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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공성전 이야기
게시물ID : cyphers_1372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되능교
추천 : 7
조회수 : 100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2/27 22:08:44
입대가 한 달 가량 남은 이 시점에서 난 그저 사형집행일을 기다리는 사형수마냥 부디 오늘 하루가 보람차고 알차게 흘러가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어제 간땡이가 부워오를 정도로 퍼마신 덕에 오늘하루가 보람차게 지나가길 바라는 건 그저 욕심이리라,
그냥 오늘 하루도 버리는 셈 치자.. 하며 해장할 요량으로 안성탕면 하나를 끓여 책상앞에 앉아 기계적으로 공성전에 입장한다.

지금 이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피 녀석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제피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아마 술기운이었으리라.
그렇게 서로 통성명을 한 후 가족관계를 물을 즈음 매칭이 잡혀 캐릭터 선택창이 띄워졌다.
짧은 인연이 아쉬워 빈 그릇을 끄적거리고 있을 무렵, 지금 내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요망하게 웃고있는 한 꼬마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엘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말년병장처럼 무료함에 지쳐있던 난 연습캐였던 엘리를 셀렉했다. 
그리고 곧이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방이 있지. 예를 들어, 며칠째 청소 안 한 내 방, 우리 민족의 식민지 해방,
니 허리춤의 지방 그리고 내 엘리는 방" 이라 하며 정신질환자처럼 떠들어댔고 팀원들이 당혹해할 겨를도 없이 로딩창으로 넘어갔다. 
그 순간 팀챗으로 누가 "씨방"이라고 한 것 같지만 아마 기분탓이었으리라

그렇게 난 간만에 새로운 헛짓거리를 한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을 미처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게임은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 평범하게, 서로 눈치만 보는 대치구도로 흘러갔다.
그 사이 내 점수는 '방+숙취' 라는 패널티가 붙어 마의 네자리를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점수가 기어서 암벽등반을 타고 있으니 정작 답답한건 내가 아니라 팀원들이었다.

우리 팀원들은 고맙게도 '엘리 ♡♡ 개못하네' , '접어라 ♡♡♡♡야' 같이 애정이 난무하는 격려의 메세지로 날 응원해 주었고 
덕분에 내 습자지 같은 멘탈을 조금이나마 부여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저 빈하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모를리 없었던 나는
길길이 날뛰는 적 휴톤이라도 맨투맨으로 마크하자는 계획을 세워 잃어버린 민심을 되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이은 한타에서 휴톤과 마주보고 짝짜꿍을 하며 서투룬 실력으로 달나라 왕복 티켓을 몇번 끊어주었다.
드디어 그도 달나라여행패키지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안면가드를 제외한 모든 스킬을 내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는 도중, 딸피로 폭죽을 타고 도망가다 '안녕히개1새끼'하며 마르세유턴을 하는 엘리를 보고 드디어 꼭지가 돈 휴톤은
조심스레 엘리를 어루만져주었지만 뒤이어 신고를 받고 온 레베카에 의해서 저지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톰과 제리처럼 티격태격하다 지쳐버린 나는 우리 잠시 얘기좀 하자며 휴톤에게 휴전을 신청했다.
그는 내 얘기를 경청하는 듯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이때다 싶어 그에게 다가가 위대한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를 역설했다. 
허나 그의 머리속에서 비폭력=Be폭력이라는 공식이 성립됐고 곧이어 나에게 다이아몬드와 같은 핵펀치를 선물했다.

그 후 채팅창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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