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향
작가 : 이호철(1932∼ )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 귀향 소설 성격 : 실존적 문체 : 간결한 문체로 사건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고 있다. 인물들의 대사에 사투리를 사용하여 인물을 현실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일인칭 관찰자 시점이 혼재하고 있다. 왜냐하면 1인칭 시점으로 '나'의 관점에서 인물과 정황들을 묘사하고 있으나, '나'의 주관적 평가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고 객관적인 관찰과 묘사에 가깝다. ) 배경 : 6·25 전쟁 중, 부산역과 부두 근처 제재 : 월남 실향 청년들의 절박한 삶 구성 : 순차적 구성으로 부분적으로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친밀하던 네 사람의 관계가 점차 벌어지면서 갈등이 고조되어 가는 단순 구성을 보이고 있다. 발단 : 부산에 피난 와서 화차 칸을 전전하며 위험하게 살아가는 광석, 두찬, 하원과 나
전개 : 성격 차로 인해 광석과 두찬 사이가 벌어짐
위기 : 광석이 출발한 화차에서 뛰어내리다 다쳐서 죽음
절정 : 광석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던 두찬마저 '나'와 하원을 버리고 떠남
결말 : 남은 둘이서 잘 살아가자고 말하는 하원을 버리고 떠날 생각을 하는 '나'
주제 : 월남 실향민의 애환과 비애 혹은 고통 특징 :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실향민들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고, 6·25전쟁을 반영한 전후사실주의 문학이고 작가의 실제 체험이 담겨 있음 인물 : 두찬 - 스물넷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조숙해 보이며, 사교성이 없고 말이 없는 성격, 진득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융통성이 없고 무뚝뚝하다. 고향에 대한 말없는 집착을 가지고 있으며, 속없이 타향에 적응하려는 행동은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광석 - 두찬과 동갑, 그러나 두찬과는 달리 사리판단이 민첩하고 사교성이 있으며 말이 많고 타향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 행동을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로 모로 두찬과 대비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원 - 열여덟의 어린 나이로 여리고 순수하며 의타적(依他的)이다. 그의 순수성은 주변 인물로 하여금 연민을 일으키게도 하나 한편으로 모두가 극단적인 삶 속에 던져진 상황이라 짐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나 - 19살 청년으로 홀로 월남하다 같은 고향의 광석, 두찬, 허원을 만나 부산 역 근처의 화차 칸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물,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로 '나'를 포함한 네 인물이 피난지에서 갈라서게 되는 과정을 서술한다.
출전 : '문학예술'(1955) 줄거리 : 6·25전쟁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대규모 1·4후퇴 당시, 엉겁결에 LST에 올라 한 마을에서 함께 월남한 광석, 두찬, 하원 그리고 '나'는 부산에서 궁핍한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 부두 하역장에서 육신을 팔아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가며 생활을 한다. 이들에게는 기거할 방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정차되어 있는 화차(火車)에 숨어들어 잠깐씩 잠을 청한다. 이들의 생활은 이처럼 극도로 어렵지만 이들은 서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겨내기를 맹세한다. 이들은 화찻간에서 고향에서 내리던 눈, 잘 웃던 이웃집 형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나이가 많은 두찬과 광석은 '나'와 하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하원은 입만 열면 고향이야기이고,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 광석이 화차에서 실족하여 죽는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이들 세 사람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점차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마침내 두찬은 광석의 죽은 후 이들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이젠 '나' 역시 하원을 버리고 도망할 궁리를 한다.
하룻밤 신세를 진 화차 칸은 이튿날 곧잘 어디론가 없어지곤 했다. 더러는 하루 저녁에도 몇 번씩 이 화차 저 화차 자리를 옮겨 잡아야 했다. 자리를 잡고 누우면 그런대로 흐뭇했다. 나이 어린 나와 하원이가 가운데, 두찬이와 광석이가 양 가장자리에 눕곤 했다.
이상한 기척이 나서 밤중에 눈을 떠보면, 우리가 누운 화차 칸은 또 화통에 매달려 달리곤 했다.
"야야, 깨 깨, 빨릿......"
자다가 말고 뛰어내려야 했다. 광석이는 번번이 실수를 했다(광석이 화차에서 실족하여 죽는 사건의 복선이 됨). 화차 가는 쪽으로가 아니라 반대쪽으로 뛰곤 했다. 내리고 보면 초량 제4두부 앞이기도 했고 부산진 역 앞이기도 했다. 이 화차 저 화차 기웃거리며 또 다른 빈 화차를 찾아들어야 했다.(피난민의 고단함과 주거지 없음을 나타냄)
"야하, 이 노릇이라구야 이건 견디겐."
"......"
"에이 망할 놈의."
광석이는 누구에라 없이 짜증을 부리곤 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넷은 가지런히 제3두부를 찾아 나갔다. 가지런히 밥장수 아주머니 앞에 앉아 조반을 사먹었다.
"더 먹어라."
"응."
"더 먹어."
"너 더 먹어."
꽁치 토막일망정 좋은 반찬은 서로 양보들을 했다.[고향 사람이라는 따뜻한 지연(地緣) 의식과 서로에 대한 따뜻한 정이 담겨 있음]
어두운 화차 칸 속에서 막걸리 사발이나 받아다 마시면, 넷이 법석대곤했다.
우리들 중 가장 어린 하원이는 늘 무언가 풀어헤치듯,
"야하,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 어잉 야야, 벌써 자니 이 새끼, 벌써 자니. 진짜, 잉. 광석이 아저씨네 움물 말이다. 눈 오문 말이다. 뒤에 상나무 있잖니? 하얀 양산처럼 되는, 잉. 한번은 이른 새벽이댔는데 장자골집 형수, 물을 막 첫 바가지 푸는데 푸뜩 눈뭉치가 떨어졌다, 그 형수 뒷머리를 덮었다. 내가 막 웃으니까, 그 형수두 눈 떨 생각은 않구, 하하하 웃는단 말이다. 원래가 그 형수 잘 웃잖니?"[야하, 부산은 - 잘 웃잖니?" : 어두운 화차 칸에서 회상하는 '흰 눈'의 세계는 흑백의 대립 구도를 이룬다. 현실의 암담함과 고향의 순수함을 대비시킴으로써, '고향'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해 준다. 여기서 '눈'은 '잘 웃는 형수'를, '형수'는 '고향'을 떠올리는 매개체인 셈이다.]
광석이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토백이 반원 새끼덜, 우리 사촌끼리냐구 묻더구나. 그렇다니까, 그러냐아구, 어쩌구. 그 꼬락서리라구야. 이 새끼 벌써 취핸?"
조금 사이를 두어,
"야하, 언제나 고향 가지?"
두찬이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이제 금방 가게 되잖으리."
"이것두 다아 좋은 경험이다."
"암, 그렇구말구."
"우리, 동네 갈 땐 꼭 같이 가야 된다. 알겐."
"아무렴, 여부 있니. 우리 넷이 여기서 떨어지다니, 그럴 수가. 벼락을 맞을 소리지. 허허허, 기분 좋다. 우리 더 마실까. 한 사발씩만 더, 딱 한 사발씩."
광석이는 쨍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두찬이는 화차 벽을 두드리며 둔하게 장단을 맞추었다. 하원이는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했다. 술을 한 병 더 받아 온다. 담배를 사온다. 나는 곯아떨어져 잠이 들어 버리곤 했다.
어느 날 저녁 광석이는 작업반 반장을 끌고 왔다. 두찬이는 화차 칸에 벌렁 누운 채 아는 체도 안 했다.(광석과 두찬의 성격 차이를 드러내는 구절로 광석은 토박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만 두찬은 타향 사람들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성격의 차이는 예전까지 단합된 모습을 보이던 네 명의 주인공들 사이를 갈라놓는 계기가 된다.) 하원이는 귀빈이라도 온 듯이 퍽으나 대견스러워했다. 광석이는 술 몇 사발 값이나 내놨다. 하원이는 곧 술을 받으러 갔다. 겸해서 초 한 자루도 사왔다. 그제서야 두찬이는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다.
"이러구 어째 사노?"
반장이 지껄였다.
"이것두 다아 경험임넨다."
광석이는 공손이 대답했다. 그러자 두찬이는 벌컥 성난 소리로, (광석과 두찬의 성격이 나타나는 말이 공손과 성난 소리라는 단어에서 그들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참례 마소."
"그러니 어떻게 해야잖나? 밤낮 이러구 있을래나."
"참례(참견, 남의 일에 끼어듬) 말라는데, 참례할 거 머 있어? 남의 일에."
"......"
반장은 조금 뒤에 곧 자리를 떴다. 광석이는 배웅까지 하고 돌아왔다.
"두찬이 넌 그리 고집을 부리니?"
"머이 고집이야"
"......"
"타향에 나와선 첫째, 사교성이 좋고 주변머리(일을 주선하거나 변통함. 또는 그런 재주라는 주변을 속되게 이르는 말.)가 있어야 하는 긴데."
광석이는 혼잣소리처럼 꿍얼댔다.
두찬이와 광석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두찬이 편이 네댓 살은 더 들어 보였다. 훤칠하게 큰 키에 알맞게 뚱뚱한 것이며, 검은 얼굴에 뒤룩뒤룩(크고 둥그런 눈알이 힘 있게 자꾸 움직이는 모양과 군살이 처지도록 살이 몹시 쪄서 뚱뚱한 모양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전자의 뜻. )한 눈, 두꺼운 입술, 술 사발이나 들어가면 둔하게 왁자지껄하지만 여느 때는 통히 말이 없었다. 광석이는 키는 큰 편이나 조금 여위었고 까무잡잡한 바탕에 오똑 선 콧대, 작은 눈, 엷은 입술에 쉴새없이 날름거리는 혓바닥하며, 홀가분한 걸음걸이, 진득한(경솔(輕率)하다, 경망(輕妄)스럽다, 가볍다, 방정맞다의 반대) 데라고는 두 눈을 씻고 보자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원이는 나보다 한 살 밑이어서 열여덟 살이었다. 어디서나 입을 헤에 벌리고 있곤 했다.
중공군이 밀려온다는 바람에 무턱대고 배 위에 올라타긴 했으나, 도시(도무지) 막막하던 것이어서 바다 위에서 우리 넷이 만났을 땐 사실 미칠 것처럼 반가웠다.
야하 너두 탔구나, 너두, 너두.
배칸에서 하루 저녁을 지나, 이튿날 아침에는 부산 거리에 부리어졌다(짐과 같이 내려 놓았다.). 넷이 다 타향 땅은 처음이라, 마주 건너다보며 어리둥절했다. 마을 안에 있을 땐 이십 촌 안팎으로나마 서로 아접(아버지와 한 항렬의 남자를 이르는 말로 아저씨의 방언) 조카 집안끼리였다는 것이 이 부산 하늘 밑에선 새삼스러웠던 것이다.[마을 안에 -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 이십 촌 안팎으로 아접 조카 사이라는 것은 굉장히 먼친척간이어서 남이나 다름 없는 사이이다. 그처럼 남이나 다름 없던 사이였으나 이제 부산이라는 낯선 타향에 도착하고 보니 먼 친척이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는 말]
"야하, 이제 우리 넷이 떨어디는 날은 죽는 날이다, 죽는 날이야."(주제를 반어적으로 암시한 구절로 이 작품은 함께 살아가자던 등장 인물들이 각자 갈라서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광석이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지껄이곤 했다.
이럭저럭 한 달쯤 무사히 지났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갈수록 아득했다. 이 한 달 사이에 두찬이는 두찬이대로, 광석이는 광석이대로 남모르게 제각기 다른 배포(어떤 일에 부딪히거나 임하여 마음을 쓰는 태도.)가 서게 된 것은(배포랄 것까지는 없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 없는 일이었다. 달리 변통(형편과 경우에 따라서 일을 융통성 있게 잘 처리함.)을 취해야겠다(다른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고 자기 살 길을 찾아야겠다는 의미), 두찬이와 광석이는 나머지 셋 때문에 괜히 얽매여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자연 우리 사이는 차츰 데면데면(대하는 태도가 친밀성이 없고 사무적이거나 무뚝뚝한 모양.)해지고, 흘끔흘끔 서로의 눈치를 살피게끔 됐다.
광석이는 애당초가 주책(일정한 줏대가 없이 되는대로 하는 짓)이 없다 할까 주변(일을 주선하거나 변통함. 또는 그런 재주)이 있다 할까 엄벙덤벙(말과 행동이 침착하지 아니하고 덤벙거리는 모양 ) 토박이 반원들과 얼려 막걸이 사발이나 얻어 마시곤 했고, 주변 좋게 보탬을 해서 북쪽 얘기를 해 쌓고, 이렇게 며칠이 지났을 땐 어느덧 반원들은, 나나 두찬이나 하원이와는 달리, 광석이만은 오래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처럼 손을 맞잡고는,
"나왔나!"
"오냐, 느 형님 여전하시다."
"버르장머리 몬 쓰겠다. 누구보꼬 형님이라카노."
"자네 언제부터, 말버르장머리(말버릇'을 속되게 이르는 말)하곤, 허 요새 세상이 이래 노니."
농담조로 수인사(인사를 차림,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다함. 여기서는 전자에 해당됨)가 오락가락했으니, 나나 두찬이나 하원이는 광석이의 이런 꼴을 멀끔히 남 바라보듯 바라다봐야 했다(토박이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광석에 대해서 그러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은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 광석이는 차츰 반원들과 얼려 왁자지껄하는 데 더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았고, 날이 갈수록 자신만만해졌다.
그 꼴사나움은 이루 말할 수 없어 더더구나 주변 없고 무뚝뚝하고 외양보다 실속만 자란 두찬이는 저대로 뒤틀리는 심사(마음에 맞지 않아 어깃장을 놓고 싶은 마음)를 지닌 채 다른 궁리(마음속으로 이리저리 따져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를 차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이즈음부터 두찬이는 부두 안에서 얌생이(남의 물건을 조금씩 슬쩍슬쩍 훔쳐 내는 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를 해도 다만 밥 두 끼 값이라도 골고루 나누어 주는 법이 없어, 일판만 나오면 혼자 부두 앞 틈 사이 샛길을 허청허청(다리에 힘이 없어 잘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모양. '허정허정'보다 거센 느낌을 준다. 여기서는 정해진 방향이 없이 건들거리며 걷는 정도의 의미인 듯) 돌아다녔다. 이런 두찬이는 으레 술이 듬뿍 취해 화차 칸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하원이는 자주 울먹거렸다.
"야하, 부산은 눈두 안 온다, 잉."(눈은 현실의 암담함에 대비되는 고향의 순수함을 상징한다. 재빠르게 타향에서 자기만의 살 길을 모색하는 광석이나 두찬과 달리, 하원은 아직 어린애 같이 고향 생각에 몰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하고 애스럽게 지껄이곤 했다.
되잖은 청(목청)으로 타령 같은 것을 부르는 두찬이의 취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가까워 오면 화차 칸은 무엇인가 덮어씌운 듯 조용해졌다.
"문 열어라."
드르르 문을 열면, 싸느다란 부두 불빛이 푸르무레하게 화차 칸에 찼다. 두찬이는 문간에 막아서서, 비트적거리며(모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약간 비틀거리며 걷는 모양. 힘이 없거나 어지러워서 몸을 바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쓰러질 듯이 걷는 모양) 한참을 허허허 웃어댔다. 하원이는 한쪽 구석에서 또 울먹울먹거렸다. 화차 칸으로 기어 올라온 두찬이는 헉헉 숨차 하면서 광석이부터 찾았다.
"야, 광석아, 이 새끼야. 이 새끼 어디 갔니?"
누운 채 광석이는 귀찮은 듯이 쨍한 목소리로,
"왜애, 왜 기래, 왜?"
"나, 술 마셨다. 나 오늘 얌생이했다. 사아지 두 벌, 근사하더라, 나 혼자 가지구 나 혼자 마셨다. 왜, 못마땅하니? 못마땅할 것 없어, 잉, 이새끼야."
광석이는 발끈 일어나며,
"취했음 잘 거지, 누구까 지랄이야. 어디 가서 혼자만 처마시군."
"말 자알 헌다. 그래 난 혼자만 마셨다. 넌 부산내기덜과 왁자고 오멘서 마시구. 난 내 돈 내구 먹지만, 너 술 사주는 사람두 많두나. 원래 사람이 잘났으니까, 인심이 좋아서. 난 못났구. 그렇지만 무서울 껀 쬐외꼼두 요만침두 없어. 두구 보렴, 두구 봐, 보잔 말야."
하원이가 일어나 앉아 소리내어 쿨쩍거리기 시작했다.
광석이는 갑자기 부러 악을 쓰듯 목대를 짜서,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두찬이도 광석이에 지지 않고 온 화차 칸이 떠나갈 듯,
"아, 신라의 밤이여, 아, 신라의 밤이여, 타아향살이 십 년에...... 씹할, 어떻게 되나 보자꾸나, 될 대로 돼라, 이 새끼야, 이 쥐길 새끼야."
발길로 화차 벽을 텅텅 내찼다.
하원이는 어느새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하략)
<문학 예술>
이 작품은 전쟁으로 북쪽의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사람들인 실향민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홉의 나이로 단신 월남하여 부산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작가의 실제 체험이 담겨 있다.
등장 인물들은 고향을 생각하는 동안만큼은 행복하다. 하얗게 함박눈이 내리던 고향, 잘 웃던 이웃집 형수의 웃음이 기억 속에서 환하게 밝혀져 있는 고향을 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꿈과는 다르게 참혹하다. 같은 고향이라는 공동체 의식만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갈라 놓은 것이다. 마침내 '나'는 돌아갈 기약조차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만 짜고 있는 감상주의적 태도와 결별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탈향'은 일차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6.25 전쟁을 반영한 사실주의 문학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탈향'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의 품에서, 그리고 원초적인 고향의 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고향 상실은 인간에게 고향 회귀 의식을 낳는다. 실존주의 문학에서는 고향을 상실한 인간의 조건을 '실존'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작품의 밑바탕에도 실존주의적 경향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이해와 감상1
이 소설이 붙들어 탐구하는 대상은 - '6·25 전쟁'이라는, 개인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추상적인 범주가 아니라 - 바로 '6·25 전쟁의 후유증' 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남한'이라는 분명한 공간 속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인정하고 새롭게 살아나가야 한다는 절박한 실존과의 대결이라 하겠다. 무엇이 달라졌으며 무엇을 포기하고, 또 무엇을 극복해내야 하는가는 이제 막연하게 생각해야할 인생의 길이 아니라 바로 일어나 화차 밖으로 나서면 짊어져야 하는 막중한 현실인 것이다. 이렇듯 달라진 현실 조건을 인식하는 구체적인 체험들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 아니라 주어져 버렸고, 그것의 뒤에는 전쟁이 놓여 있으며, 개개인의 잃어버린 고향의 그림이 말라붙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탈향'은 막상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수동적인 '실향(失鄕)'과는 달리 고향을 떨쳐 내야 하는 자극적이고 실존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너무나 힘겹고 고단한 '지금, 여기'에의 천박한 현실감 속에 '이제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고향'은 오히려 더욱 '모든 것이 있었던 것만 같은' 환상태(幻想態)로 바꾸어 놓는다. 나이가 가장 어린 하원의 독백은 이러한 현실적 체감과 환상적 고향의 반비례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한편 '우리 넷이 헤어지는 날은 죽는 날이다'로 대표되는 대화는, 이방인으로서의 불안감을 오히려 이방인으로서 자신을 더욱 옥죄어 붙들어 두려는 욕망으로 나타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인식이 점점 실제적인 삶의 문제와 부닥치고, 귀향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옅어지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 그러나 네 사람 사이에는 이에 대한 미묘한 견해 차이가 생기고, 그것은 모두 언젠가 돌아갈 고향에 대한 배반이 아닌가는 의구심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6·25전쟁 당시 부산을 배경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은 귀향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피난민의 고통스러운 삶만을 그리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이 작품은 고향을 잃은 것에 대한 한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길을 찾고 있는 실향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나는 광석과 두찬의 갈등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상황이 어려워져 생활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따라서 이성의 통제가 약화되면서 나타나는 인간의 사악함과 나약함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러한 나의 태도는 같은 고향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엉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내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나'는 돌아갈 기약이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만 짜고 있는 하원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탈향'을 감행한 것이다. '나'는 이로써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나'의 모습은, 전후 소설이 소박한 휴머니즘과 비장한 영탄조에 이끌리는 것에서 벗어나 객관적 현실의 구체적 탐구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
당신들의 천국
---------------------------------------
탈출기 최서해
---------------------------------------
요한시집 장용학
---------------------------------------
잉여 인간 손창섭
---------------------------------------
화살 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