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
어느덧 시기가 흘러 둘이서 각각 1000만원 정도의 저축이 현실화 되었다. 합이 2000만원, 조그마한 집을 전세로라도 얻어볼 수 있는 금액이 되었다. 한창 둘이서 집을 알아보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쁜 집들을 구경하였고, 금전상황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래서 알아본 것이 국민행복기금 전세자금대출이었다. 결혼하였거나 결혼 예정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었고 다른 상품들에 비해 심사기준이 까다로웠으나 꽤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늘상 이야기하던 우리의 결혼 시기는 그 다음해 5월, 집을 알아보던 시기는 6~7월이었다. 그러다가 교차로신문에 나와있는 줄광고를 보고 집을 보러 갔다. 매우 선한 인상의 주인집 내외분들과 밖에서 자유로히 뛰어노는 강아지 한마리, 그리고 조그마한 황토방이 딸린 2층 집의 1층을 전세로 놓으신다는 이야기였다. 평수도 27평정도의 큰 평수에 아궁이가 있고 구들이 깔린 황토방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예전에 알아보았던 국민행복기금이라는 상품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할 시기같아 대출상담을 목적으로 그 당시 회사의 주 거래은행이던 1금융권 기업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아직 어른들께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아버지께 이야기하였는지 직접 제주도로 내려오셨다. 그리고 계약서를 쓰기 전 그 집에 두 번째 방문할 당시 함께 동행하셔서 직접 집을 보셨었다. 썩 흡족하게 보셨던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받았을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제주도에 휴식차 내려왔었는데 (굉장히 잦은 빈도로 내려왔었다.)그 당시 묶었던 원룸형 콘도에 숙소를 잡고 있었다. 그 곳에서 우리 둘의 결혼 이야기가 오고갔는데 그 콘도 숙소를 가리키며 '이 정도의 방을 얻을 때 부터 시작하는게 좋겠다, 나는 이것보다 못한 환경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세 딸을 키웠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로 그렇게 준비되지 않은 환경에서 일찌기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그녀는 회사에 아버지께서 제주도에 내려오신다는 이야기를 해서 비번근무제였던 휴무일을 2일 연달아 잡아놓은 상태여서 내가 근무하는동안 그녀는 아버지와 여기저기 많은 은행의 대출창구를 오고갔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굉장히 가슴아픈 모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알아본 대출상품은 한정된 조건에서 까다로운 대출기준을 만족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대출상품이었고 그러한 상황이란걸 매우 감사하며 대출을 준비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용하지도 않을 대출상품을 상담받기 위해서 대출창구를 들락거리며 장인될 분에게 불안감과 초조함만을 고조시킨 그녀의 행동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일하는 도중 그녀에게 연락을 받았고 그녀의 아버지께서 1000만원을 빌려주시겠다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전해듣고는 머리를 후려맞은듯이 어지러웠다. 준비되지 않은 형편에 일찌기 가정을 시작하기를 꺼려하던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시키려 찾아낸 것이 국민행복기금 전세자금 대출이었고 이를 이용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일을 벌리되, 절대로 양가 부모님께는 티끌만한 부담도 주지 말자고 철저한 합의를 보고 추진했던 전세집 마련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돈을 빌려준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아니 돈을 빌려주기로 했던 그녀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없는 와중에 일을 벌리겠다는건 누가봐도 한푼이라도 보태어달라는 무언의 압박이 아니고서야 그 분의 입장에서 어떠한 설명이 필요하겠느냔 말이다.
굉장히 화가 많이 났다. 그리고 그러한 소리를 그녀의 아버지가 들었었나보다. 퇴근 이후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있는 숙소로 오라는 연락을 받아 찾아갔고, 별 다른 이야기 없이 바로 본론으로 내가 일하는 와중에 있었던 은행방문과 대출상담, 그리고 아버지께서 빌려주신다는 1000만원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애초에 전세자금대출을 염두하고 시작했던 일이고, 대출이 아니라 혜택에 가까운 조건인 와중에 까다로운 심사조건에 전부 맞아떨어지는 환경이라 걱정이 없다고 설명을 드렸으나 이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대출창구를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느 말도 들리지 않았다. 급기야 '내 딸 이름 석자로 대출받게할 생각 꿈에도 하지 마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살짝 취기까지 있으신 터라 인사불성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상태였기 때문에 더 할말은 없었고, 보태주신다는 돈은 감사히 마음만 받겠으며 우리끼리 자체적으로 해결하기로 하자는 전제 하에 추진한 일이라 이 조건이 아니라면 집을 구하는 일은 없던 이야기로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그 자리를 떠났다.
차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가 울면서 뒤따라 나왔다. 대체 왜이러나며, 도와주신다는데 좋은거 아니냐며 나를 다그치는데 내가 그녀를 과대평가 했던 모양인가 싶을 정도로 애석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1000만원을 빌려준다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을지 나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염두하지도 않던 일반 직장인 신용대출을 대체 왜 아버지를 모시고 알아보러 다녔는지 통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오해는 나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고 지금 상황이 굉장히 언짢고 무서웠다. 그녀와 가족이 된다면 그분도 나의 가족이 될 터, 우리는 우직하게 벌어나가면 된다고, 감내하고 상환하여 버젓이 잘 사는 모습 보여드리면 그것 만큼 효도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끝은 없는 형편에 고집부려서 결혼하겠다는 철없는 20대 청춘들의 고집으로 결론이 나버렸던 것이다.
결국 나는 그녀를 돌려보내고 그 다음 날이 쉬는 날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식히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쯤이었을까 그녀의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고 서귀포 이마트 아래에 법환동쪽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차를 나누며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대출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 하였는지, 그리고 그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듣고 내게 사과할 일이 있고, 나를 볼 면목이 없다고 했던 말들.. 그녀의 아버지는 개인적인 사연으로 20년간 급여압류를 당하며 장기간 공직에 있었으나 돈 한푼 만져보지 못한 불운한 인생을 사셨다고 운을 띄웠다. 젊었던 시절 그녀의 어머니와는 반년조차 교제하지 않고 결혼을 결심했고, 청년시절 다니던 교회를 빌려 손수 장식까지 하나하나 매달아가며 결혼식장을 스스로 꾸몄다고, 한푼도 없는 형편에 강행한 결혼이어서 장모되시는 분의 가족들은 모두 다 결혼을 반대하였고, 결혼식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그리고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 신혼생활과 함께 찾아온 빚, 그것을 청산하기 까지 공직의 세월을 지내면서도 장차 2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말이다. 그리고 나와 교재하는 도중에 자기 딸년이 식칼을 들고 자네에게 협박아닌 협박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굉장히 자괴감이 들었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나눴던 것 같다. 결국 딸 아이의 결혼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하니 어제 내가 했던 이야기는 못들은 셈 쳐달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어떤 상황에서든 이런식으로는 절대로 너희들 생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추후 이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