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는 무섭다
예전에는 커피가 무서운 줄 몰랐다
내게 커피는 그저
달달하고 입냄새나는 목구녕 뜨거운 마실거리 정도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국딩3학년 시절 커피가 어떻게 만들어지나 궁금한 마음에
혼자 동네에 있는 형님식품 회사에 찾아가 견학을 시켜달라고 했다가
관리하시는 직원분이 이곳은 커피를 직접 만들지는 않으니 구경할 것이 없다며
꼬꼬마가 커피를 마시는 것은 몸에 좋지않으니
커피우유 몇개를 챙겨주시며 친절한 웃음으로 배웅해주셨다
그후로 나는 왠지 커피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점점 발전하고 세계는 넓어지고
바야흐로 믹스커피의 세상이 도래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이토록 손발이 편한 커피라니
이제부턴 엄마의 커피둘 프림 하나 설탕 하나와
아빠의 커피둘 프림둘 설탕둘을 각기 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후 난 커피도 마시지 못하면서
회사에 비치된 공짜 음료가 그것밖에 없어서
(그때만해도 녹차의 참맛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녀자였다)
버릇처럼 하루에 한두잔씩 타마시며 농땡이를 부리곤 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딱히 쉴 명분이 없는 계약직이었던 내게
믹스커피를 타먹는 시간은 꿀같은 휴식이었다
그때 내 모습은 마치
군대에서 작업 도중 쉬기 위해
생전 피워보지 않은 담배를 억지로 입에 무는 일병 모습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때 처음 느꼈다
무언가 속에서 꾸물꾸물 움직이며 내 항문을 자극하는 기분을.
커피를 마시고 난 후에는 항상 마음과 몸이 편치 않았다
지금까지도 변비로 33년째 고군분투하는 내게
유일하게 항문개방시간이 된 시기이기도 했다
우르르쾅쾅
태풍 100000호가 와도 허락되지 않을
내 안의 소용돌이는 12049275812475872149143번이나 계속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대신 담배를 피우는 것이 더 나을뻔했다
하지만 원체 몸이 둔한 나는 그때까지도
커피가 내 몸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커피를 마시면 응아가 잘 나오는구나...정도로만 생각하며
내 몸이 허락한 유일한 변비약이라 생각해 믹스커피를 종종 애용했을 뿐
그러다 진짜 커피를 만나게 됐다
염소똥 같은 커피콩을 갈아내려 진짜 커피를 마시는 게 일반화 됐을 때
아메리카노라는 것을 마셔봐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나름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기에
패피답게 갈비뼈까지오는 늑골팬츠를 입고 도도한 발걸음으로
홀로 사색을 즐기기 위해 자주 가는 홍대 커피숖으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 패피답게 엣지있는 말투로
"코휘요. 프림이랑 설탕빼고 알쥬?" 라고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알아먹지 못할 책 한권을 눈으로만 훑고 있었다
잘생긴 직원분이 커피를 갖다주셨고
나는 꼬아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우겨 반대편으로 넘기고
한손으론 턱밑을 한손으론 커피잔을 들고
김첨지 마누라 설렁탕 마시듯 후룩후룩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그렇게 한잔을 모두 비웠다
아 이것이 어른의 맛인가...!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설탕이나 다시다, 미원이 첨가되지 않은 까만 국물 그대로를 즐기는 모습이라니. 후훗.
평온해진 마음으로 자신있게 '리필'을 외친 후
나는 응급실에 실려갔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고
속이 쓰륵쓰륵한 것이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아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구토와 설사를 반복했다
늑골바지때문에 잘 내려오지 않는 바지를 울부짖으며 겨우 내려
묽은 응아를 하기를 수차례
끝내 희미해져가는 의식을 붙들고
영화 친구에서 나오는 약쟁이 유오성처럼 손을 부들부들거리며
가까이 있는 친한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나...나...구급차 하나만 뽑아줘 언니"를 외치곤 커피숍 테이블에 널브러졌다
황급히 달려온 친한 언니는
가게때문에 나를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그 근처 나와도 친한 다른 가게 사장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까스로 다른차에 옮겨탄 나는 어디가 아프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오빠는 내게 이것저것 묻는대신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까만 비닐봉다리를 내 두 귀에 걸어주고
미친듯이 운전을 해 연대세브란스 응급실로 달렸다
응급실로 가는 10분...
그 시간동안 나는 내 귀에 걸려있던 까만 비닐봉지 한장을 가득 채웠다
우여곡절끝에 도착한 응급실에서도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로 뛰쳐가 계속 구토를 했고
심장이 머리로 옮겨간 것인지
관자놀이가 미친듯이 욱씬욱씬 쿵쿵쿵 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의사선생님한테 내 상태를 전달했고
뇌 ct를 찍고 수액을 맞은 후에야 내 상태는 겨우 진정됐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내 직업을 듣고는 급성 스트레스 인것 같다고만 말했다
그사이 엄마를 불러 15만원의 병원비를 내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혹시 커피때문인가?" 라는 의심은 있었지만
확증이 없었기에 그냥 컨디션이 좋지 않았나보다 정도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설마 커피때문이겠어? 라고 생각하며
다시 늑골바지를 입고 동네 커피숍으로 향했다
패기넘치게 콜롬비아 원두를 갈아만든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반쯤 마셨을까
내 심장은 다시 관자놀이에서 뛰기 시작했고
화장실에서 위아래로 쏟아내기를 수차례
결국 다시 병원으로 가야했다
그 후로 나는 절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옛날에는 호환마마가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지금 내게 가장 무서운 것은 아메리카노와 비둘기, 내 얼굴보고 침뱉는 소리뿐.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색을 즐기는 것은 내게 더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술을 겸하는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게 됐다
커피대신 맥주나 글라스 와인, 보드카 한잔을 시켜놓고 사색을 즐길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술고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