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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기능과 능력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라서 지성적이요, 그만큼 지적 능력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흔히 듣는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 없이’ 말하고, ‘생각 없이’ 행동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 동물(human machine)’처럼 움직이게 됩니다.
사람들 가운데서도 5번 유형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더라도, 자기가 해야 할 것에 대하여 충분히 알아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또 생각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이를테면, 글을 읽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 언니나 오빠 또는 부모나 다른 어른들에게 자꾸 질문을 합니다. ‘질문쟁이’입니다. 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을 많이 읽습니다.
5번 유형은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머지 지식의 함정에 잘 빠집니다. 남 보기에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비쳐지는 경우라도 그들 스스로는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이런 습성 때문에 어릴 적부터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서 속담에서처럼 “돌다리도 두드리고 (잘 안) 지나갑니다.”
자연히 많은 것을 알아야 하고, 생각도 많이 해야 하는 속성이 강해지다보면 분석적인 특성이 강화됩니다. 어릴 때부터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알아야 하고 고민하다보니,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빠져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뭔가 텅 빈 느낌 같은 것을 피할 수 있는 만큼 피하려 합니다. 공허감을 기피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식이거나 물질이거나 잘 내어놓지 못합니다. 텅 비게 되는 것이 싫어서입니다.
5번 유형의 격정은 그래서 인색으로 나타납니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들 가운데서도 지식을 전달하는데 인색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강의 준비도 소홀하거나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알고 보면 자신을 위해서는 책도 많이 보고 공부도 많이 합니다. 다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허를 기피하려는 속성 때문에 남에게 내주는 것을 잘 못할 뿐입니다.
이런 속성 때문에 이들은 지식 뿐 아니라 시간이나 물질을 남에게 내주는 것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성향이 강해지면 인색이 탐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뭔가 내놓기 싫어하는 쪽과 또 뭔가 가득 채워야 직성이 풀리는 쪽으로 기울다보면 좀 더 채우려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색과 탐욕은 양쪽 날개처럼 또는 두 수레바퀴처럼 나란히 서게 됩니다. 이쯤 되면 생각은 많아도 몸을 움직이거나 행동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에니어그램을 살피면서 누구나 알게 되는 진실이 있습니다. 만 3세로부터 6세 사이에 성격 유형이 결정되는 시기에 어떤 환경에서 자라며 어떤 인간관계 속에서 살았는가 그리고 부모와의 사이에서 어떻게 애정을 경험하고 표현했던가 하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이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5번 유형은 특히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특징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개 어린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또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그런데 5번 유형의 속성이 강화되면서 이들은 양친 부모와 양가적 관계에서 자라납니다. 이를테면, 부모 두 분 가운데 어느 한 쪽에 대해서가 아니라 양쪽 모두에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는 엇갈림을 경험하며 자랍니다.
그래서 5번 유형은 양친 부모를 살피고, 가정의 분위기나 환경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관찰의 필요성은 자연히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환경을 이해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강렬하게 요청되는 속에는 환경에 압도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본적 공포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낯선 환경에 처하면 선뜻 발을 들여놓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런 속성은 대인 관계 속에서도 신중함으로 잘 나타납니다. 때로는 이 정도를 넘어서서,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 내용을 분석하며 생각하는 모습이 역력히 나타나기도 합니다. 남을 어렵게 만들거나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도, 바로 그 분석적인 태도 때문에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들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심지어 아는 것은 많으면서도 행동은 하지 않는다는 비난도 듣게 됩니다.
5번 유형은 이처럼 아는 것 많고 생각이 많은 것 때문에 감지력이나 지각이 예민하고, 분석적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남의 말에 대하여 냉소적입니다. 그리고 괴팍스러운 인상을 남기기가 쉽고, 지나치면 외곬으로 빠져들며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5번 유형도 격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다루는 법을 익히면, 자신의 격정 속에 있는 최상의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5번 유형은 격정이 인색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남에게 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낭비는 모릅니다. 속으로 간직하려는 속성 때문에 나서는 일이나 단체에 소속하는 일 같은 것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참된 지식을 소중히 여기면서 섭리를 따라 살겠다는 결단을 하고 나서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해집니다.
5번 유형이 초연한 마음으로 살면서 건강해지면 자신이 지닌 풍부한 지식과 깊은 생각으로 남에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러면 주변의 사람들이나 세상을 깊이 이해하며 특유의 지혜와 통찰력을 가지고 도울 수 있습니다. 탁월한 지각과 통찰력을 가지고 행동하며 리더쉽을 발휘하게 될 때,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격 발달 단계를 살피자면 누구나 변화과정을 끊임없이 오르내립니다. 5번 유형은 특히 생각과 관찰과 지식이 남달리 강한 만큼, 건강과 통합을 지향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기울이지 않으면, 특유의 속성 때문에 행동은 안하고 지식에만 빠져들 가능성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건강과 퇴화의 방향으로 떠밀려 내려가기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고립되고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산만해지거나 경박해지거나 히스테리칼해지기도 합니다.
5번 유형은 그러므로 어떤 행동을 하려고 나서기 전에라도 평소에 몸을 움직이는 노력부터 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유의 지식과 통찰력으로 에니어그램의 진실을 격언처럼 표현한 말로서 “에니어그램은 영원한 운동성(Enne- agram is perpetual motion)”을 화두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곧 지식의 표현으로서의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 지성’, 이는 바로 건강한 5번 유형의 행동 양식과 생활 방식을 두고 할 수 있는 좋은 말입니다. 특히 “모든 것을 이해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된다”라는 격언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게 됩니다. 지식 때문에 동떨어져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동정심과 관용을 베푸는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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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창세기 12 :1
특히 파워 에니어그램의 관점에서 보면, 격정이 가장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 그것을 두고 종교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죄’라 일컫는다. 이른바 ‘죽음에의 본능’에 사로잡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말해서 가장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 ‘생명에의 본능’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 에너지와 생동감이 넘치고 생명력이 왕성해진다. 이런 만큼 격정은 우리가 사로잡으면, 거기서 엄청난 잠재력이 표출되고 에너지가 솟구치기 때문에 파워 에니어그램을 갖추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5번 유형의 파워 에니어그램은 인색과 초연의 함수관계에서 풀어 볼 수 있다. 그 핵심은 과거나 특히 실패했던 경험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면서 충실하는 것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특성이 주로 관찰, 생각, 지식, 분석 등으로 나타난다. 하나하나가 참으로 소중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격정에 사로잡히면, 관찰을 하되, 객관적인 관찰이 아니라 주관적인 관찰에 치우치게 되면, 결과는 그리 바람직스럽지 못하게 된다. 편견과 오해가 생기거나, 옹고집을 부리게 될 수도 있다.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진다.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능력인가? 그러나 생각을 위한 생각에서 멈추거나 맴돌 때, 늪에 빠지듯 한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지식을 더 얻어야만 된다는 유혹을 못 이기거나 함정에 빠지면, 남이 보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지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직 모자라’하면서, 행동을 미루고 더 지식을 가지려 하면 회의나 냉소주의나 ‘지적 허위성’intellectual falsehood 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5번 유형은 스스로 ‘자아 인색’ ego-stinginess 또는 ‘자아 탐욕’ ego-avarice에 빠져서 생각은 많고, 지식은 많으나 행동을 계속하여 미루거나 유보하는 결과에 빠진다. 9번 유형이 마음먹기까지가 힘이 들고, 미루다가도, 한번 생각을 굳히고 결단만 하면, 그동안 미루었던 일도 그야말로 ‘순식간에 뚝딱’ 해치운다고 할 정도로 행동한다. 여기에 비하여, 5번 유형은 많은 생각과 관찰과 분석 끝에, 결심하고, 결단했으면서도, 행동을 미룬다. 그래서 정신 의학자들이 9번 유형의 속성을 일컬어 ‘정신-심리적 나태’ psycho-spiritual sloth/inertia 라 하는데 비하여 5번 유형의 속성을 두고 ‘행동의 유보 또는 지연’ postponement of action이라 한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공허’emptiness 를 기피한다. 여기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웬만큼 채워졌으면서도, 아직 더 채워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 ‘현재’ 아는 것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유보하거나 뒤로 미루게 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반 씩이나’ 채워졌는데도, ‘반 밖에’ 채워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더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분석하고, 뭐든지 ‘더 많이’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인색과 탐욕의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이런 과정에서 에너지는 속에서 계속해 소모되는데, 여기에 비하여,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으니까, 행동은 지연되거나 유보된다. ‘불완전 연소’의 대표적 경우라 할 만 하다. 어려서부터 양친 부모에 대하여 양가적으로, 싫고 좋고, 사랑을 느끼면서도 그리 편하지 못한 엇갈린 상태에서 성장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5번 유형들은 본능적으로 부모를 늘 살피고 생각하던 습관이 모든 일에 적용되면서, 관찰과 생각과 분석이 습성화되었다. 이것이 계속되면서 ‘무의식적 언행’ automatism으로 이어지면서 5번 유형의 격정과 함께 성격이 형성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생각할 때, 5번 유형이 자기 이외의 사람들이나 그들과의 관계나 환경에 대하여 늘 살피던 습성으로 인하여 환경에 대하여 민감해졌고, 그 결과로 환경이나 관계 때문에 압도당할까봐 두려워한다. 더욱이 긍정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나 환경에 접근하는 것이 힘들고 불편하기가 쉽다. 이런 성향 때문에, 여행을 별로 반기지 않고, 낱선 곳에 가기가 쉽지 않다. 혼자서 여행하다보면, 자신이 불편한 환경이나 장소는 피하면 그만인데, 여러 사람과 함께 움직이다 보면, 돌출 행동으로 비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 환경에 압도당하는 불편을 느끼게 된다. 이런 모든 과정에서 남들은 별 불편을 모르고 행동하는데 비하여, 자신은 불편하거나 심지어 숨 막힐 것 같은 느낌을 갖는데, 에너지는 상당히 소모된다. 따라서 행동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동하기 위하여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5번 유형의 유보적인 지향성 retentive orientation을 거스르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격정의 속성을 벗어날 때 5번 유형의 잠재력은 발현된다. 안 그러면 물건이나 감정이나 생각이나, 어떤 것이라도 속에 담고 있으려고만 하지 내놓지 않으려 한다. 이렇듯이 많이 생각하는 5번 유형이 행동을 유보하다가 회피하면 결국 관계도 회피하게 된다. 그래서 ‘외딴 섬’이 된다. 결과적으로 고립되어 혼자 있으면, 더욱 행동은 안 하게 된다. 이럴 경우에는, 심지어, 꼭 버려야 할 것까지도 안 버리게 된다. ‘불완전 연소’의 계속으로 내연기관의 고장이 나듯이, 생각도 감정도 불안정하게 될 수도 있다. ‘기운 빠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5번 유형이 자기의 특성인 관찰과 생각과 분석을 통하여 이와 같은 격정을 잘 파악하고 감지하면, 고립과 후퇴와 분리를 변환시켜서 자기 정체성과 신중한 분별과 초연한 자세를 돋보이게 살릴 수 있다. 자기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깊이 이해함과 동시에 객관적 의식을 가지고 주변 사정과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면서도 심오하게 간파하게 될 때, 5번 유형의 잠재력은 탁월한 분별력과 함께 지도력으로 나타난다. 자기기억과 자기관찰을 자기의 격정을 파악하는데 집중적으로 활용하면, 5번 유형은 먼저 자신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고 초연하게 행동한다. 주변 환경에 두려움을 막연하게 느끼며 자신을 고립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거부하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의심하며, 적대시하거나 남의 정상적 상태도 모멸하면서, 자기 자신은 부적격자로 이해하던 성향을 떨쳐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어둔 파괴적인 환상을 깨고 자신의 인생은 리얼리티에 기초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행동에 나선다. 의도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운동에서 시작하여 외모도 가꾸고, 행동에도 역점을 두고 생활하기 시작한다. 남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주고, 관계도 먼저 나서서 맺기 시작한다. 후퇴와 분리를 초연함 detachment으로 변환시키기만 하면, 탁월한 지각과 분별에다 행동을 덧붙여서 에너지가 넘치는 지도자의 파워 에니어그램을 살리게 된다. 건강한 5번 유형이 ‘행동하는 양심’ ‘실천하는 지성’으로 인정받는 길이 여기에 있다. |
본디 뭔가 자신이 답답하게 느끼게 만들거나 압도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느끼는 #5번 유형은 어느 틀 속에 갇히는 듯한 느낌 때문에, 처음에는 에니어그램 공부가 그리 편하지가 않다. 어려서부터 궁금증이 많아서 관찰과 생각과 질문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5번은 남이 보기에는 충분히 알거나 많이 안다는 인상을 줄지라도, 본인은 스스로 ‘아직 모자라’ 하면서 탐구를 계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특징이 #5번 유형에게는 유혹이 되거나 ‘함정’이 되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기에, 끊임없이 지식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언제나 가득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보니, 뭔가 채우는 것은 잘하는 반면에 비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성향이 강해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격정이 ‘인색’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에 양친 부모의 사랑을 받기는 하였으나, 양가적 ambivalent이라 할 만큼 엇갈린 감정을 갖고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왠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사랑은 모름지기 ‘눈높이 사랑’이어야 하고 ‘맞춤형 사랑’이어야 하는 법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어린 자녀의 입장에서 그 사랑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양가적인 관계나 오리엔테이션이 되기 쉽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나이 차이가 크든가, 자녀들이 많아서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만 거리감이 있거나 부족감이 있을 때, 어린 자녀는 자연히 형제들과 또는 또래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못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 그럴까?’ 묻고, 생각하고 관찰하는 습성이 길러진다.
자연히 관찰과 사색과 회의가 강화된다. 그런 만큼 분석력과 이해력이 커지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지식과 생각과 행동 사이의 역학에 있어서 ‘필요 충분 조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아홉가지 유형 가운데서 9번 유형은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미루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단 마음만 먹으면 후딱 해치우는 사람들이다. 여기 비하여 5번 유형들은 생각을 충분히 하고 나서 결정을 한 뒤에도, 역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미루기 잘하는 사람들이다.
5번 유형이 자기 자신의 지식과 이해를 근거로 해서 움직이려면, 그만큼 신중할 수밖에 없으나, 섭리를 따라 살기로 마음먹고 나서면,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한’ 자세로 살게 된다. 그러면 많은 지식과 깊은 이해와 지혜를 바탕으로 해서 행동하기에 이르면, 멋진 리더쉽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인색한 데서 초연한 데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연속태에 따라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5번 유형이 공허감을 기피하며 인색이란 격정에 사로잡혀 불건강하거나 미숙할 때, 6번 날개가 펼쳐진 사람은 남을 신뢰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잘 믿지 못한다. 여기 비하여 4번 날개가 활동적인 5번 유형은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로 빠진다. 평균 상태의 5번이 6번 날개가 활동적이면 봉쇄된 듯이 갇힌 상태로 산다. 그래서 ‘외딴섬’ 같이 되기 십상이다. 4번 날개가 펼쳐진 사람은 조심스럽고 섬세해진다. 그러나 건강하고 성숙하게 되었을 때 초연하게 섭리를 따라 살려는 5번 유형이 6번 날개를 쓰는 쓸 때 부지런해지고 활동적인 사람이 된다. 4번 날개가 펼쳐진 사람은 영감이 풍부하고 감동적인 사람이 된다. 그래서 건강한 5번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볼 때, 5번 유형은 자기보존 본능이 강한 편이다. 나의 집, 나의 성, 나의 은신처 같은 것에 대한 관심이 높다. 집은 공격적인 외부 세계로부터 안전한 피난처다. 이는 독립적인 사생활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 부족감을 느낄 때 격정이 인색으로 작용한다.
5번 유형은 자신만의 세계를 가져야 하고 사적인 공간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편하다. 그러자니 책 속에 숨어 지내며 혼자 사는 것이 위안도 되고 취미도 된다. 방안에 아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방해받을까봐 지레 불편을 느낀다. 경제와 독립은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 여의치 않을 때 주요 방어 전략은 후퇴하는 것이다.
자기보존 본능이 강한 사람은 어떤 유형이라도 그렇듯이, 5번 유형의 경우도 성적 본능이 짝을 이루어 강한 편이다. 이성을 대하거나 친구를 대할 때에도 자신의 기본을 지키며 행여나 침해되거나 방해를 받는 일에 대하여 경계한다. 본디 회의적인 성향이 강한 5번 유형은 뭐래도 쉽게 믿지 못할 만큼 분석적이고 신중하고 관찰을 많이 하기 때문에 가까운 친구도 많을 수가 없고, 이성에 대해서는 이상형을 찾기 때문에 교제도 수월하지 못한 편이다.
그러나 성숙한 5번은 초연한 자세로 살기 때문에 스스로는 자신감을 갖고, 남에게는 깊은 신뢰를 지니는 사람이 되므로 친구나 애인을 사랑하면 순전한 지고의 사랑을 지닌다.
드물기는 하지만 5번 유형가운데 사회적 본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신념이 강하고 사회에 영향을 끼칠만한 근거를 찾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이런 영향력이 있는 개인이나 그룹과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 자연히 사회 동향이나 정세에 대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5번 유형들은 각 분야에서 분석가 analyst로 많이 활동한다.
이런 특성을 지닌 5번 유형은 지식과 관찰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게 된다. 이들의 내부 정보는 스스로에 대한 보호가 된다. 바깥 세상에 대한 정보수집과 교환 내지 공유는 외부로부터의 어떤 공격이나 압도적인 힘에 대한 방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토템 totem에 대한 관심이 높다. 거기서부터 상징적인 힘과 지식을 얻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본능이 강한 5번 유형은 자연히 자기보존 본능과 짝을 이루게 된다. 누구나 그렇듯이 본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미리 생각하고 살지 않기에, 5번 유형이 세가지 본능 가운데 자신에게 어떤 본능 두가지가 짝을 이루고 어느 한가지가 쳐지거나 약한가를 알게 되면, 누구보다 분석하고 관찰하며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세가지 본능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꾸준히 수련하면, 누구나 그럴 수 있겠으나, 특히 5번 특유의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조화된 본능을 가지고 나아가서 지성과 감성과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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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유형은 기분이나 생각과는 상관없이 먹는 성향이 있어서 책을 읽든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식사를 하면 거기서 눈을 떼지 않고 식사를 공격적으로 할 위험이 있다. 편하게 먹는 타입이라 배달 음식이나 뷔페를 즐긴다. 자연히 칼로리 같은 것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안 먹다가 많이 먹는 버릇이 생기면 위가 확장되는 경험도 하게 된다. 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식사를 조절하기 위하여 누구보다 생각해야 한다. 다른 생각은 잘 하는데 비하여 자기 몸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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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꿈쟁이 요셉
한 사람을 보면서 어느 한쪽 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흔히 요셉을 꿈쟁이라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7번 유형의 ‘꿈꾸는 사람’과 혼동하기가 매우 쉽다. 꿈이라는 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전혀 다른 모습이나 뜻을 발견할 수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에니어그램에서 말하는 꿈꾸는 사람은 이상주의자로서 꿈을 꾸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 많고 계획이 많아서 때로는 산만하고, 어지럽기까지한 사람을 두고 말한다. 누가 그런 사람에게 충고하려면 ‘꿈 깨’라고 말할 정도이다. 여기에 비하여 요셉을 꿈쟁이라고 부르는 데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요셉은 밤에 자다가 꿈을 꾼 이야기를 과시하면서 이야기하거나, 자신의 꿈뿐만 아니라 남이 꾼 꿈도 해석을 잘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현대 의학이나 심리학에서 과학으로 밝힌 바에 의하면, 건강한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보통 일곱 여덟 번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런데 특별히 요셉처럼 꿈쟁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여기에 비하여, 이들은 꿈을 잘 기억한다.
둘째, 이들은 꿈을 기억하며 그 뜻을 찾는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설령 꿈을 기억한다 하여도, 그 뜻을 모르거나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흔히 ‘개꿈’이라 하면서 지나친다.
셋째, 꿈을 기억하고 또 생각하면서 그 뜻을 찾는 사람들은 해몽, 즉 꿈을 해석하려 한다. 이런 일을 자주 되풀이하면서 관심을 집중하니까 남달리 해몽을 잘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평소에도 꿈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다. 자연히 분석이나 관찰, 해석을 잘하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어린 시절의 요셉은 자기가 꾼 꿈을 형들에게나 주변 사람들에게 해석을 곁들여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특징에 덧붙여서, 요셉은 형들과 어울리기보다는 동떨어져 있다. 형들과는 소원한 관계에 놓여 있다. 더욱이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창 37:2) 하였다. 자연히 관찰과 경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형제들과 나이 차이가 있는 것까지 겹치고 보면, 들에 함께 나가는 일도 뜨막해지기 십상이다. 결국 외딴섬 같이 된다.
이상과 같은 몇 가지 특징만 살펴봐도 요셉은 아홉 가지 에니어그램 성격 유형 가운데서 5번 유형에 가장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5번 유형은 어려서부터 관찰을 잘하고, 생각이 많고, 궁금증 또한 많아서 질문을 잘한다. 심리적으로 공허한 것을 기피하는 성향이 강하다. 머리든 주머니든 텅 비는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자연히 채워 넣으려는 경향이 강화된다.
늘 지식이라는 함정에 빠질 속성이 강하다. 아주 어려서부터 질문을 잘하는 어린이가 문자 해독을 하면서부터는 책을 많이 읽게 된다.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으로 지식을 얻지 못하니까 질문을 하게 된다. 사물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질문하기가 쉽지 않을 경우에도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으니까 관찰을 열심히 한다. 5번 유형은 그래서 자신이 속한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지식을 채우려는 욕망은 큰 데 비하여 텅 비는 것을 싫어하니까 자칫하면 인색해지기 쉽다. 5번 유형의 격정은 바로 인색이다.
2. 시련을 이기는 요셉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은 지식과 정보에 대한 욕망이 크다. 그들의 격정이 인색으로 잘 나타나는데, 이것이 발전하면 탐욕으로 나타난다. 본디 지식을 더 얻겠다는 함정에 빠져서 보다 더 많은 지식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습성이 지식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이면 물건이든 뭐든 채우려는 속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들은 남이 보기에는 충분히 알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충분히 알았다고 확신하기 전에는 잘 움직이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돌다리도 두들기고 안 지나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그러나 격정에 사로잡히거나 휘둘리는 경우가 아니면, 5번 유형은 매우 분석적이고 강력하게 현실에 개입하는 힘이 있다.
5번 유형은 늘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격정에 빠지지만 않으면, 상황이나 환경을 잘 이해하고 적응한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첫 번째로 만나는 극적인 장면은 형들의 죽일 음모로 웅덩이에 던져졌다가 대상들에게 팔려 이집트로 가게 된 것이다. 바로 임금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에게 팔려간 요셉은 그의 신임을 사서 빼어난 관리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요셉은 5번 유형이 시련을 극복하며 환경에 적응할 만큼 건강해질 때 드러내는 ‘지식이 풍부한 전문가’의 특징을 나타낸다. 보디발이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맡겨서 관리하게 하고, 자기의 먹을거리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창 39:6)고 할 만큼 두터운 신임을 받고, 전권을 위임받다시피 하였다.
보디발의 집사장으로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하게 된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학의 세계에서 ‘페드라 전승’이라고 일컫는 삼각관계의 사단이 벌어지게 된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 남편의 신임을 받는 요셉을 유혹하는 사건이 전개된다. 그래도 요셉은 ‘지각 있는 관찰자’로서 상황 판단을 날카롭게 하고, 그 유혹을 물리친다.
그러나 잘생기고 똑똑한 미남을 유혹하려다 실패한 보디발의 아내는 심한 모멸감을 느낀 나머지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결국 그녀의 모함을 받아 요셉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주께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돌보아 주시고, 그를 한결 같이 사랑하셔서, 간수장의 눈에 들게 하셨다’(창 39:21)고 기록될 만큼 요셉은 자신의 덕목을 잘 살리고 있다. 5번 유형은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겠다는 믿음과 결단으로 살기만 하면, 누구보다도 ‘초연한’ 영성을 지니게 된다.
5번 유형이 격정을 사로잡고 살 때 나타나듯이, 요셉은 역경 속에서도 자기를 에워쌌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사람들에게 폭행을 당하거나 압도당할 것을 두려워하던 공포를 이겨낸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사람들도 자신의 격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잊어버리거나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5번 유형인 요셉은 격정을 이겨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게 되니까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대등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보게 된다.
고향에 있을 때, 격정에 휘둘리면서 살던 때에는, 형들과도 동떨어져 살고, 그들과 자신을 대등한 관계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았던 요셉이 비교적 건강해지면서, 시련을 이겨내게 되니까 그만큼 초연하게 되고, 감옥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대등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성격은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엇갈려서 경험하고 부모와 동일시하거나 오리엔테이션이 되는 것도 양가적이다. 이를테면, 부모와 친한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느낀다. 양친 부모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애증 관계에 있다. 양친 부모처럼 되고 싶은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다는 말이다. 5번 유형은 대개 부모와 나이 차이가 많아서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양친 부모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느끼거나 경험하는 것이 뜨막할 수도 있다. 부모로서는 사랑한다 해도, 자녀가 그 사랑을 느끼고 경험하는 데 있어서 양가적일 수 있다. 속된 말로 ‘늙은이의 막내’같은 사람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아버지 야곱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로서 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요셉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창 37:3). 형들과 나이 차이가 많은 것도 그것을 말해준다. 또 다른 경우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녀를 사랑하는데, 어떤 이유에선가 서로 싸움을 자주 하면, 자녀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편이 될 수도 없고 어머니 편이 될 수 없어서, ‘엉덩이를 쑥 빼듯이’ 한 발 물러서서 관찰하게 된다. 이것이 습성이 되면서 5번 유형의 성격으로 형성되며 결정된다. 어떤 경우이든지 5번 유형은 양친 부모와 양가적인 관계에서 자라기 때문에 관찰하고 생각하고 분석하는 일이나 묻고 해석하는 노력을 일찍부터 많이 하게 된다. 요셉의 경우는 이런 속성과 성향을 많이 지니고 자랐다. 그러나 같은 범주의 5번 유형이라 할지라도 아버지가 ‘더 사랑하여서, 그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다’(창 37:3)고 하는 것을 미루어 보자면 요셉은 위험이나 곤경에 빠질 때 위축되는 5번의 특징을 드러내기보다는 건강한 5번의 면모를 보인다. 에니어그램의 4번, 5번, 9번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대개 평균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위축되기를 잘한다. 그러나 통합의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성숙한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오히려 독창적인 힘을 발휘한다.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뒤에, 보디발의 집에서 생긴 일이나 감옥에서 시종장의 꿈을 해석해주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서 5번 유형의 강한 에너지가 나타나는 것을 본다.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본다.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서 칠 년 가뭄의 위기를 극복하고 국난을 해결하고 백성을 살리는 요셉에게서 그야말로 위기관리자의 탁월한 능력을 보게 된다. 5번 유형은 지식과 생각이 많은 반면에, 지나치게 분석적인데다 조심성이 더하여 위축되면 몸이 무겁고 행동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음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건강한 상태에서 자신의 격정을 꽉 잡고 통합의 방향으로 가면, 8번 유형의 장점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누구에게 꿀릴까봐 전전긍긍하거나 배반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도 떨쳐버리고 소박한 지도자로서 남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닌 지식과 지혜와 분별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모두에게 봉사하는 자세로 나서게 된다. 우리는 ‘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이 생의 첫 번째 위기를 맞이한 때부터 강대국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숱한 어려움과 위기를 이겨낸 요셉에게서 선구자적인 비전을 본다. 이해심이 넓고, 지혜와 분별력이 높고, 지각 있는 사람으로서 상황 판단을 잘하고,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충만한 마음으로 남들을 지원하는 5번 유형의 진면모를 요셉에게서 확인한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모습이다. 4. 용서와 지혜의 요셉 흔히 5번 유형은 지식이란 함정에 빠지고 따라서 공허를 기피한다. 뭔가 텅 빈 상태를 못 견뎌한다. 그래서 뭔가를 내어놓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심리현상으로 보면, 자신이 잘못하였을 때에도 사과하기 힘들고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다. 자기 마음을 내어놓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5번 유형의 격정은 인색으로 잘 나타난다. 그러니까 5번 유형의 사람이 사과도 온당하게 잘하고, 남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그는 건강한 성격이라 생각된다. 용서는 풀어주는 것이고, 놓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서른 살에 이집트의 총리가 된(창 41:45) 요셉이 형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야말로 이산가족 재회의 감격을 가슴 속 깊이 묻어두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격정을 잘 붙들고 다스릴 수 있는가를 본다. 특히 ‘요셉이 통역을 세우고’(창 42:23) 형들과 이야기할 때, 간첩의 누명을 씌우고 막내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도록 하였을 때의 장면을 떠올린다. 르우벤을 비롯하여 자기 형들이 요셉이 못 알아들을 줄 알고, 자기네끼리 (요셉의)‘애원을 들어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벌을 받고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요셉은 듣다못해 ‘그들 앞에서 잠시 물러가서 울었다’(창 42:21-23)고 기록되어 있다. 5번 유형은 보통 때는 감정과는 거리가 있고 냉정하게 생각만 하는 사람이지만, 요셉의 경우처럼 감정이 풍부해지는 경우는 균형이 잡힌 상태라 할 수 있다. 막내 동생 베냐민은 한 어머니 라헬의 소생이기에, 그를 만난 요셉은 친동생과의 재회의 감격 때문에 ‘마구 치밀어 오르는 형제의 정을 누르지 못하여, 급히 울 곳을 찾아 자기의 방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울고, 얼굴을 씻고 도로 나와서, 그 정을 누르면서’(창 43:30-31) 밥상을 차리라는 둥 일 처리를 침착하게 해나간다. 드디어 ‘요셉은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고 나서 한참동안’ 울었다(창 45:1-2). 그리고 나서 오늘 우리가 봐도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담긴 이야기를 한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4-5). 5번 유형이 회개하고 변화하며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살겠다고 분별하고 결단할 때, 초연한 자세와 영성을 갖추게 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에니어그램 수련에 있어서 자신이 당한 고난을 ‘필요한 고난’으로 그리고 ‘자발적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살면서 그 고난을 대가로 지불하며 수련에 정진하는 사람만이 얻는 영성의 경지를 보여준다. 요셉은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으로서 형들에게 복수하는 대신에 위로하며 용서하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재확인한다. 구약에서 ‘고난 받는 종’의 주제를 제일 먼저 보여 주는 듯하다. 이미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이름을 지으면서 ‘고난’을 잊어버리게 하신 뜻과 ‘번성’하게 해 주신 섭리를 확인하였던 요셉이다(창 41:51-52). 형들을 용서하고, 함께 올라가 아버지를 다시 뵙고 재회의 감격을 맛본 요셉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형들을 안심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구원의 출애굽 사건을 비전으로 제시한다 |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도마 Thomas는 아람어 도마 T'oma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뜻은 쌍둥이이다. 그는 또한 디두모 Didymos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는데(요한 11:16), 이 또한 헬라어로 쌍둥이란 말이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진 도마는 차분하고 사색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들은 어릴 적부터 생각이 많은 편이다. 뭔가 알고 싶긴 한데,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자연히 질문도 많고, 관찰도 잘 한다. 정보와 지식을 많이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가능하면 읽을거리를 많이 구해서 읽는다. #5번 유형은 대체로 생각하는 사람, 또는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이해된다. 생각이 많은 까닭은 바르게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고 스스로 늘 다지며 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뭐든지 쉽게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하고, 살피고 또 살피며 분석하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인상을 풍기게 된다. 자기 스스로도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자연히 신중하게 된다. 공관복음서에는 도마라는 이름이 열두제자 명단에서만 단순히 언급된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보면 그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본문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복음서 가운데서도 특히 마가복음을 보면 열두 제자가 예수의 말씀에 엉뚱한 반응을 보이면서 ‘청맹과니’ 모티브 Blindness motif를 곧잘 드러낸다. 거기에 비하여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의 인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도마가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5번 유형은 차분하고 사색적인만큼 행동 면에서 비교적 약하거나 더딘 경향이 있다.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쪽이 강하며 분석적이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들기고 안 지나간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두들겨 본 소리를 또다시 분석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9번 유형과 비교하면, 생각을 미루고 결정을 유보하지만, #9번은 결정을 내리면 즉각 행동에 옮긴다. 이에 비하면 #5번은 결정을 내리고도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성향이 강하다. 그러나 #5번 유형이 보다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이를테면 ‘지식의 함정’ 또는 ‘정보의 박스’에서 뛰쳐나오면 과단성 있게 행동하게 된다. 자기의 지식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섭리’를 따라 산다고 마음먹게 되면 누구보다 초연하고 생각과 행동이 모두 자유스러워진다. 우리는 도마에게서 #5번 유형의 특징을 골고루 접하게 된다. 일반적인 특성은 생각이 많고, 질문도 많고, 관찰과 분석도 잘 한다. 그러자니 자연히 탐구심과 의문심이 교차하며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의심이 많다든가 남의 말을 잘 안 믿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지식과 판단에서 자유로워지면 초연하게 되고 행동 면에서도 과단성이 나타난다. 예수와 동행하면서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목을 보면 도마가 그만큼 생각도 많고 관찰도 잘 하거니와 솔직하게 표현도 잘 하고 용기있게 발언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도마복음서가 전해지는 것을 보면, 역시 도마가 예수께 질문을 많이 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의 물음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과 차별성을 드러내며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대답은 다른 제자들의 평범한 대답에 비하여 독특한 지혜를 드러낸다. 2. 의심하는 도마 전통적으로 도마는 ‘의심하는 도마’ Doubting Thomas로 알려졌다. 그것은 도마가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또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하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을 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타이틀이다. 그런데 의심이 의심으로 끝나면 무의미하다. 그러나 의심이 믿음으로 이어진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의심은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탐구심으로 이어지고, 지식과 정보를 얻어서 이해심을 거쳐 믿음으로 이어지면 튼실한 믿음이 된다. 흔히 믿음을 말할 때,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또는 ‘덮어놓고 믿어라’ 하는데 이는 위험하다. 믿음의 형태 중에 위험한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광신이요, 다른 하나는 맹신이다. 성서에 ‘의심하는 도마’ Doubting Thomas가 ‘신앙하는 도마’ Believing Thomas가 되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믿음이 생기고 확신이 되는 과정에서 의심이 들었던 사람과 그렇지 않았던 사람은 믿음이 다르다. 사람의 노력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도마처럼 의심하는 것은 지적으로 탐구하고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한 뒤에 믿음을 얻게 될 때, 그 믿음은 확고한 믿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20:20)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도 제자들의 특별한 반응은 언급이 없고, 다만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가 오히려 적극적인 표현을 한다. 의심으로 말하자면, 의미 있는 의심이요, 탐구적인 의심이요, 사색적인 의심이다. 에니어그램 #5번 유형의 전형적인 의심이다. 세 번째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가 고백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카라바지오 Caravaggio가 그린 성화 ‘의심하는 도마’를 보면 정말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물론 성서에는 도마가 스스로 말했던 대로 ‘그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라바지오는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이’ 주님의 상처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는 것으로 그렸다. 그보다 더 ‘의심하는 도마’를 묘사하는 것은 눈을 치뜨는 바람에 이마에 주름이 쫙 잡히게 그렸다는 점이다. 제대로 믿는 사람은 들은 대로 믿기보다는 귀로 들은 것이 ‘사실인가 하여’ 탐구한다. 사도행전 17:11에 보면 바울 같은 대사도가 말씀을 가르쳤을 때에도 베레아 사람들은 바로 그런 탐구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고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0세기의 철학자 폴 리쾨르 Paul Ricoer는 ‘비평 이후의 순간’ Post-Critical moment의 중요성을 말한다.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할 것을 다 한 이후에 ‘비평의 사막 저 너머에서 부르는 손짓’을 발견하고 은총으로 주어지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의심은 신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동료 제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도마는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의심하는 도마’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 의심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직접 만져 보지는 않았으나 역사적인 신앙 고백을 하게 된다. 성서 뿐 만 아니라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이 근간이다. 그러나 도마는 다른 사람들이 못 쓰는 표현으로 고백한다. ‘나의 하나님!’ 의심하는 도마의 특권이다?! |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안 지나간다’는 말을 듣는 #5번 유형은 그만큼 생각을 많이 하고 분석하며 신중한 편이다. 그래서 돌다리를 두들겨 보고 그 소리를 분석하느라고 건너지 못하는 격이다. 스스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신중한 것이 다른 면에서 보면 회의적이며 의심이 많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팔랑귀’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남의 말을 의존하면서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힘들어 하거나 불안해한다. 여기에 비해서 생각이 많은 #5번 유형은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가능한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어서 ‘꽉 찼다’고 느낄 때가 돼서야 비로소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 도마가 다른 일도 아니고 부활을 받아들이고 믿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과 분석을 하며 고심했겠는가 짐작하고도 남는다. 20세기의 위대한 해석학자 폴 리쾨르 Paul Ricoeur가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에 대하여 한 말은 우리가 도마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비평의 사막 저 너머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비평할 만큼 다 한 후에 ‘후비평 순간’ Post-critical moment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도마는 예수의 형제였다. 그만큼 가까이서 예수와 함께 자라났다. 이와 비슷하게 같은 형제인 야고보도 예수의 형제였기에 그를 메시야로, 부활하신 주님으로 받아들이기에 남모르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남의 말을 듣거나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남보다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거나 과정이 어려운 사람들은 일단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5번 유형에게서 볼 수 있는 성향이기도 하다. 도마가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갖는 과정이 남달리 힘겨웠으리라 짐작이 된다.
도마가 비로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고백하게 되었을 때, 평생의 경험과 지식과 믿음이 하나로 수렴되어, ‘꽉 찬’ 지성과 영성의 조화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음을 볼 수 있다. 오늘 우리는 고전적 표현으로 고백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에 익숙하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못 믿었던 도마가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였을 때,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었다. ‘의심하는 도마’에서 ‘신앙하는 도마’로의 대전환이었다.
이쯤 되었을 때 도마는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만 살려고 한 것이 곧 #5번 유형인 자신의 함정이자 한계였음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늘 경험하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섭리를 따라 살아야 하는 진실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지식도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함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비평의 사막 너머로 들어서는 초연함에서 오는 희열과 함께 솟구치는 믿음과 해맑은 영혼이 일상에서의 형님에게 ‘나의 하나님’하고 외치게 하였을 것이다. 신앙하는 도마의 진면목을 목도한다. 무릇 고난과 역경을 거치고 이겨낸 인생이 아름다운 것처럼 의심과 번민을 거치고 이겨낸 도마의 믿음이야말로 아름다운 믿음이요 찬란한 고백이었음을 본다. #5번 유형이 덕목을 살려서 초연해지면 지혜와 믿음에 있어서 빼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겠다.
4. 행동하는 도마
생각이 많은 #5번 유형은 대체로 생각이 많아서 무슨 결정을 하기가 어렵지,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게 되면, 심지어 남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하거나 돌출 행동을 할 만큼 특이한 면을 보인다. 드물게 볼 수 있는 경우지만,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요 11:15)라고 말씀하셨을 때, 도마가 느닷없이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도마는 필경 예수께서 비장한 각오로 죽으러 가겠다고 말씀한 것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비록 잘못 듣고 오해했을지언정, 스스로 결론을 내리면 누구도 못할 용단을 내리는 면이 있다. 이런 성향을 지닌 #5번 유형이 통합을 이룰 때 누구보다 풍부한 지식과 지혜가 어우러져 초연한 사람이 된다. 그야말로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영성으로 말하자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영성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초연함의 영성’ Spirituality of Detachement이라 한다. 아브라함은 #9번 유형이지만 #5번 유형인 도마가 지성과 영성이 조화된 ‘비집착’ Non-attachement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믿음의 도마’로서 상징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5번 유형이 이런 경지에 이르도록 통합되면 #8번 유형의 덕목을 살려 과단성이 있으면서도 아량이 넓은 지도자로서 행동하게 된다. 남이 따르기 어려운 용맹스런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된다. 부활 신앙을 고백한 이후의 도마가 걸어간 길이 이런 삶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인도의 서해안 지역 케랄라 Keralla주에 가면 팔라요르 Palayur시에 성 도마교회가 있다. AD 52년에 사도 도마가 세운 교회이다. 이는 도마가 인도에 세운 일곱 교회 가운데 첫 번째이고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다. 도마가 그 역사적인 신앙고백을 한지 22년 만의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동쪽으로 선교 여행을 하려 하였으나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사도행전 16:6) 결과적으로 서쪽으로 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팔라요르는 브라만들 가운데 도마의 전도로 개종하게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의 과감한 선교와 기적을 보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5번 유형은 평균 상태에 머물 때에도 행동의 과단성은 커녕 장거리 여행도 꺼리는 편이다. 여기에 비하여 도마는 멀리 인도까지 가서 힌두교와 불교가 강한 이방 문화 속에서 선교하였다는 것이 그의 초연함을 재확인하게 해준다.
도마처럼 초연함의 영성을 지닌 #5번 유형은 ‘행동하는 지성’과 ‘실천하는 영성’을 대표할만하다. 건강한 상태의 #5번 유형은 해박한 지식과 깊은 영성과 폭넓은 이해심과 지혜로 더할 수 없이 좋은 지도자가 된다. 도마가 로마 가톨릭 교황청에 의하여 ‘인도의 사도’ Apostle of India로 선포된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선교 역사로도 의미가 있으나 도마 개인의 영성 면에서 봐도 대단한 변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남달리 생각이 많은 만큼 분석하며 신중하기를 잘 하는 #5번 유형, 끊임없이 지식과 정보로 채워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행동을 미루던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뛰어넘어 섭리를 따라 살게 될 때,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초연한 자세로 사는 #5번 유형은 지도자로서 탁월성을 드러내게 된다.
‘의심하는 도마’로 알려졌던 사도 도마가 ‘신앙하는 도마’로 변화하면서 초연한 삶을 살며 ‘행동하는 도마’가 된 것은 #5번 유형에게는 물론이요, 어떤 성격의 유형일지라도 모두가 모범으로 삼을 영성가요 지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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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밤중에 누굴 찾는다는 일이 예사롭지 않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쉽지 않다. 특히 어른이나 선생을 찾는 일은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깊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싶을 때 고민 끝에 결정하는 성향이다. 생각 많은 니고데모가 심야의 대화를 위하여 한 밤에 예수를 찾아간 이야기에서 #5번 유형의 모습이 드러난다. 일찍부터 호기심과 궁금증이 많아서 관찰, 분석, 생각 등 탐구적인 노력이 남다른 #5번 유형은 지식이 많다. 하지만 스스로 지식이 아직 모자라다고 느끼면서 더 많은 지식을 좇다 보면 행동이 미뤄지는 습성이 몸에 배기가 쉽다. 그래서 #5번 유형은 아는 것이 많은데 비하여 행동이 굼뜨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다. #5번 유형은 #4번, #9번 유형들과 함께 위축형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어려울 때 위축되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각기 동기와 원인은 다르다. #5번 유형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남들이 보기에는 충분한 이상인데, 스스로는 결핍을 느끼며 더 알아야만 된다는 생각에 행동을 유보한다. #9번 유형은 ‘정신심리적 나태’ 때문에 미루고, #4번 유형은 흠결이 생길까봐 미루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5번 유형은 ‘돌다리도 두드리고 안 지나간다’고 할 정도로 두드려서 들은 소리를 분석하느라 건너가지 못 한다고 할 정도다.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서도 그 결정이 과연 타당한가를 재분석하고 재고하는 성향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야말로 ‘삼고초려’ 끝에 니고데모가 한 밤에 예수를 찾아갔을 때는 ‘불퇴전의 결단’, 물러설 데 없는 배수진을 치고 나선 장수처럼 앞에 나섰다. 당대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아는 것보다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생각하고 나서 방문한 것이라 하겠다. 그의 꽉찬 지식은 예수와의 첫 대면에서 이미 신앙고백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본다. #5번 유형은 환경에 압도당하는 것을 꺼리거나 두려워하기 때문에 낯선 곳,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여행도 삼가 할 정도다. 그러나 이런 성향을 뛰어넘을 때는 그만큼 편안한 상태일 뿐 아니라 알만큼 알았다는 확신이 섰을 때일 것이다. 무엇보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알았다고 자신감을 가졌기에 가능한 행동이다. 니고데모의 첫마디를 보면 알 수 있다.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행하시는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다름 아닌 #5번 유형이 이런 고백적인 말을 하게 된 배경을 감안하면, 대단한 결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허를 기피할 만큼 속이 꽉 차야 되는 성향인데다, 지식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따라서 관찰, 생각, 분석과 이해의 일련의 과정에서 망설임, 회의, 걱정, 신중함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거쳐서야 행동으로 나서는데, 이쯤해서는 남보다 더 초연하고 용감하게 나선다. 이런 상태에서 #5번 유형의 니고데모는 예수도 인정한 만큼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유대인의 지도자로 처신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예수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그중에서도 바리새파요, 예수를 후일에 십자가형에 넘겨주는 결정을 하는 산헤드린 최고회의 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예수를 한 밤에 찾아간 것 자체의 비중이 니고데모의 초연한 상태를 말해준다. 2. 탐구자 니고데모 진리를 찾는 사람인 니고데모는 율법교사로서 탐구자이다. #5번 유형들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이요, 관찰하고 분석하기를 잘 하는 니고데모는 개인적인 관심 뿐 아니라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산헤드린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당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예수를 책임감을 가지고 탐구해야 할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마다 예언자라든가 메시야를 자처하며 나선 이들이 있는 상황에서 혹세무민 惑世誣民의 위기를 분별하고 대처해야 할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니고데모가 개인적 특징이나 성향과 더불어 리더십의 책무감을 더하여 조사하였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세례자 요한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던 만큼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요, 독립투사 같은 지도자들과도 비교할 처지였을 것이다. 그토록 신중할뿐더러, 반대파에 속한 지도자로서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 니고데모에게는 마치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메시야 대망 사상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파의 관심을 공유하는 니고데모는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임을 알게 된 마당에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야인지를 알 길이 예수를 직접 만나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직하다. 그래서 급기야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가 대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5번 유형의 통합된 특징으로 꼽을만한 ‘느린 생각, 빠른 행동’이 니고데모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서 예언자냐 메시야냐를 분별해야 할 역사적 과제 앞에 선 니고데모의 결의에 찬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알렉산더 이바노프 Alexander Ivanov의 1850년도 작 ‘예수와 대화하는 니고데모’란 성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화중에 예수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였을 때, 니고데모 특유의 탐구성이 촉발된다. 니고데모가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듯이 말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어떻게 다시 태어 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지식의 한계를 드러냈다. 여기에는 니고데모의 회의와 고민이 동시에 표출된다. 자신이 예수에 대하여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찾아온 것과 예수가 드러내는 진리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메시야 이해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힘’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니고데모가 속한 유대인, 바리새파, 특히 산헤드린은 힘이 곧 지배 체제 Domination system인데 비하여 예수에게 힘은 ‘지배없는 질서’ Domination-free order이다. 니고데모가 축구하며 탐구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수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하는 뜻을 아직 니고데모는 깨닫지 못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가치관이 다르다. 세계관이 다르다. 생각이 다르면 습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니고데모가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예수의 생각을 미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의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것과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니고데모는 예수의 정체성과 표적의 의미를 아직 깨달을 수가 없었다. 니고데모가 탐구자로서 지닌 많은 지식과 깊은 생각과 신중한 분석도 예수의 실체와 영성 앞에서는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본다 |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가운데 한 사람이요, 유대 사람의 지도자였다(요3:1). 예수가 ‘무지배의 질서’로서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대인들은 ‘지배체제’로서 ‘세상’을 대표한다. 요한복음 상황에서는 바리새파가 바로 그 유대인들의 ‘세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바리새파는 진보적인 유대인 평신도 운동으로서 그들의 주요 관심은 회개와 하나님의 개념에 따르는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엣세네파 같이) 광야로 물러나는 생활로 들어가지는 아니하였고 일상적인 직업을 통하여 생활을 영위하였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유대교적 신앙으로 생각하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이 세상적인 유대국가로부터 구원을 기대하지는 않았고 사후의 생명을 위한 구원을 기대하였다.’ (사랑과 진리의 대화, 김영운,p.54) 니고데모는 이런 성향을 띄고 산 사람으로 보인다. 예수를 찾아간 목적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더욱이 유대인의 한 지도자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탐구하는 입장이었다.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라고 천명하는 것이 빈 말이 아닌 만큼 그것은 신앙고백에 해당된다. 그러나 바리새파에 속한 지도자가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극히 은밀한 일이요 비밀스런 사건이다. 단순한 개인사로만 보면, 예수의 추종자가 되고 신자가 되는 결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간단하게만 볼 수 없는 사건이다. 게다가 #5번 유형의 속성을 지닌 니고데모에게는 또한 함축성이 큰 행동이다. #5번 유형은 자명한 지식이나 진리도 쉽사리 수용하지 못하고, 따지고 볼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도, 확신이 서기 전에는, 무모하게 보인다. 예수가 인기가 비록 하늘을 찌를 듯 하였고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고 따랐어도, #5번 유형의 눈에는 그 역시 무모하게 보이기 쉬운 법이다. 열혈 청년 같으면 과감히 나서서 신자도 되고 제자도 되고 할 법 하지만 #5번 유형은 역시 유보적이며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다. 지식과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한 #5번 유형에게는 꼭 집어 말하지 않아도 에니어그램 격언에서 찾는 뜻이 서려있을 법하다. ‘자신을 알라.’ ‘무리하지 말라.’ ‘매사를 검증하라.’ 그러니까 남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속에 품은 뜻을 천명하고 결신자가 되고 제자가 되어도, 스스로 최종 결단을 하기까지는 무모하게 처신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죽음의 순간을 ‘진실의 순간’이라 하는 뜻을 실감하게 만든다. 마음속으로 예수를 따르며 신자가 되고, 제자가 되는 결정을 하였더라도 세상에 공표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유보한다. 더욱이 자신의 지위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넘어섰다 하더라도 예수의 상황과 관계까지 생각할 때, 그는 ‘비밀 신자’ Crypto Christian, ‘비밀 제자’ Crypto Disciple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니고데모가 누구보다도 예수가 권력 정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하여 고난의 길을 가면서 고뇌하며 번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동정하고 공감하지 않았을까 본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잡으려고 했을 때(요7:32),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7:45-52). ‘비밀 제자’의 지경을 넘어 위험을 무릅쓰고 중대 발언을 하는 것을 본다. 4. 희생적 지도자 니고데모 평소에 생각과 관찰을 잘 하는 #5번 유형은 어떤 결과를 얻으면 그것을 또 분석하고 이해하느라 신중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일단 충분하다고 생각할 때 남달리 깊은 이해와 지각이 뛰어난 #5번 유형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초연한 자세를 취한다. 심야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된 니고데모는 스스로 초연해지면서, 이제는 역설적으로 남들이 보기에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위험에 직면하고 도전한다. 니고데모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력과 탁월한 지각과 감지력에 분별력을 더하여 사태를 꿰뚫어 본다.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고려하여 비밀 신자와 비밀 제자로 처신하던 때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평소에 신중함이 회의적인 자세를 지니게 했다면, 사태의 본질을 통찰하고 확신이 서면 #5번 유형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선견지명에 대담성을 더한 리더십, 높은 분별력에 강한 결단력을 배합시킨 리더십을 발휘한다.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같은 지도자들 가운데서 ‘그를 믿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라는 말이 의회에서 공공연히 나오고 있을 때, 이미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로서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예수를 믿고 있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변론하자 다른 위원들이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하고 힐난한다. 예수가 가는 십자가의 길을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니고데모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려 노력할 따름이다. 적어도 산헤드린 최고회의 의원들과 모든 지도자들이 니고데모 자신이 예수와 대면하여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예수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고나서 심판을 해도 하라는 지극히 객관적 판단 근거를 갖추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강고한 보수적인 지도층의 독선과 권력에 대한 탐욕에 부딪힌 니고데모는 한 번 더 신중을 기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본다. 예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권력의 악마성을 보면서 그렇다고 무모하게 함께 죽을 순 없다는 진실을 속에 품는다. 지도자의 초연함과 용기를 아울러 갖추었으나 결정적 순간까지 기다리며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찾는 그야말로 ‘빈틈없는’ Shrewd 통찰력과 ‘멋진 계산’을 하는 듯하다. 마침내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최후를 맞았을 때, 그는 또 다른 비밀 제자 아리마대 사람 요셉 의원과 함께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 Deposition 모셔다가 장례를 치룬다(요19:38-42).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예수의 직제자 열 두 사람까지 모두 달아나서 숨었던 살벌한 상황에서 요셉과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각오하고 나선 초연하면서도 처연한 모습이다. 사태를 꿰뚫어보며 달관한 것 같은 니고데모는 자기과시를 하는 것도 순교자를 자처하는 것도 역사에 공헌한다는 것도 아닌 모습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만용을 부린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도, 니고데모는 바로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물면서 예수와 더불어 ‘현존’한다. 남들이 보기에 상상하기 어려운 희생을 초연한 마음으로 감당하면서 장례를 치룬다. 요셉이 빌라도 총독의 허가를 받고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요19:39). 약 34킬로그램이 되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니고데모도 이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어떤 운명도 받아들이려는 각오와 초연함이 분명하다. 처음 교회 신자들과 제자들이 가슴에 품고 산 순교 그 자체였다. #5번 유형은 이렇게 니고데모처럼 초연함에 용기가 더해지면 희생적인 지도자가 된다. 교회 전승이 말하는 대로 1세기 중에 순교 당하였다. 비밀 제자로 역할과 책임을 다 한 뒤에 결국 천명하고 나서서 순교자가 되기까지 하였다. |
출처 | http://lsjm.tistory.com/entry/%EC%95%A0%EB%8B%88%EC%96%B4%EA%B7%B8%EB%9E%A8-5%EC%9C%A0%ED%98%95%EA%B4%80%EC%B0%B0%EC%9E%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