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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전공자들이 쓰는 말 중에 일반인들은 알아듣기 어려운 용어들이 간혹 있다. '허무인'이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소송법상 판결 편취 같은 사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용어인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부분과 관련하여 범인 역 김대명의 소개를 범인의 이름 대신 '용감한 시민'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7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범인이 '용감한 시민'이라는 허무인으로 가공되어 있는 것이다. 누가 이 용감한 시민을 가공해냈을까? 그렇다. 그는 언론이 만들어낸 허무인이다.
이 허무인은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다. 그는 소설가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 량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그치지 않고 대중의 존경을 받는 진짜 량첸 대령으로까지 성장해버렸다. 그는 자신을 찾아낸 허무혁(조정석)에게 단순한 살인범으로서가 아니라 위대한 량첸 대령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너도 나 때문에 승진하고 연봉 오르지 않았느냐. 내가 량첸으로서 죽어야 네가 주장하던 거짓들이 모두 진실이 되지 않느냐"라는 외침에 허무혁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허무인 량첸 그리고 기자 허무혁. 허무인과 허무혁... 그들은 이제 말장난처럼 이름만 비슷한 사이가 아니다. 허무혁이 존경받는 살인자 량첸을 만드는 동안, 허무인 량첸은 존경받는 특종기자 허무혁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 같은 사이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 폐건물에서 기자 허무혁과 범인 허무인이 뒤엉켜 싸운 장면을 떠올려보자. 어쩐지 누가 허무인이고 누가 허무혁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비닐을 찢고 깨어난 서두호(희생양)의 눈앞에서, 칼을 든 허무혁이 허무인을 노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마지막 격투씬은 무고한 희생자 서두호를 구하려는 기자로서의 양심과 달콤하게 가공된 진실을 지키기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추악한 살인자의 내면 간의 싸움을 물리적으로 표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누가 범인 같은가? 허무혁의 집에서 신문지에 둘둘 말린 칼이 발견되는 결말 부분은 허무혁이 허무인이고 허무인이 허무혁이라는 암시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딸의 친자확인서를 태워버리는 장면이 쐐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허무혁은 이제 진실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국장의 대사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 이기 때문이다. 부정하게 잉태된 씨앗도 내가 깨끗하다고 믿으면 정정당당한 내 새끼가 될 수 있다. 달콤하게 가공된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는 허무혁은 이제 기자가 아니라 허무인 량첸이다. 무고한 희생자를 만든 것은 살인범의 칼이 아니라 언론의 혓바닥이라는 뜻이다.
이제 좀 납뜩이 가나 납뜩이?
ps1. 인상 깊었던 장면
범인이 최초 살인을 행한 곳에서 자살할 것이라는 암시를 남겨 경찰들과 기자들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는 장면이 있었죠. 하지만 정작 자신은 거기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농락하는 그 장소가 낚시터라니ㅋㅋ 경찰과 기자 그리고 관객들까지 낚아버리는 감독님의 재치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ps2. 영화의 맥락상 량첸살인기라는 소설 자체가 실존하는 소설이 아닌줄 알았습니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허위사실을 진실로 가공해 관객들이 믿게 만든다면 이 영화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마케팅 포인트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아래쪽 링크를 보니 진짜 발간된 적 있는 소설인가 보더라구요. 저도 이제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네요ㅋㅋ http://dongkuk29.blog.me/220456358939
스릴러의 긴장감과 재치넘치는 코미디가 적절히 버무려진 특종 량첸살인기 추천드릴게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