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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생일 그리고 엄마
게시물ID : freeboard_13418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더운피
추천 : 1
조회수 : 20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8/08 12: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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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덥고 그리고 또 덥다.
내 생일은 언제나 그렇듯이 한창 더울때의 8월 중순이다.
 몇년전부터인가 생일이 되면 엄마한테 이 말을 하게 되었다.
 "더워 죽겠어 엄마, 이렇게 더울때 낳아서 키우느라 고생했어요" 
 쑥스러워서인지 엄마 앞에서는 말을 못하고 매번 통화로 하는것 뿐이지만...  
군대를 전역하기 전까지 우리집은 시골에 있었다. 
 언제 지은지도 모르는 흙으로 만든 한옥을 개량해서 시멘트를 바르고 창문을 단 그럭저럭 잠이나 자고 밥이나 먹을수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집 바로 뒤에는 산이 있었고 5분쯤 걸어가면 냇가가 있고, 그 냇가를 건너면 아주 작은 국민학교가 있는, 오락실이라도 가려고 읍내를 나가려면 30분은 걸어나가서 버스를 타고, 그 버스를 타고도 30분은 더 가야하는 그런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 시골에서 아버지는 목수일을 하셨고 엄마는 주로 밭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생활이 풍족했던적은 없었다. 근처에 마땅한 식당하나 없어서인지 남들은 대부분 해봤을 가족끼리의 외식이란건 형이 결혼을 하고 형수가 생기기 전까지는 해본 기억이 없다. 
 그러한 배경탓이었는지 부모님께 받은 생일 선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가 않고 학창시절에 친구들을 불러서 생일 파티를 한 기억도 없다. 

 20년도 더 지난 국민학교 4, 5학년쯤 이었던가. 
나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생일에 친구 몇명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당연히 집에는 친구들을 대접할 마땅한 음식같은건 없었고 엄마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웃으셨다. 
그리곤 아궁이가 딸린 허름한 부엌으로 들어가시더니 서둘러 라면을 끓이셨다.  

 어떤 이유여서였는지...그 사이 친구들은 모두 가 버렸고 몇 분 지나서 엄마가 내 온 라면을 보고는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야 말았다. 

 그때의 엄마 표정은 기억이 나지가 않는다. 
한없이 서러워서 울고만 서있던 나만 기억이 난다. 
 그 당시의 엄마 나이가 된 지금의 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가 속으로 나보다 몇배는 더 울었을까. 
유치원도 보내지 못하고, 마땅한 학원 한번 보낸준 적 없는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없는 살림에 농사를 지으며 식당일을 하시며 형이랑 나를 대학 공부까지 시키느라 엄마는 몸이 많이 안좋게 되셨다.
 시력은 많이 나빠지셨고 무릎이 많이 좋지 않아서 수술도 하셨다. 
 계단이라도 오르내리려면 난간을 붙잡고 한칸 한칸 움직여야만 한다.  
속만 썪였던 나 때문에 엄마가 더 고생이었단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철이 들지 않다가 뒤늦게 취직을 하고 가끔씩이나마 용돈을 조금씩 드린다.
 월급도 쥐꼬리만큼 벌면서 뭘 이런걸 주냐고 고맙다고 하신다. 
 한참동안 연락을 안하다가 며칠후에 다가오는 생일이 생각나서 여차 저차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더운데 어떻게 지내냐, 밥은 뭐 먹고 사냐, 회사는 안덥냐... 

나는 언제나 그렇듯 그럭저럭 지낼만 한데 엄마는 똑같은걸 매번 물어본다. 

 "니 생일 언제니? 더워도 와서 밥 먹고 가, 엄마가 미역국 끓여줄게"  
생일이 음력이라 엄마도 달력을 보기 전엔 정확한 날짜를 모르나보다. 

 너무나 미안하고 미안해서 잊고 싶은 그 어린날의 기억. 마땅한 선물 한번 제대로 받아본적 없던 나는 이제와서야 생각이 든다.  
엄마 하고 부르면 응 이라고 대답을 해 주고, 별일 없냐고 물으면 너는 뭐 먹고 사니 라고 물어봐주고, 생일이면 미역국을 끓여주는 엄마가 있다는 그 사실 하나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음을...  

항상 고마워요 그리고 항상 미안해요 
"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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