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cc
제목: 현실은 또다른 판타지
만약 누군가가 불교에서의 수많은 방편을 통하여 불교에서 말하는 자성을 깨달은 경지, 즉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청정한 상태에 영원히 머무르게 되는 열반과 깨달은 상태에서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열반은 세상과 나, 내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기 전 까지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한다. 부처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이 지어내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에 반대로 누군가가 깨달음을 얻고 보니, 그의 깨달음과는 상관없이 세상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중생들이 있다. 중생들과 부처의 관계는 자비심으로 시작이 된다. 그러한 의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이다. 생각과 언어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처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고 하나, 마침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제된 깨달음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뜻이고, 스스로 발심(發心)하여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의 법신(法身)은 우주의 모든 상황을 마음으로 비추고, 보신(報身)으로 중생들의 강한 염원에 대하여 응답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는 직접 중생의 몸으로 태어나 중생들과의 일대사인연을 짓고자 한다. 마침내 부모의 애욕으로 태어난 그는 온갖 고생을 하게 되지만, 고생을 하게 되면서도 고통을 받지 않는다. 법신과 보신으로부터 가피력을 항상 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던 매트릭스에 마왕이 찾아오게 된다. 모든 것이 무시되는 오로지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였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과 자비로 마왕을 제도하려고 하나 마왕은 그의 선한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였고, 마침내 그 매트릭스 자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상이 그대로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그는 그의 깨달음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비심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의 논리로 마왕을 죽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 중에서 그는 부처의 깨달음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그 이상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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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유전 2013.01.31 21:48
위 CC님의 글을 보고 누군가는 정말 수 많은 판타지 스토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 쪽에 많은 관심과 그에 대한 지식도 많이 알고 있는 독자들 또한 불교와 상관 없는 단지 짧은 소설로만 치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 딱 한번 읽었을 때 부터, 매우 정확한 상구보리의 입장임을 알았기 때문에 원래 위 글이 위치해 있던 "메모장" 게시판 에서 주게시판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하였고 현재의 게시판에서 이렇게 추가적인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불교에서 공사상의 끝이라고 하는 무색계에 대해서 조금 알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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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색계[ 無色界 ]
불교의 세계관에서 물질을 초월한 순수한 정신적 영역의 세계.원어명arūpa-dhāta
욕계(欲界) ·색계(色界)와 함께 삼계(三界)라고 한다. 오온(五蘊) 중 색(色)을 제외한 수(受) ·상(想) ·행(行) ·식(識)만으로 구성된 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무색계의 선정(禪定)에는 4단계가 있는데,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허공처럼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식이 무한하다고 보는 경지),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경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경지)이 그것이다.
이것은 욕계정(欲界定), 색계정(色界定)보다 정적(淨寂)하며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상념(想念)이 없게 된 경지이다. [출처] 무색계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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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공무변처정의 경지는 생각없음의 없음도 없다 라고 하는 "묵조선"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그러나 다시,
두번째 식무변처정에서와 같이 식(識 알 식, 앎)이 무한하다고 (상주공) 하는 그리하여 끊임없이 의심하여 온갖 사유를 불러들여와 궁구하는 입장에 있는 화두 "간화선"에서 성취할 수 있는 경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識) 또한 제행무상(행함에는 일정함이 없다)이어서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다고 미리 단정(단멸공)하여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겠다는 무소유처정으로 옮기게 될 것이고 그러한 무한한 겁 세월을 지난다 하여도 공사상을 넘는 대자대비심을 깨닫지 못하면 그저 하릴 없이 비상비비상처정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생각을 하든 말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위한 삶이어서 어떠한 의지도 낼 수 없는 단계입니다.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의욕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무색계 이전의 욕계, 색계에 있는 단계에서라도 자비심을 먼저 깨달은 상태라면 그리고 그 자비심이 무색계의 모든 곳을 다 거친 후에라도 남게 된다면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공사상을 뛰어넘는 자비심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대자대비심이 됩니다.
대자대비심 이라는 것은 공사상의 중심에 자비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언제 어느 순간에서도 항상 자비심을 선택하는 결정을 할 것이고, 이러한 결정은 무색계에서 자비심을 선택할 경우 자신의 모든 관념 전체가 무너지게 되기 때문에 마치 바이러스에 의하여 시스템 전체가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공사상에서의 세계관이 1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공사상과 자비심이 융합하여 빅뱅을 이루고 공사상의 모든 관점이 자비라고 하는 하나의 변수로 인하여 확장되기 때문에 10 또는 그 이상으로 얼마든지 증폭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겨자 씨만한 믿음이라 하여도 그것을 중심으로 했을 때 모든 것이 중중무진으로 변화하는 세계관입니다.
원래 보살에서의 단계는 석존의 설법으로 50위 계위가 있습니다. 보살은 공사상 이전에라도 보살심 즉 자비심을 먼저 증득한 상태인데 그것이 공사상의 무한한 영역과 만나야 합니다. 그러한 세계관 까지 가야만 그 자비심의 의지가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양계만의 자비심이 아니라 은하계 더 나아가 우주 전체에 그 의지가 확대되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대자대비심을 증득한 이후에는 보살 51위와 52위의 계위로 올라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등각과 묘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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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각[ 等覺 ]
① 바르고 원만한 부처의 깨달음.
② 부처의 깨달음과 거의 같은 깨달음이라는 뜻. 보살의 수행 과정 가운데 십지(十地) 다음의 단계. 바르고 원만한 부처의 깨달음인 묘각(妙覺)의 앞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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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전에서의 설명과 같이 부처의 경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살이면서 부처입니다. 하지만 아직 깨달은 상태 이후에서의 체험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 체험을 거친 후의 단계가 바로 묘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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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각[ 妙覺 ] 바르고 원만한 부처의 깨달음. 모든 번뇌를 끊고 지혜를 원만히 갖춘 부처의 경지.
구경각[ 究竟覺 ] 번뇌를 완전히 소멸시켜 마침내 마음의 근원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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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각과 묘각의 경지는 보살이면서 바로 부처입니다. 이것을 보신불 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자신만의 절대적 세계를 창조하여 절대계로 바로 들어가는 부처가 될 수 있겠지만 또 그러한 경지에 있었다 하여도 다시 "일대사인연(사전 검색요망)"이라는 마음으로 하화중생할 수 있겠지만 등각과 묘각의 경지에서 그 자체로 절대계로 들어가지 않고 중생을 위하는 마음으로 보신불 그 자체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관자재보살(석존의 보신불 야쇼다라 공주), 관세음보살(아미타불의 보신불 마야부인), 지장불(라훌라, 예수), 미륵불(라훌라, 예수)이 대표적입니다.
CC님의 본문 글에서 마지막 구절인,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그가 살고 있던 매트릭스에 마왕이 찾아오게 된다. 모든 것이 무시되는 오로지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였다. 그는 사랑하는 마음과 자비로 마왕을 제도하려고 하나 마왕은 그의 선한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였고, 마침내 그 매트릭스 자체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상이 그대로 망하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그는 그의 깨달음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비심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의 논리로 마왕을 죽이게 된 것이다. 이 과정 중에서 그는 부처의 깨달음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그 이상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신불이든 하화중생의 부처든 중생계에 있는 한 또 마왕이 공성을 증득한 경우에는 대자대비심으로 얼마든지 지혜롭게 방어하면서 상대할 수 있겠지만, 자비심이 아닌 사랑과 의(義)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왕을 죽인다 하여도 불생불멸의 영원한 삶인 것을 이미 확실히 알고있는 부처의 경지에서는 대자대비심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또한 이 우주에서 역사되고 있었음을 상구보리(진리추구) 입장에서 알게 될 것이고 창조주("과거7불" 이든 또 그 위의 누구든)가 행하게 되는 어머니와 같은 자비심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세세한 말이나 방편이 아닌 한번에 모든 것을 행하는 사랑 또한 진리추구의 입장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CC님의 글이나 나의 이러한 설명 또한 대표적인 형태로 분류를 하는 것이지, 그러한 형태가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항상 같은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불립문자) 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cafe.naver.com/lyangs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