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니 조카 엉덩이가 의사양반 손바닥과 하이파이브 할 것 같음"
오빠새끼로부터 연락이 왔다
조카가 나오기 직전이라는 것
열일 제쳐두고 꽃바구니 하나 챙겨 병원으로 달려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몇시간
분만실에서 짧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분만실로 뒤따라 들어간 오빠새끼는
세상과 처음 마주한 우리조카보다 더 크게 울어댔다
굉장히 감동한 모양이었다
슬픈 영화를 봐도 '어차피 영환데 뭐' '뭐하러 우냐 저런거보고'라고 말하던 녀석이
자기 아이를 보자 눈물이 나왔나보다
그 모습에 괜시리 코끝이 찡해진나는
"그냥 등신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정이 있는 등신이었군.."이라고 안도하며
조카 얼굴보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처음 마주한 나의 조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고
상상했던 것보다 몇배 귀여웠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입을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내 관 치수를 재야했다
조카가 태어나기 몇달전 유럽여행에서도
내가 갖고싶은 물건이나 기념품은 하나도 사지않고
조카옷만 잔득 사왔었다
이때부터 조카등신 조짐이 보였지만
조카가 태어나자 그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차마 병균이라도 옮을까 내 못생김이 묻을까 걱정돼,
안아보지도 못하고 곤히 자는 조카를 몇시간이고 들여다볼때도 있었다
조카가 내 얼굴을 보고 울면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로 퇴장하기를 수차례
뭐가 문제일까하고 거울을 보고있으면 관 치수가 먼저가 아니라 항쇄를 먼저 차야겠구나 깨닫기도 했다
나는 서울, 오빠는 인천에 살고있기에
일때문에 바빠 조카를 자주 가보지 못할때면
오빠에게 미친듯이 문자를 보내기도 한다
"조카 사진"
"사진주셈"
"사진을 내놓지 않으면 구어먹으리"
"사진을 주세요"
"사진 주지 않을래?"
"사진 좀 내놔라"
"사진을 주시지?"
이런 문자를 1초 간격으로 보내면 마지못해 사진 몇장과 함께 답장이 온다
"손가락이랑 작별하고 싶지 않으면 문자 그만보내라"
하지만 그따위 협박에 두려워할 내가 아니었다
사진 갯수가 성에 차지 않거나 흔들린 사진이면 가차없이 문자폭탄을 날린다
"사진 다시"
"잘나온걸로"
"얼굴나온걸로"
"콧물 안흘리는 사진은 없어?"
"발가락 빨고있는 사진말고"
"응가하느라 힘주는 사진밖에 없는거지?"
"사진 다시내놔라"
"손가락이 없으면 발가락으로 보낼 수 있거든 후후 애송이녀석아"
그럼 다시 사진 몇장이 돌아오고 마지막 답장과 함께 나는 차단의 대상이 되곤한다
"오늘 똥눌때 니 동구녕 자세히 봐바.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니 나이가 거기 껴있는 것 같으니까"
그랬다
조카 앞에서는 등신이 되는 나는
나잇값 못하는 고모
언젠가 지나가는말로
"고모 말고 언니라고 불러야돼 조카야~ 왜냐면 액면가로는 내가 너희아빠 딸같으니까 호호호호호호"
라고 했다가 그걸 오빠가 듣고는
정말 말그대로 개한심한 표정을 짓더니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얘 태어날때부터 또라이였어?"
"어아니"
엄마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추임새를 넣고 급히 자리를 피하셨다
오늘도 조카등신에서 한발짝 나아가 조카상등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나
좋은 고모가 되는 길은 험난하지만 참으로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