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전범재판소 심리과정에서 "진주만 공습 전에 보내려고 한 건데, 대사관측 문제로 늦어졌다"는 피고인측 주장이 나옵니다. 피고인측은 그러면서 예의 5000자 문서가 선전포고문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수정내역 : 선전포고문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는 서술이 주어를 피고인측이 아닌 재판소를 뜻하는 것으로 오인될 여지가 있어 수정합니다)
-박원순 '동경재판의 시작과 끝'- 일부 인용 [⑥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의 책임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태평양전쟁을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일본 국민에게도 米英擊滅의 기세를 돋군 사건이었지만 동시에 미국 국민을 대일전쟁의 의지를 묶어 세운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기실 세계 지배를 위한 결정적 승리인 것 같아 보였지만 일본 몰락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미국민의 의지는 전쟁 중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이 끝난 후에 까지 초미의 관심이었다. 일본 전범에 대한 수사와 재판의 초점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연합함대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리챠드슨 해군대장은 11월 25일 법정에서 일본은 미국과 전투를 시작한다는 명백한 경고를 사전에 통고하지 않은 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에게 비밀공격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수행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연합국최고사령부가 편찬한 조사보고서가 동시에 이 증언에 이용되었다.
피고인측은 그당시 수교된 통고문이 최후통첩으로 보아야 하고 이러한 최후통첩의 지연은 바로 사무지연에 다름아니었다고 변명하였다.그러나 외무성과 해군성, 東鄕 전 외상과 鳥田해군상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되는 부분이어서 그 진술이 엇갈리기도 하여 더욱 흥미를 끌었다.
피고인들은 미일전쟁의 개시가 당시 일본을 상대로 부과된 이른바 ABCD포위체제로 인한 국민경제의 파탄을 돌파하기 위한 자위적 전쟁이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외국으로부터의 원료 구입에 의존할 수 없는 일본에 대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0년 7월 2일 수출통제에 관한 대통령 포고를 내려 모든 물자의 대일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특히 석유금수조치는 일본의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변호인측은 당시 일본이 처한 곤경을 입증하기 위하여 물자동원계획 생산물확충계획등을 제시하고 이러한 계획을 수립한 당시의 상공차관등을 증인으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경제에 대한 압박이 이미 아시아 태평양 전반에 걸쳐 침략을 노골화하고 있던 일본정책에 대한 견제와 보복이었다는 점에서 주객이 전도된 주장이었다.]
도쿄 전범재판소는 피고인들을 침략전쟁에 관해 유죄로 판결했습니다. 따라서 도쿄 전범재판소가 "실질적인 선전포고로 인정했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고 칩시다.
이건 역사적 사건이고 당대의 평가는 이후의 문건발견 등으로 언제든 바뀔 수 있습니다. 6.25 전쟁에 있어서 한때 수정주의가 득세했다가 소련 문건 공개로 죄다 폐기된 것처럼요.
1999년 일본의 한 법학교수가 문건을 찾아냅니다. 일본이 애초에 개전의도를 숨길 의도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건입니다. 이에 따르면 일본의 선전포고는 선전포고가 아닙니다.
자, 그럼 적대행위 이후 일방의 적법한 선전포고가 이뤄지면 어떻게 되는가? 이에 대해서는 적대행위 시점으로 소급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럼 미국의 적법한 선전포고로 진주만공습시(엄격하게는 동남아의 영국령 침공시)로 소급하게 됩니다. 적대행위 시점이 개전시기가 되는 겁니다. 이러면 형식적으로 일방적이나마 동맹인 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요약. 일본의 선전포고는 도쿄 전범재판소에서 실질적으로 인정된 바 없고, 설사 인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발견된 문건에 따르면 현재에는 그걸 실질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적대행위의 개시로 전쟁개시를 바로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시적으로 동맹이 유지된 시간 자체를 인정할 수 없고, 선전포고에 따른 적법한 전쟁개시를 중시하는 입장의 경우에도 미국측 선전포고의 소급을 인정한다면 마찬가지의 결론에 이른다.
심지어 1928년 브리안트 켈로그 협약(파리부전조약)의 국제강행법규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방위전쟁을 제외한 침략전쟁은 모두 위법한 것이므로, 선전포고는 참작사유에 불과한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