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선택할 때 성공할 수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는 20년(1996∼2015)간 억만장자 명단을 분석했다. 자산 10억 달러 이상 부자 가운데 상속자의 비율은 평균 30.4%로 기록했다. 중국은 2%, 일본은 19%, 양극화로 고민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29%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억만장자 상속자 비율은 2014년 기준 74.1%였다. 세계 평균 2배를 넘는 수치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 미디어 그룹인 ‘블룸버그’는 2015년 연말 기준의 세계 400대 부자 순위를 조사했다. 세계 400대 부자 중 65%는 자수성가형 부자이며, 35%의 부자만 상속형인 것으로 나타났다. 400명 중 우리나라 국민은 총 5명에 불과했으며, 자수성가형 부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위 두 가지 수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제학자라면 부의 세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와,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 문제를 제시할 것이다. 사회학자라면 상속을 돕게 되는 법률의 한계,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최저임금 및 고용안정성 등을 꼽을지도 모른다. 난 심리학자이며, 심리치료사이다. 따라서 대중 보다는 개인을, 전체 보다는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사실이다. 난 치료자의 입장에서 위 현상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우리나라는 역사 깊은 심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통제자 집단이다. 둘째로 저항자 집단이다. 셋째로 안전추구 집단이다. 이 구조는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왔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고 탄압했다. 통제하고, 억압했으며, 착취했다. 통제 당하는 대중은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다. 안전추구 집단이 나타난다. 통제자에게 머리를 숙인다면 안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통제자에 저항하는 집단이 나타난다. 이들이 독립운동가이다.
이들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파레토법칙에 따라 통제자와 저항자 집단은 각각 전체의 20% 씩을 담당했다고 추측한다. 그럼 안전추구 집단은 전체의 60%가 된다. 우리 국민 과반수 이상은 안전추구 집단이라 볼 수 있다.
서양은 시민혁명, 미국의 독립운동, 노예해방운동, 여성해방운동 등을 거치며 사회구조를 변화시켰다. 왕권이 무너졌거나, 노예가 사라졌거나, 타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구조 속 사리진 집단엔 새로운 집단이 생긴다. 왕 대신에 시민을 대표하는 사람을 선출하거나, 정당한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하거나, 여성도 남성과 같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도록 제도적 변화가 일어나는 등을 말한다. 그들이 이뤄낸 건 구조를 뒤집은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정이 달랐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3일 뒤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8월 15일, 일왕은 패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일본이 강점했던 지역은 독립되었다. 우리나라도 어느 날 갑자기 독립된 것이다. 우리나라 일부분을 담당했던 ‘통제자’ 집단이 갑자기 사라졌다. 안전추구 집단과 저항자 집단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틈도 없이 통제자를 잃었다. 아무리 비효율적인 구조라도, 일부분이 사라진다면 전체의 기능을 잃는다. 사회적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미국이 통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정치와 경제 안정화를 위해 일본이 강점했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 나름대로 악역을 수행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시스템 속에 안전추구 집단과 저항자 집단은 변하지 않고, 통제자 집단의 수행자만 변한 것이다. 이때 구조는 일제강점기와 변함없이 작동한다. 통제자, 안전추구자, 저항자...
안전추구 집단과 저항자 집단의 정체성이 변하지 않는 한 통제자 집단은 시스템 유지하기 위한 필요악이다. 이 구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집단이 나타난다. 친일 집단이다. 친일 집단은 저항자 집단을 숙청하고, 탄압한다. 친일 집단의 탄압은 저항자를 저항자로써의 정체성을 유지시킨다. 그리고 안전추구 집단의 정체성도 유지시킨다. ‘우리를 잘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읍소해야만 했다. 익숙한 방법대로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통제자에게 저항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시대가 흘러 통제자 집단은 군부 집단으로 바뀐다. 이들은 과거의 학습된 방법에 따라 통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저항자를 밟고, 안전추구 집단의 복종을 강요한다. 통제자 집단은 늘 그랬듯, 같은 이야기를 한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는다면, 너희들의 안전을 책임져 줄 것이다.’ 안전추구 집단은 통제자 집단을 따를 수밖에 없다. 먹고 사는 생존은 인간의 본성이지 않는가. 저항자 집단은 그들의 정체성에 맞춰 민주화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한다.
80년 대 이후 통제자 집단은 자본가 집단으로 바뀐다. ‘내 밑에 들어오라. 그리고 충성하라. 복종한다면 빵을 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생계가 위험할 수 있다.’ 안전추구 집단에게 선택의 권리는 있지만, 선택의 능력은 없다. 안전 한 쪽으로 몸이 기울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에게 충성하고, 그들의 말을 듣는다면, 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 않는가. 안전추구 집단에게 ‘복종’은 그들의 생존전략이며, 복종해야 하기에 통제자를 찾는다. 안전추구 집단에겐 ‘잘 다스려 줄’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구조와 집단무의식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아직도 대기업을 향해 ‘우리를 잘 다스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 통제자의 구성원 또는 통제자 슬하에 들어가지 않으면 ‘루저’로 인식하기도 한다. 같은 연봉을 받더라고 대기업은 갑, 중소기업은 을이 된다. 대기업 직원은 좋은 신랑감이 되지만, 장사를 하는 총각은 부러움을 사는 신랑감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다. 누구나 돈을 벌 수 있고, 자유롭게 돈을 사용할 수 있으며, 어디서든 돈을 사용할 수 있다. 생활의 질에 돈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자본주의 국가 아닌가. 하지만 수많은 취업생들은 돈을 버는 방법보단, 어디에 소속되느냐와 누구에게 다스림을 받느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통제력이 강한 집단에게 소속되면 성공이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이라. 저항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이오, 복종하면 빵을 얻을 것이라.’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이 분위기를 지울 수 없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통제자, 안전추구자, 저항자 집단으로 이루어진 구조는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과반수의 안전추구자는 통제자에게 집중되고, 그들의 돈을 대신 벌어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소속되려 안간힘을 쓴다. 그들의 다스림을 받으며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부의 집중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와 집단 무의식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불리는 수저계급론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뿌리 깊은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태생을 바꿀 수 없다는 패배주의와 안전주의를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에서 흙수저 차고 태어났지만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정말 단 한명도 없는가?
나는 어떻게 성공하지 못했는가
이번 장에서 우리나라 사회 구조를 설명한 건 사회를 뒤집자는 의도가 아니다. 어차피 개개인은 당장에 사회를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없다. 대통령도 사회를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번 장은 ‘성공’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성공할 수 없는 구조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 구조를 뛰어넘는 사람이라면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는 의미이다.
성공하기 위해선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 행동, 능력, 신념, 환경, 정체성, 기회, 노력 등... 많은 내용들은 각설하고, 우리나라 구조만을 비교하여 성공법을 확인해보자.
첫째, 저항자는 성공 확률이 낮다.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제 시절, 저항자의 특징은 ‘강한 사회불만’이다. 이런 불만을 지니고 맞서 싸운 사람들이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사회운동가들이다. 과거의 통제자들은 비합리적이기에, 그 시절엔 그게 가능했다. 저항하고 투쟁한다면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말이다. 하지만 현재 통제자들은 합리적이다. 자본주의 시장이 만든 제도와 규칙을 잘 활용한다. 때로는 자신을 위한 규칙을 만들기도 하며, 안전주의자들의 목을 쥐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이 돈을 벌고, 돈으로 통제하는 건 그들의 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투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통제자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진 사람은 과거엔 영웅이었지만, 지금은 테러리스트가 된다. 지금 무력 투쟁을 한다면, 아마 해외토픽에 실릴 수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했다고 말이다.
저항자에게는 이득이 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바뀌길 희망한다. 생각해보자. 만약 ‘지금 사회는 절대 바뀌면 안 돼.’라고 여긴다면 저항할 필요가 있을까? 없다.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건 저항이 아니라 ‘수용’이다.
‘성공한다.’는 문장은 지극히 주체적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군가 대신 성공시켜준 것도 아니고, 사회가 나를 성공으로 인도한 것도 아니다. 내 스스로 나의 목적을 이루었을 때, ‘성공했다.’라고 말한다. ‘성공한다.’ 능동태 문장이다. 하지만 저항자는 사회적 구조, 지지, 태생, 등을 탓한다. 그리고 환경적 요인으로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너로 인해 성공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장은 ‘네가 나를 성공시키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저항자는 지극히 수동적 문장을 사용한다. 저항자의 성공 확률이 낮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저항자로써 성공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통제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치인, 사회운동가 등이 대표적이다. 정치인이 되어 제도를 개선하고, 사회운동가가 되어 여론을 조성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될 자신이 없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지지하고, 당신의 의견을 대변해 줄 정치인에게 보내는 한 표로 만족하라. 사회운동가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라.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이 방법이 최선이다.
둘째, 안전주의자는 성공 확률이 낮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고 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성공으로 가는 길엔 좌절이 따른다. 좌절, 시련, 실패는 성공으로 가는 관문이다. 성공을 위해선 시련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시련을 겪기 위해선 ‘도전’이란 길을 떠나야 한다. 도전하고, 시련을 겪으며, 꾸준히 노력할 때, 성공은 가까워진다.
하지만 안전주의자는 안전을 추구한다. 성공을 원하지만 좌절을 두려워한다. 성공을 원하지만 실패를 불안해한다. 성공을 원하지만 시련을 피하려 한다. 따라서 도전해선 안 된다. 도전했다가 지금 가진 빵마저 잃게 되선 안 된다. 많은 빵을 가질 수는 없지만, 잃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좋아하는 빵은 아니지만, 빵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안전을 추구한다면 목숨을 이어갈 수 있다.
아기 코끼리를 잡아 족쇄를 채운다.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강한 족쇄이다. 조련사는 도망치려는 코끼리를 때린다. 그럼 아기 코끼리는 탈출을 포기한다. 안전을 선택한다. 코끼리는 커서 어른 코끼리가 된다. 산만한 덩치기 되고, 힘도 장사가 된다. 족쇄 따위는 이제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조련사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 하지만 도망치지 못한다. ‘도망칠 수 없다.’는 학습의 결과이다. 이를 심리학에선 ‘학습된 무기력’이라 말하며, 나는 ‘복종중독’이라 말한다.
안전주의자는 통제자에게 저항하지 않는다. 과거의 저항이란,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현재의 저항이란 빵을 잃을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고 통제자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한다. 통제자의 통제를 벗어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조련사가 채워놓은 족쇄로 돌아오면 먹이를 얻을 수 있다. 조련사는 어쩌면 예쁘다고 쓰다듬어 줄 수도 있다. 얼마나 안전한가. 자신이 맹수란 것을 잊고, 애완동물이라 자기최면을 걸고 살면 된다. 그럼 안전하다. 안전주의자의 성공 확률이 낮은 건 필연적이다.
셋째, 통제자를 꿈꾼다면 성공 확률이 낮다. 일제강점기 시절, 성공 확률을 높이는 방법은 친일파가 되는 것이다. 그럼 통제가가 제공하는 빵과 통제자가 제공하는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비합리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지만, 배부르게 살기 위한 빠른 길이었음은 분명하다. 군부독제 시절엔 정권에 기대는 것이 성공의 빠른 길이었다. 실제 대기업 중 권력의 도움으로 성장한 기업들이 있다. 그리고 군부독제가 사라진 현 시점, 통제자의 역할을 자본가가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자손을 ‘금수저’라 부른다.
맹목적으로 바라보면 통제자가 되는 것이 성공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통제자 코스프레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식당 종업원을 홀대하고, 사업체 직원을 노예처럼 부린다. 임시직 직원의 임금을 미지급하거나, 직원의 노동력을 무가치하게 여기기도 한다. 자신이 통제자가 되고 사회의 지배계층이 되는 희열을 느끼며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모 항공사의 땅콩회항 사례에서 분노를 터트리고, 영화 ‘베테랑(2015, 류승완 감독)’의 금수저 몰락을 보며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역사적 흐름을 탄 통제자 집단의 권력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규제와 비판 여론은 점점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힘들어하는 소규모 사업자들과의 상담에서 꼭 듣는 푸념이 있다. ‘직원들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호소다. 이는 큰 착각이다. 직원에게 복종의 의무는 없다. 단지 직무기술서에 작성된 업무를 수행하고, 그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면 그만이다.
통제자를 꿈꾼다는 건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코스프레, 군부독제 코스프레를 한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기존의 통제자들도 비난받는 시대다. 현재 통제자가 되려는 건 결국 비난의 대상이 되겠다는 걸 의미한다. 시대와 문화를 역행하며 성공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비난받으며 성공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실패를 원한다면 통제자 코스프레서가 되어도 좋다.
성공을 원한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라
실패한 방법으로 실험을 계속하는 과학자는 없다. 성공하기 위해선 실패한 방법을 유지해선 안 된다. 성공하기 위해선 다른 방법, 다른 각도,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한다. 기존에 대한민국의 집단무의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저항자로, 안전추구자로, 통제자로 살아가는 건 성공의 길이 아니다. 다른 길을 찾아야 성공할 수 있다.
첫째, 저항자라면 사회가 바뀌길 포기해야 한다. 사회가 날 알아주고, 사회가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사회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길 포기해야 한다. 세상에 바라는 것들을 포기할 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숨겨진 능력, 나의 신념, 나의 정체성, 그리고 내가 가진 사회적 가치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해법은 단순하다.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욕구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가 나를 성공시켜주길 바랬다면, 이제는 내가 나를 성공시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바란 것들을 나에게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내가 나를 만족시킬 수 없다면, 어느 누구도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걸 말이다. 당신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시간을 가져라. 시간은 쌓이고, 결과도 쌓일 것이다. 그럼 당신은 어느새 ‘성공’이란 단어 문턱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저항자의 다른 성공 방법은 본연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어라. 세상을 뒤집은 사람들의 일대기를 모델링하라. 보고 배우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지, 자신의 불만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사회의 가치를 높였는지 보고 배워라. 그리고 실행하라. 당신이 세상에 불만을 가진다는 건 좋은 것이다. 그만큼 사회적 부조리를 알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만큼 해결의 의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행동하라. 작은 것을 바꾸고, 조금 더 큰 것을 바꾸어라. 그럼 당신의 노력은 쌓이고 언젠가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 당신의 불만을 에너지로 여기고, 그 불만을 발전의 동력으로 이용하라. 세상의 발전은 모두 작은 불만에서 시작했다. 불편함과 불만족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발전을 가져왔다. 당신의 불만은 발전과 변화의 동력임이 분명하다.
둘째, 안전추구자라면 안전함을 포기해야 한다. 세상은 쉽게 도전하라 말한다. 하지만 도전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 도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지 못한다. 무엇에 도전해야 하는지 구제적인 목표를 제시해주지 않는다. 이제 구체적인 생각을 해보자. 도전이란, 안전함을 포기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상황을 따지고, 성공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 뛰어드는 걸 도전이라 하지 않는다. 도전이란 안전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두고 우리는 영웅이라 한다. 불길에 뛰어드는 소방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구조대원... 이들은 자신의 안전함을 포기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웅이라 부른다. 당신이 안전함을 원했던 것처럼 타인도 안전함을 원한다. 당신의 안전함을 포기하고, 타인의 안전함을 책임지는 행동을 하라. 그럼 당신은 어느 날 영웅이 되어 신문 1면을 장식할지도 모른다.
셋째, 통제자라면 충성을 포기하라. 통제자는 누군가의 충성을 바라기에 통제한다. 하지만 이제 당신의 통제를 따를 사람은 사라지고 있다. 대통령도 비난하는 시대이고, 비난자를 탄압하는 정권도 비난하는 시대이다. 인간을 수직으로 계급화 하여, 아래 있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병정놀이... 병정놀이보다 더 재미있는 일을 찾아라. 타인의 충성, 병정놀이를 포기할 때 더 재미있는 일이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즐거웠는지,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수행했을 때 성공적이었는지 말이다.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을 때, 함께 하고 싶었던 어린 추억을 말이다. 인간은 그렇다. 즐거운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당신이 즐겁게 무언가에 빠져있을 때, 당신과 함께 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놀면 된다. 병정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즐기는 놀이, 당신이 즐기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럼 당신과 함께 놀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설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누군가와 함께 하길 원하니까 말이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오다 에이치로 작) 400회, 해적왕을 꿈꾸는 주인공 루피와 해적왕의 부선장이었던 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대화한다.
레일리 : 네가 해적왕이 된다면 바다를 지배할 수 있겠느냐?
루피 : 지배 따위는 하지 않아.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해적왕이니까.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득으로부터 자유를 찾아라. 이득을 끊고, 이득을 포기하라. 그럼 당신은 이미 해적왕이다.
이재진
너에게 끌려 다니지 않을 자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