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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슈뢰딩거의 고양이
게시물ID : panic_8922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소리조각
추천 : 19
조회수 : 1707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7/14 11: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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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나 임신했어

"나 임신했어"


머리속에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울리고 나서 전화기로 목소리가 들린 느낌이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확신하지 못한 K는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뭐?"

곧장 실수했다는 생각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뭐? 여자친구가 임신했다는데 '뭐?'

"후우."

여자친구의 한숨소리가 들렸지만 K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성대가 얼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 이 순간조차도 실수라는 의견이 머리속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아직 결정 못했어. 잘 생각해봐. 난 내일부터 대만 가. 유심 갈아 끼워서 통화 안될거야. 갔다와서 얘기하자."
"뭐?"
-뚜뚜뚜

최악이다.
여자친구의 임신소식에 K가 한말은 뭐? 라는 물음표 두개 뿐이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K는 다시 전화기를 들어 통화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행동은 이내 막혔다.

- 뭐라고 하지? 축하해? 사랑해? 내가 책임질테니 결혼하자?

2년째 취업준비중인 자신이 할만한 말은 없었다. 

병신, 머저리, 가진것도 없는 놈이 뭘믿고 피임을 안했어 병신아 나가 죽어.

자학하던 K는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2.

누군가에게 상황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친구의 회사 SNS에 들어가보았다. 타이완에서 열리는 상품 발표회가 일주일 후라는 소식이 떠있었다.
여자친구의 SNS에 들어가보았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애초에 여자친구는 SNS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
6개월전 사귀기 시작할때쯤 올렸던 여행사진 하나만 덩그라니 남아있었다.

K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가 간 뒤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어 K야 오랫만이다."
"그래 오랫만이다."
"뭔일이야? 이시간에?"
"아 뭐 좀 물어볼게 있어서... 지금 바쁘냐?"
"어 뭐... 잠깐은 괜찮아 잠깐만 내가 밖으로 나갈께."
"그래..."

전화기 너머로 친구의 아내 목소리와 아이 목소리가 들렸고,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말해라. 뭔일이냐?"

K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P가 임신한거 같은데..."
"뭐? 진짜? 와 미친새끼."

친구는 듣자마자 욕을 지껄였다.

"지금 연락이 안되서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할까?"
"연락이 안된다고? 같이 병원 간거 아니고?"
"그냥 전화로 그 얘기만 하고 딱 끊더라고... 거기다가 내일부터 출장이라고 연락이 안될거래..."
"그래? 희한한 케이스네?"

K는 친구의 목소리가 살짝 바뀐 것을 눈치챘다.

"그게 무슨 소리야? 희한한 케이스라니?"
"아니 보통 여자들은 임신하면 엄청 겁을 내거든. 그래서 남자친구랑 같이있고 싶어하고, 병원도 같이 갈라 그러고 하는데... 그냥 전화로 통보하고 끝이라...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네?"
"그... 그래?"
"거기다가, 출장간다고 연락이 안된다고? 요거 냄새가 나는데..."
"뭔 냄새? 뭔 소리야 임마."

친구는 K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떠볼려고 하는거지 임마."
"뭐?"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얌마. 생각을 해봐라. 니 올해 서른이지. 여자친구 서른 하나지. 뭐 P다니는 회사 좋은 데도 아니라며. 근데 니는 2년째 취업도 못하고 있지.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답답하지 않겠냐? 솔직히 여자들은 서른넘으면 결정을 해야 되요. 내가 딱보니깐 이거 테스트네."

-테스트?

"뭔 개소리야 임마. P는 그런 애 아냐. 그랬다가 거짓말한게 들키면?"
"뭔 상관이고. 그게 거짓말이라고 해봐야 니가 P한테 지랄이나 할 수 있냐? 니 저번에 술먹으면서 뭐라했냐? 니는 연애 초기부터 꿀리는 입장이었다며. 병신이 뭘믿고 피임도 안했냐?"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라서 K는 더욱 짜증이 솟구쳤다.

"하아... 아니겠지. 아니야."
"마 잘생각해라. 니 절대로 아 떼자고 하면 안된다. 무조건 책임진다고 해라."
"그러다 진짜면?"
"책임 져야지 뭐... 나처럼."

책임이라는 단어가 가슴을 짓눌렀다. K는 아직 그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내가 아빠가 된다고? 아이를 키우라고? 돈은? 직장은? 집은? 준비된게 아무것도 없는데, 아이를 어떻게 키우라는거야?

무슨 소리를 한건지도 모르는 말이 몇마디 더 오가고 나서 K는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3. 

생활고라는 단어를 입력하자 잔혹한 기사가 수도없이 쏟아졌다.

- 생활고 때문에 일가족 연탄불 피워 자살시도
- 아이는 무슨죄? 생활고 때문에 동반자살한 가족
- 생활고로 인한 범죄 증가. 대책은 없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K는 자괴감에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었다.
임신을 하게되면 여자친구도 직장을 나와야 할지 모른다.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할까? 그걸로 3가족이 살 수 있을까? 일용직 근로라도 해야할까? 자신이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삶에 익숙해져 버리면 취업은 포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고학력 하층민이 되는 것일까?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K는 전화기를 들어서 전화를 걸었다.
예전부터 고민이 있을때 가끔씩 상담을 해주던 선배 C였다.

-뚜르르르

"와우 K, 왠일이야 이시간에? 잠 안자?"
"아 형 잘 지냈어요?"
"나같은 불가촉천민이야 굶어죽지 않으면 잘 지내는 거지."
"대학원은 어때요?"
"매일이 X같지 뭘 물어보냐."
"올해는 졸업해요?"
"졸업은 임마 하느님도 결정 못하는거야."

몇마디 안부를 물어본 K는 주저하면서 말을 꺼냈다.

"저... 여자친구가 임신했나봐요."
"켁! 진짜로?"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이게 진짜인지 절 떠보려고 하는건지."

K는 여자친구와의 통화내용과 친구의 의견을 C에게 들려주었다. 얘기를 모두 들은 C의 목소리가 다소 낮아졌다.

"임신사실은 확실히 모르겠고... 주변을 통해서 알 수도 없고, 여자친구는 5일뒤에나 만날 수 있고... 전화도 안되고..."
"근데 저는 결정을 해야해요. 낙태를 해야할지 말지를..."
"뭐 난 낙태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그런 얘기는 별 도움이 안될거고..."
"어렵네요..."

"슈뢰딩거의 고양이네."
"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그게 뭔소리예요?"

"양자물리학에서 나오는 사고실험 얘기인데, 안을 볼 수 없는 박스안에 고양이와 청산가리, 50% 확율로 붕괴하는 우라늄입자가 있어. 근데 청산가리병에는 따로 장치가 되어있어서 우라늄 입자가 붕괴하면 청산가리 병을 깨버리거든. 그러면 고양이는 죽는거지. 그럼 이 상자안의 고양이는 살아있을까? 죽어있을까?"

"그런 실험을 왜 하는거죠?"
"뭐 파동방정식이 확율로 표시된다는걸 비판하려고 한 실험인데, 가장 대중적인 해석대로 말하자면 관측되지 않은 상태의 상자안의 고양이는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상자를 여는 순간 하나로 고정된다는거지."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죠?"

"네 여자친구는 실제로 임신을 한 상태와 하지않은 상태가 중첩되어 있고, 네가 결정을 하는 순간 그 상태가 밝혀질 테니까."

"뭐라구요?"


C는 상보성 원리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농담이었다고 했지만, K의 머리속에는 자신이 결정을 하는 순간 임신여부가 결정된다는 그 소리가 계속 맴돌았다. 

결정. 관측. 결정. 관측.

C와의 통화를 끝낸 K는 핸드폰으로 슈뢰딩거의 고양이에 대한 내용을 검색해봤다. 유명한 이야기인지 꽤 많은 정보가 쏟아져나왔고, 실질적으로 K는 그중의 10%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황이라면 P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삶과 죽음 또한 중첩된 상황인가?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럴리는 없다. 여자친구는 지금도 임신을 한 상태이거나 아니거나 둘중의 한상태로 존재할 것이다.
그냥 농담이었을 뿐이다...

농담.



4. 


K는 택시안에서 옆으로 지나가는 공항리무진을 바라보았다. 

문득 C 선배의 그말이 딱히 농담으로만 치부할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가진다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평생 아이를 축복으로 여기지 못하는 측은한 사람이 되어갈까?

삶과 죽음의 중첩이라는 것은 사실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이 아닐까? 내 선택에 따른 미래의 모든 가능성이 내안에 중첩되어있고, 내가 결정을 내릴 때마다 관측된 입자처럼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일까?


K는 결정을 하기로 했다.

여자친구는 7시 비행기로 도착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K는 상자를 열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것이 비록 고양이의 시체라도, 
그것이 삶과 죽음의 중첩상태로 영원히 상자안에 갇혀있어야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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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예전에 쓰다가 말았던 단편인데, 너무 길어서 내용을 조금 단순하게 잘라서 올려봅니다.

그때는 K가 느끼는 공포가 실감나게 와닿았었는데, 너무 단순화시켜서인지 잘 표현이 안된것 같기도 하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만 밝히시면 퍼가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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