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하러 가기 위해서 씻고 나왔다. 나는 내 옷장을 보다가 문득 특정한 위치에서 시선이 멈췄다. 바로 레플리카. 네드베드 은퇴 유니폼,
말디니 은퇴 유니폼, 인터밀란 트리플 크라운 시점의 스네이더, 06/07 맨유 어웨이 스콜스(처음 구매한 유니폼), 스콜스 은퇴 유니폼(곧 복귀 ㅜㅜ)
카카의 마지막 월드컵 유니폼, 호날두 레알에서 첫 득점왕 때 유니폼, 바이에른 뮌헨 별 4개 짜리 특이하게 나온 시점의 필립 람(기억상 08/09) 등.
이렇게 나의 축구사랑이 듬뿍 묻어나오는 결정체들이 걸려 있는 바로 그 위치. 한 때는 돈낭비다, 쓸데없는 짓거리 라고 폄하받았던 나의
선택의 결과물. 술, 담배 일절 안하고 꼬박꼬박 모아서 샀던 나의 가치관이 그렇게 밟혔던 그 순간이 생각이 났던 탓에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예전에 만나던 여자들도 돈낭비다, 차라리 내 백을 사달라는.......... 아......... 짜증.
하지만 지금 여자친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존중해주고 장려해주고. 내 축구화도 사주고 바람막이도 사주고. 그래서인지 저번에 노출이 있는
옷을 입을 때 내 의견을 피력한 것이 더 미안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여자친구는 내 시선이 머무는 그 지점을
정확히 캐치했는지 갑자기 한 유니폼의 앞으로 다가갔다. 브라질 국대 카카가 마킹되어 있는 유니폼을 옷걸이에서 꺼내서 날 보며 "이거 입는다."
라고 말했다. 난 만류했다. 사실 레플리카를 입어본 사람들은 잘 알 수 있다. 정말 덥다는 것을. 더워도 정말 덥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에어리즘을
입었으니 괜찮다며 입었다. 스키니 청바지에 카카 유니폼. 여자친구가 운동으로 관리된 몸이라서 더 이뻐 보였다. 여자친구는 한 바퀴 휙 돌며
"어때? 이뻐?"라고 물었다. 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했다. 만족스러웠는지 여자친구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문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에서도 유독 눈에 들어왔던 여자친구의 옷차림. 미용실에 도착해서 난 머리를 하는 와중에도 거울에 비치는 여자친구를 바라봤다.
정말 고맙고 미안했다. 이뻤고 더 열심히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거울을 보고 있었는데 여자친구는 날 보며 윙크했다.
난 말없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