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받자 여자가 물었다.
"당신은 남편에 대해 얼마나 알고있나요?"
어둠이 깃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네? 누구시죠?"
"당신 남편의 실체를 아는 사람이에요."
연이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맥박이 빨라지고 입 안이 말랐다. 뱃속에서 태아가 진저리치듯 꿈틀거렸다.
"그이와 만나는 사이인가요?"
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런 한가한 이야기라면 좋겠네요."
"그럼 무슨 이야기죠?"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아요. 나는 당신의 짐작에 확신을 실어주려는 것뿐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만 끊을게요."
"당신을 언제나 은밀하게 괴롭히던 느낌, 가장 행복할 때조차 마음에 그늘을 드리던 생각. 그걸 확인해 봐요."
연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손끝의 살점은 이미 벗겨져 조금만 건드려도 피가 맺혔다.
1년 전, 남편과 처음 사귀게 된 날을 떠올렸다. 이틀 동안 두 사람은 우연히 몇 번이나 마주쳤고 남편의 대시로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는 상냥하고 듬직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커서는 친구와 애인들에게 버림받은 연이는 그런 사랑이 자신의 인생에도 준비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고맙게도 그는 그녀의 신상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고, 그녀도 그의 그런 것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함께 있는 순간만을 생각했다.
사귀기 시작한지 한달만에 임신한 것을 안 연이는 두려웠다. 뱃속의 태아가 지난번처럼 또 애인을 떠나보낸다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임신 사실을 안 남편은 무척 기뻐했고 두 사람만의 로맨틱한 결혼식을 치렀다. 돌아보면 잘 짜인 드라마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연이에게는 금지된 그림자 같은 영역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단지 느낌이었다. 한밤중에 일어나보면 옆자리가 빈 때가 많았다. 새벽 서재의 닫힌 문에서 새어나오던 불빛을, 가끔 길을 잃은듯한 남편의 표정을 연이는 모른척했다. 연이는 드라마를 지키고 싶었다.
태아가 꿈틀 움직였다. 태동이 있을 때마다 연이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태아는 마치 무엇을 경고하는듯했다. 연이는 배를 쓰다듬었다. 아마도 별일이 아닐 거라고 연이는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림자를 걷어내고 싶었다. 연이는 남편의 서재로 향했다.
연이는 자기가 확인해야할 남편의 물건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거침없는 손길로 책장의 책 몇 권을 치우니 벽에 세워진 납작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이는 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상자에는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었다. 상자를 지키는 것은 연이의 두려움이었다. 테이블 위의 스탠드를 켰다. 빛을 받은 상자가 책상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상자를 열었다. 내용물을 목격한 연이는 숨이 멎었다.
상자 안에는 수십 장의 작은 지퍼백이 들어있었다. 연이는 떨리는 손으로 지퍼백을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각 지퍼백 안에는 폴라로이드 인물 사진과 그 인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손톱 조각이 담겨있었다. 손톱은 통째로 뽑힌 것 같지는 않았지만 크게 잘려 살점과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내가 다 설명할게."
등 뒤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렇게 소리 없이 다가와 놀라게 하곤 했다. 연이는 몸속의 모든 피가 머리카락을 통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사람들 당신이 죽인 거야?"
연이는 자기 목소리가 아득히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순간이 현실 같지 않았다. 테이블을 붙잡은 채로 겨우 몸을 가눌 뿐이었다.
"아니야,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나는 단지.."
남편이 긴 숨을 내뱉었다.
"손톱이 필요해. 손톱이 있어야만 흥분할 수 있어. 그래서 사람을 기절시키고 손톱만 잘라 온 거야. 맹세코 살인은 하지 않았어. 나도 이런 내가 혐오스러워.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 상담도 받고 있어. 곧 우리 아기도 태어날 거잖아."
연이는 강한 현기증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테이블 위의 상자가 떨어져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졌다. 연이는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외면했다
"이, 일단 이것 좀 내 눈앞에서 치워줘."
연이는 배를 끌어안고 심호흡했다. 배가 살살 아프고 구역질이 났다. 태아가 버둥거리며 아래로 비집고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남편은 연이를 등지고 허둥지둥 지퍼백들을 주웠다. 그때였다. 한 장의 지퍼백이 연이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저건 뭐야? 저건 당신 사진이잖아."
방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보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천천히 일어나는 남편의 등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었다.
"뭐, 어차피 만삭이니 상관 없긴 하지만."
남편이 몸을 돌려 연이를 마주봤다.
"말했듯이 나는 인간을 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특히 당신에 관해서는 최대한 평화적으로 처리하고 싶었다는 것만 알아줘."
연이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누구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연이는 전기 코드를 힘껏 잡아당겼다. 테이블 위의 스탠드가 남편을 향해 날아갔다. 불꽃이 튀고 남편이 머리를 감싸 안았다. 연이는 일어나서 현관으로 달려갔다. 잠금장치를 푸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남편이 연이의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부딪힌 연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깨지는 듯한 복부의 통증에 연이는 깨어났다. 눈을 뜨자 침대에 누워있었다. 양 손이 결박돼 움직일 수 없었다.
"이렇게 되기를 원한 건 아니었어."
연이의 다리 사이에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이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지만 커다란 배 때문에 하반신 쪽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복부에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미 침대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미안해. 내가 살려면 어쩔 수가 없어."
남편이 말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야. 인간의 손톱을 먹고 그의 형태를 빌리며 살아가는 괴물이야."
남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맨 처음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몇 살 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한, 늘 이렇게 살았어. 그러다 처음으로 나와 같은 종족을 만났어. 그 친구가 갓 태어난 인간의 손톱을 먹으면 나도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알려줬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 친구도 그 방법으로 인간이 됐거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아기를 낳으면 그 손톱만 가지고 떠날 계획이었어. 그 친구가 날 보살펴준다고 했어. 아무도 다칠 필요가 없었는데."
연이는 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발 날 병원에 데려다 줘. 아기가 나오려고 해."
연이가 말했다.
"그건 안 돼. 인간들이 나를 잡아서 생체실험을 할 거야.“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을게 제발 부탁이야.”
“역시 내 말을 못 믿는 거지?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
남편이 지퍼백 한 장을 열어 안에 담긴 사진을 연이의 배 위로 던졌다. 젊은 여자의 사진이었다.
"잘 봐."
남편이 손톱을 들어보였다. 분홍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톱은 피로 얼룩져있었다. 남편이 손톱을 입에 넣고 씹었다.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남편의 목젖이 위 아래로 흔들렸다. 연이는 진통을 잊은 채 남편을 바라봤다.
"자, 보라고."
남편이 얼굴을 들이 밀었다. 연이는 공포에 질려 고개를 저었다. 남편은 화장대로 뛰어가 거울을 바라봤다.
"이제 날 믿겠어?"
남편이 손가락으로 거울을 두드렸다.
거울에 비친 것은 변함없이 남편의 모습이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핏줄 선 눈에 어린 광기 뿐.
또 다시 진통이 찾아왔다. 연이는 비명을 질렀다. 미치광이 남편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 친구가 왔어."
남편이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전화 받자마자 왔어. 무슨 일이야?"
익숙한 목소리. 전화를 건 여자의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죽여야겠어."
남편이 말했다.
"진정하고 일단 이 물 좀 마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녀는 어디에 있지?"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연이를 살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연이의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아기 머리가 보여요. 이대로 있다가는 둘 다 죽을지도 몰라. 다음 진통이 오면 죽기 살기로 힘 줘요. 진통이 오나요? 지금이에요. 힘!"
연이는 눈을 질끈 감고 힘을 줬다. 눈앞에서 불꽃이 번쩍거렸다. 여자의 능숙한 지시에 따라 연이는 힘을 주고 또 줬다. 더 이상 짜낼 힘도 남지 않았을 때 뭔가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연이는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남편이 비틀거리며 들어와 아기를 받아 안으려고 팔을 뻗었다. 여자는 아기를 안은 채 뒤로 물러났다. 남편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그는 똑바로 서려고 애쓰다가 결국 쓰러졌다.
"너무 소란해서."
여자가 남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걱정 말아요. 죽은 건 아니니까."
여자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누구죠?"
연이가 물었다.
"당신 남편은 내 환자야. 증상이 많이 나아졌는데 역시 위기상황에서는 버티지 못하는 구나."
여자가 웃었다.
"어릴 때는 이식증, 그리고 트라우마로 인한 해리, 추가로 조현병까지. 정말 재미있는 케이스였는데 환각증상이 점점 나아지니까 지루하더라고. 그래서 망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본인의 사진과 내 손톱을 줬지. 동시에 당신을 등장 시켰고. 거기까진 재미있었는데 이후로 몇 달은 너무 심심해서 힘들었어."
연이는 여자를 노려봤다.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뭐죠?"
"너무 심심했다니까."
"우린 심심풀이 꼭두각시가 아니야!"
"오버 하지 마. 내가 누굴 죽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새 생명이 탄생했잖아.“
여자가 아기를 연이 가슴팍에 얹었다. 아기는 축 늘어져서 겨우 호흡하고 있었다.
“이제 난 갈게. 너희 재미없어졌거든."
"잠깐, 이렇게 해놓고 가버리면 어떡하라고?"
떠나는 여자의 등에 연이가 외쳤다.
"꼭두각시가 아니라며."
방문이 닫혔다.
작가의 한마디 : 검증 안 된 야매 상담센터들이 급증하고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환각, 망상 등의 증상은 센터가 아니라 병원으로 먼저 가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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