것. 즉, 우리들이 만들어낸 겁니다.


정치인이 자동차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CEO가 컴퓨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비행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돈으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사 들이거나,
그 기술을 더 발전시킨다는 명목 하에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이 그것들을 취하는 것에 대한 합리화를 시킬 뿐입니다.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서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지원(돈) 없이 어떻게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들은 돈이 어디서 생긴 걸까요? 돈은 은행이 발행합니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은행이 돈을 발행하는 것이지, 정부가 은행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정부와 은행은 각기 다른 기관입니다.

그들의 뒤에는 은행이 있습니다. 거대 기업가, 정치인, 정부의 뒤에는 은행이 있습니다.
여기서 더 이상 부연설명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체제의 주인은 은행,
그리고 그 뒤에는 은행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자, 그렇다면 이제 순서대로 나열해보겠습니다.


노동자 < 기업 < 기업가 < 은행 < 은행가(초거대자본)


이라는 일종의 공식이 완성됩니다.

이 단편적인 공식만으로 우리는 이 체제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노동자는 기업을 위해 일합니다.
물론 보수를 받지만, 그 보수가 노동의 양과 중요도를 정확하게 결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의 가치는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죠.

기업은 곧 기업가를 위해 움직입니다. 그리고 기업가의 뒤에는 은행이 있습니다.
기업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대출이라는 굉장한 제도를 통해서 수십 년간 은행의 배를 불려주고 있습니다.

interest(이자)로 말입니다.

그 은행은 은행을 소유한 거대 자본가의 배를 불려줍니다. 거대 자본가는 한 명 뿐일까요?
그들은 서로 경쟁합니다. 하지만 경쟁만 한다면 고마운 일이죠.
그들은 담합하고 자신들만의 그룹을 가집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업들이 창조되길 원합니다.
그들은 더 많은 기업가들이 대출을 받아 더 많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자신들에게 더 많은 이자를 가져다주기를 원합니다.

알고 계십니까? 전 세계 부의 40%을 전 세계 인구의 1%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빌게이츠나 워렌버핏 같은 사람들은 거대 은행을 소유한 이들에 비하면 일개 졸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면 천만다행입니다.

우리는 결코, 당신은 결코, 당신 자신을 위해 혹은 당신의 자의로 정한 누군가를 위해 일한 적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미시적인 관점으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세상은 그렇게 주관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겠죠.

그럼 뭐 어쩌라고?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건데?

당연합니다. 대책 없는 비판은 먹다 버린 음식물보다 못하니까요.

그럼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체제에서 여러 가지를 지우개로 지워보겠습니다.

우선 가장 첫 번째로 돈을 지우겠습니다. 모든 종류의 화폐를 지웁니다.
돈을 지우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거래입니다. 거래가 사라지면 은행이 사라집니다.
은행이 사라지면 기업도 사라집니다. 기업이 사라지면 노동도 사라집니다.
노동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 까요?

정말 우리는 미친 듯이 게을러지고, 도태되고, 나락으로 떨어질까요?
당신은 어떤 근거로 그런 생각을 하는 지에 대해서 단 한 번이라도 고민해본 적 있습니까?

그것에 대해 정말 확신하나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위에서 약속한대로 ‘기술’ 이라는 것을 끌어다 오겠습니다.
과거라면 정말 당신은 확실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반박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학이 만물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과학은 곧 기술이죠.

현재 인류의 기술력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도 무궁무진하고 방대한 양이기 때문에 긴 설명을 생략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지금 우리의 기술력으로 우리는 아무도 노동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배부르게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마르크스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미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기계가 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고,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20세기 초반에 자연의 에너지로 무한의 에너지를 내는 기술을 개발한 바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소리 소문 없이 수많은 방해 공작으로 사라졌지만요.

이것은 절대 음모론이 아닙니다. 정확한 근거와 자료를 바탕으로 공부한 것들입니다.
이미 자연에 상처를 주지 않고 자원을 사용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이 그만큼이나 발전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면 너무나도 많은 설명이 필요하기에 접어두겠습니다.(진정 아쉬움.)

그렇다면, 우리가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정말 우리가 배워 온대로 게을러지고, 도태될까요?

그 ‘일’ 이라는 것이 뭐죠? 우리가 일하지 않을 때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이 누구죠?
맞습니다. 모든 것이 그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만들어왔던 교육의 허상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교육을 지배하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교육은 정부가 담당합니다. 정부는 국민의 세금으로 연명합니다.
국민의 세금은 국민이 노동을 한 대가로 지불받은 화폐입니다.
정부가 통화량을 조절하기 위해 은행에게 돈을 찍어달라고 요청합니다.
은행이 찍어내는 돈은 이상하게도 정부가 갚아야 합니다.
화폐가 발행되는 그 순간, 정부는 은행에 빚을 지게 됩니다.
아마, 모르셨을 겁니다.

이정도만 해도 교육이 어떻게 지배받는지는 길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리라 믿습니다.

계속해서,

초등학교나 유치원 교실로 가봅니다. 장래희망을 물어보겠습니다.
과학자, 대통령, 전투기 조종사, 축구선수 등 많습니다.
이유를 물어봅니다. 그들은 절대 체제나 이념에 구속받지 않고 장래희망을 정합니다.
따로 들어보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분의 어릴 적 장래희망은 무엇이었나요?
그 이유는 무엇이죠? 대통령이 되어 막강한 권력과 부와 명예를 거머쥐기 위해서 인가요?
과학자가 되어 특허를 내어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서 인가요?
축구 선수가 되어 레알 마드리드에 들어가서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수 십 억씩 벌기 위해서 인가요?

아니죠.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뭔가를 이룩하면서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도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밑바탕입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 저와 제 주변은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매일 술에 쩔어 있거나, 클럽이나 모임에서 남성은 여성의 몸을 탐하기 위해,
여성은 남성의 돈을 취하기 위해 살아가고, 마약으로 현실을 도피하고,
보험금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고, 무시 받고 소외받은 모든 것들이 폭발해서 살인을 저지를까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저도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자신은 변해버렸다구요? 글쎄요, 그건 이 체제 안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데요.

잊지 마세요.
‘인간은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면 왜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걸까요?

남들보다 가지지 못한 상대적인 박탈감, 한정된 물량과 화폐가 주를 이뤘던 자본주의 체제에서
남들보다 더 가지고 싶은 욕구를 비롯한 수많은 것들!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지금의 체제들이 낳은 문제점들일 뿐이고,
지금의 체제에서나 달콤하게 느껴지는 일탈일 뿐입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노동을 제외한 엄청난 시간들이 주어져도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있을 지도 사실 의문입니다.

눈부신 속도의 기술 발전과 문명의 발전이 이뤄집니다.

인간은 타의가 아닌 자의로 원하는 무언가를 할 때 가장 행복해하고,
가장 즐거워한다는 것은 모두가 경험해봐서 아는 일입니다.

자꾸 번복하고 실증을 느끼면 어떻게 하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해야 할 것들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합니다.
문제는 하기 싫은 것의 시간적 비중이 너무나도 크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진로든, 꿈이든 빨리 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번복과 포기가 잦아지는 건 뻔 한 일이 아닐까요?

시간이 충분하고 기회가 충분히 주어진다면
우리는 보다 깊게 생각하고, 깊게 탐구하고, 신중하게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계속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영역도 끝이 없는 발전을 이룩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궁금하실 겁니다.

좋습니다. 궁금한 게 천지니까,
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의 약간의 궁금증을 풀어 보겠습니다.

일단 엄청나게 미래지향적인 기술력을 제외 하겠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처럼 아직까지 대부분의 일은 인간이 해야 한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돈과 기업과 은행과 심지어는 정부도 사라진 전제를 깔겠습니다.

우리는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많은 부품의 원료를 캐야 합니다.

당신은 절대 믿지 않겠지만, 세상에는 돈 때문이 아닌 정말 어떤 원료를 찾아 깊은 굴을 파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이 원료를 캐내어 줍니다. 돈은 주지 않습니다. 돈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세상이니까요.
다만, 이 행위가 우리 모두에게 자동차를 제공하기 위한 행위라고만 합니다. 원료를 캤습니다.

그럼 이제 운반을 해야 되겠죠?

세상에는 운전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는 운반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운반을 합니다. 누군가라는 말이 너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봅니다.

자동차 부품으로 쓰일 수 있게 가공하는 공장으로 운반됐습니다.
공장에는 가공을 할 줄 아는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기술자가 가공을 합니다.

조립 공장으로 보내어 조립이 완료됩니다. 더 이상 세일즈맨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차를 탑니다. 원료는 더 이상 석유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전기를 연료로 사용합니다. 배터리는 각자 알아서 충전합니다.

여기서 결여된 것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생산을 위한 노동력입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좋은 차를 탄다면 지속적으로 차를 바꾸고 생산할 필요가 있을까요?
생산량과 빈도수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더 좋고 나쁘고의 개념이 아닌 거죠.

좋고 나쁘고의 개념이 사라지면 개성이 사라진다는 저보다 더 개소리를 하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리자면,
제품의 질과 제품의 디자인은 다른 개념입니다.

자,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없는데 그들은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죠?

세상에는 당신이 믿을 수 없겠지만, 온실이나 비닐하우스 경작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제 더 이상 좋은 집을 짓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넘쳐나는 땅에
사람들은 과거처럼 수많은 동물들을 풀어놓고 사육합니다. 세상은 넓습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이 농촌이라면 농촌의 일이 가장 잘 맞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휴일이나 연휴에 사람들이 몰려서 고속도로가 막힐 일도 없습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기회 속에서 자신이 원할 때마다 언제든지 여행을 떠납니다.

농촌에서 자라난 사람이 도시로 떠나고 싶어한다구요?

농촌에도 도시와 같은 인간에게 필요한 많은 시설들이 갖춰진다면 떠나고 싶어 할까요?
돈을 벌러 도시로 상경하는 것은 이미 옛날이야기입니다.

당신의 그 생각은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 따위는 없습니다. 상대적 빈곤도, 빈부격차도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재미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타인이 우리보다 어려운 것을 보며 평생을 즐거움 속에서 살아가는 변태들이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단지 사회에 물들어버린 우리의 모습일 뿐입니다.

또 누군가는 싱싱한 채소를 타인에게 가져다주며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모든 행위 자체가 희생과 봉사가 됩니다.
자신의 희생과 봉사가 결국 나, 가족, 친구, 이웃을 위한 일이라는 걸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깨닫게 됩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이유로 인해 누군가를 위해 일하지 못하는 사람,
아프지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 배고프지만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당신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제 그 인구들은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면서 사회를 움직이는 구성원이 됩니다.

전 인류가 움직이게 됩니다.
노숙자도 없습니다.
아프면 충분히 휴식을 취합니다.

엉망진창일 것 같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똑똑합니다.
탄력적으로 멋진 근무 표 따위는 하루 만에 만들 수 있습니다.
1년의 휴가 계획도 몇 시간만에 짜야했던 우리였습니다.

물론 이런 디테일한 설명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큰 테두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모두를 위해 일하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이전처럼 폭발적인 생산량이나 반복적인 노동을 요구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품목에 있어서 말이죠.

그리고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위 상황은 현재의 우리가 모르는 고도로 발달한 기술을 제외했을 경우임에도 이 정도까지 상상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배달은 누가 하냐구요?
무인 자동차는 이미 수년 전에 개발됐었습니다.

그 기술력으로 우리가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봉사와 희생, 그리고 남아도는 수많은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합니다.
시간이 남으면 여유가 생깁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것을 읽어주고, 봐주고, 들어주고, 사용해줍니다.
그 속에서 눈부신 발전이 있습니다. 인구가 늘어도 괜찮습니다.
더 이상 멋진 집을 짓기 위해 산을 파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술력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땅 위에서만 거주하는 발상 또한 구시대적 발상입니다.
인구가 는다는 것은 세월이 흐름을 뜻하고 세월이 흐르면 문명도 똑같이 발달합니다.

이미 우리는 무한동력 에너지와 자연에게 얻은 불멸의 자원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요? 분명히 당신에겐 이 모든 것들이 개소리로 보일 겁니다.

개소리가 가능한 이유는 바로,
바로 화폐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화폐가 없어졌기 때문에 천재들이나, 세상을 뒤집을 기술력을 묻어버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암 치료제나, 에이즈 치료제 연구를 막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돈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자본주의가 무너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수 백 년이 걸릴 지도 모릅니다.

예전에는 지동설을 외치면 미친놈 취급 받았습니다.
지금 천동설을 들어보면 어이가 없고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미래에는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 우리의 삶을 사진과 영상으로 바라보며
미개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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