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군대시절 그 여자(브금주의, 스압주의)
게시물ID : panic_940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삭망월
추천 : 21
조회수 : 2399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7/06/21 01:59:01
옵션
  • 펌글

 

 

----------------------------------------------------------------

이 이야기는 군복무 당시 부대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소설식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 여자가 처음 보였던 날은 장맛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6월의 어느 여름날 밤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속에서, 게다가 비까지 내려 바로 앞에 사람이 서 있어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여자가 보인다는 게 아직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우리 부대는 반경 3km 이내에 민가가 없다.



산 속에 처박힌 구형막사의 부대였다.



밤에 위병소 근무를 서면 유일하게 들리는 소리는 바람소리와 새소리 뿐이다.



간혹 인접 부대에서 야간사격을 하면 총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밤에 우리부대 주변에서는 그 어떤 인공적인 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일병이 되면서 처음으로 위병소 근무를 나가던 날이었다.



우리 부대는 일병이 되어야만 부대 정문인 위병소 근무를 할 수가 있었다.


근무는 새벽 1시에서 2시 근무였다.



초 여름인데도 밤에는 생각보다 서늘했고, 맑디 맑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거의 보름 달에 가까운 달이 떠 올라 주변 시야가 눈에 띄게 넓어졌다.


근무가 지루했는지 내 사수인 김병장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겠다고 하였다.


"야. 저기 앞에 폐가 하나 있지?"


"예"


우리 부대 위병소 전방 50여 미터 전방 우측에 폐가가 하나 있다.


"저 집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내가 얘기해 주지."


김병장은 무슨 일급비밀이라도 나에게 얘기하느 냥 조용히 소근대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쯤일거야.

내가 이 부대에 오기 전에 저 집에 부부와 20살인 딸 한 명이 살고 있었대.

그 집 딸은 이쁜 얼굴은 아니었는데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이 부대 군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고 하더라구.

부부는 사슴농장 일과 인접 부대 병사들을 상대로 여러 일을 대행해 주며 생계를 이어갔지."


"무슨 일을 대행합니까?"


"그거 있잖아. 군대 편지 말고 사제 편지 보내주고, 물건도 우편으로 보내주고, 간혹 읍내에서 사올 물건도 대신 사다 주면서 군인들로부터 돈을 좀 받았지."


나는 왠지 괴기스런 얘기가 나올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우리 부대원 중에 졸라 잘 생긴 놈이 있었는데, 그 집 딸내미와 눈이 맞았나봐.

사람들 얘기로는 여자가 그 놈을 무지하게 좋아했다더라구.

그 놈은 단지 욕정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그 딸내미를 만났고, 그 놈이 아주 나쁜 놈이라는 건 뭐냐면 이미 두 세명의 사회의 여자들이 면회를 왔다갈 정도로 여자가 많았음에도 그 집 딸내미를 계속 몸에 품었다는거야.

 

그 딸은 모든 걸 다 바쳐 사랑하고 있는데 말야.

그런데 말야 그 녀석 제대 날짜가 다가오자 여자는 불안해지기 시작했어.

여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가 자기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은 이미 그 놈한테 모두 가버린거야.

그래서 여자는 남자를 잡기 위해 결국 임신을 택했어.

그런데 그것마저도 그 놈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

그 놈은 그냥 제대해 버렸고, 연락도 끊어버렸지.



군대에선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고 하는데 어찌되었든 제대 후, 그 딸내미가 부대까지 찾아와서 어떡해서든 연락처를 알아보려고 쑤시고 돌아다녔나봐.

그러나 아무도 그 놈과 연락을 취할 수 없었어.

그 뒤로 여자가 한 달여동안 보이지 않았었나봐. 그 녀석 찾으러 다녔을지 모르지.

만났는지 못 만났는지 알 수 없지만 반 해골이 되어서 돌아 온 여자는 거의 실성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

그 부모들도 부대에 와서 그 놈 찾아내라고 다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말야.

그 때쯤 내가 이 부대로 배치 받은 거지.

그런데 말야....... 아, 신발 소름끼쳐..."





"왜 그러십니까?"





김병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말야....어느 날 밤에 위병소 근무자가 근무를 서고 있는데 그 집 딸내미가 집 앞의 우거진 미류나무 사이에서 반듯이 서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봤대.


밤이라서 잘 구분은 안갔는데 사람이 분명하고 똑바로 서서 나무 사이로 자기들을 보고 있더라는거야."

 


"와.....소름끼쳤겠습니다."


"그게 소름끼쳤다는게 아니라......."


김병장은 다시 한 번 침을 꼴깍 삼키며 하고자 하는 나머지 말을 이어갔다.


"여자가 흔들거리더라는 거야."


"으악!!"


난 나도 모르게 숨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주..죽은 겁니까? 목 매달아서....."


공포스러워하는 내 표정이 즐거웠는지 김병장은 조용히 얼굴을 나에게 들이대며 말했다.


"시작은 그 때부터였지..... 저 집이 이사간 뒤로...."

 

"그 여자는 죽었어. 니 말대로 목 매달아서....


그 때가 바로 내가 이 부대에 배치 받은 지 두 달이 다 되어갔을 때지.


나는 미친 여자의 단순한 자살로 알고 있었는데 부대원들의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가 않았어.


모두들 함구하고 있었지만 난 직감적으로 뭔가 큰 일이 뒤에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었지.


그 때 나를 무지하게 아끼던 말년 병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대하기 전 날 이 얘기를 해준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시 이등병이었을 텐데 왜 얘기를 해 준 겁니까?"


"그게 말야.... 그 여자가 죽은 뒤로 위병소에서 근무자들이 그 여자를 봤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거든."


"귀신 말입니까?"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몇몇 야간 근무자들이 그 집 딸내미를 텅 빈 집 근처에서 봤다는 거야."


나는 조용히 침을 한 번 삼켰다.


"근데...어우 신발.....죽을 때 모습 그대로 미류나무 사이에서 흔들리더라는거야."


나는 등골이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 하였다.


"한 번은 그것을 목격한 근무자가 위병소 써치라이트를 켠거야. 그런데 그 때는 보이지 않더래."


나는 지금 김병장에게 꼭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지금도 나타납니까?"


그러자 김병장은 모든 얘기가 끝난 것처럼 나로부터 얼굴을 멀리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니가 이 부대 배치받은 뒤로 한 번도 없었어. 너도 그런 얘기 들어본 것 없잖아."


"네. 그렇긴 합니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그 해 장마가 시작되면서 우리의 근무는 공포의 시간이 되었다.


우리 부대는 규정상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근무자 중 한 명은 초소밖으로 나와 있어야 한다.


때문에 대부분 부사수가 판쵸우의를 뒤집어 쓰고 비나 눈을 맞으며 밖에 서 있게 되었다.


부사수로 정ㅇㅇ일병과, 사수로 최ㅇㅇ상병이 밤 11시 근무를 나갔을 때 얘기다.


간간히 어둠속에서 비가 흩날리는 밤이었다.


우의를 뒤집어 쓰고 20여분 정도 근무를 서고 있던 일병이 초소 안의 상병에게 다가와 속삭이는 말로 얘기를 건넸다.


"최상병님. 무슨 소리 안들리십니까?"


그 때 갑자기 사수인 최상병도 일병을 향해 말했다.


"이런 신발....나만 들리는게 아니었군."


최상병도 정체모를 그 소리를 계속 주목하고 있었던 거였다.


알 수 없는 여자의 소리.......


흐느끼고....간간히 웃기도 하고....뭐라고 그들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뭔가에 홀린 듯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알 수없는 정체의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소밖을 응시하고 있던 최상병이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전방 50미터......전방 50미터......전방 50미터......"


"왜 그러십니까 최상병님"


"야 신발놈아...저거 안보여? 전방 50미터....."


최상병은 소총을 움켜쥐고 초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실탄을 장전하는 것이다.


따라나온 정일병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전방 50미터 쯤에 어둠속에 서 있는 사람 형상.....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 형상이 보이다니.....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우리부대는 최전방 부대이다. GP나 GOP부대는 아니지만 평소에 근무를 설 때 공포탄없는 실탄 근무를 선다.


게다가 장전은 하지 않지만 탄창을 삽탄(탄창을 총에 끼워 넣는것) 상태로 한 후 근무를 서게 되어 있다.

 


그런데 최상병이 철커덕 소리를 내며 장전을 하는 것이다.


 

뭔가 큰 일이 터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그들을 감쌌다.


최상병은 겁에 질린 게 확실했다.


50미터 전방에 있는 사람에게 수하를 하다니.....


얼떨결에 똑같이 목표를 조준하고 있는 정일병도 마찬가지였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벽돌..."


최상병은 암구호를 외쳤다.


응답없는 사람의 형상....


"벽돌!!!"


정일병은 그 사람의 형상이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지금 이대로 있다간 최상병이 방아쇠를 당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방 부대라고 하지만 철책 근무를 서지 않는 한 저항하지 않는 미확인 물체에 대해 방아쇠를
당기진 않기 때문이다.

 

최상병의 마지막 암구호가 울려퍼졌다.


"벽돌!!!!!!!!!!!"


"안 됩니다!!!!!!!!! 최상병님!!!!!!!!!!"


정일병은 급하게 최상병 소총의 방열판을 움켜쥐었다.


"너 뭐야 새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휘둥그레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는 최상병의 얼굴이 정일병에겐 더한 공포로 다가왔다.


"안됩니다. 민간인이면 어떡합니까? 부대에 들어온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사수고 누가 부사수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최상병은 조용히 일어나 그 형상을 아무말 없이 주시했다.


빗방울이 엄청나게 굵어지고 나서야 그 형상은 사라졌다.


한 동안 멍하니 초소 밖에서 자리를 지키던 최상병은 아무 말없이 떨리는 손으로 장전된 총알을 분리하고 탄창에 다시 끼워 넣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부대 전체로 퍼졌다.


한 동안 잠잠했던 귀신소동이 다시 시작된 것이었다.


군인 정신을 강조하는 중대장의 엄한 훈계가 있었음에도 부대원들은 그 소문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침 점호가 끝나면 그 날의 근무 시간표가 붙여지는데 모든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밤시간대 위병소 근무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진짜 사건은 다른데서 터졌다.

 

 

 

 

우리 부대의 최악의 근무지는 바로 탄약고였다.


탄약고는 부대 내무반으로부터 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주변의 참나무와 아카시 나무 때문에 시야가 잘 확보가 되지 않는다.


탄약고 초소 앞에는 작은 계곡이 있고 그 계곡을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작은 나무다리가 있다.


초소 뒷편으로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겁나는 것은 그 언덕 뒤가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이다.


버려진 묘지들이 아닌 공원묘지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밤 근무자에겐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부대는 지원부대다.


1년 중 2~3개월은 부대원의 반 이상이 훈련지원 파견을 나가기 때문에 근무 인력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위병소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초로 근무를 선다.


탄약고에 배정받은 근무자는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을 만난 것이다.


산 속의 공동묘지를 끼고 있는 초소에서 한 시간동안 혼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탄약고 근무는 보통 상병들이 나간다.


박ㅇㅇ상병은 우리 부대에서 강한 군인의 상징이다.


강심장인지는 모르지만 몸짱에 항상 남자다운 성격으로 간부들이나 고참들로부터 신임을 독차지하는 사람이다.


그 날은 새벽 2시 근무였다.


"야! 이 강아지야! 정신차려!!!!!!"


인터폰으로 통화하던 당직하사의 큰 호통 소리에 당직사관인 소대장이 벌떡 깨어났다.


"야...뭐야?"


"박ㅇㅇ, 이 미친 새끼가 헛 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뭔 소리?"


"초소에 누가 자기와 같이 있답니다."


"뭐?"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을 가르는 총소리가 들렸다.


"탕!!!!!!!!!!!!!"


소대장과 당직하사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후 미친 듯이 탄약고를 향해 뛰어 갔다.


잠에서 깬 2~3 명의 말년 고참들도 따라서 뛰쳐 나갔다.


100 여 미터를 달려 황급히 도착한 탄약고.


나무 다리를 건너 누군가가 웅크리고 앉아 탄약고 쪽을 총으로 겨누고 있었다.


장마철이었지만 간간히 구름 사이로 비치는 달빛 때문에 누구인지는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후레쉬를 박상병 등에 비추던 소대장이 물었다.


"박ㅇㅇ. 니가 쐈어?"


아무 말 없이 몇 초간을 계속 탄약고를 주시하던 박상병이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후레쉬 불빛 속에서 확인된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당시 목격했던 고참들 얘기로는 박상병의 튀어나올 듯 크게 부릅 뜬 눈이 너무나도 무서웠다고 한다.


소대장은 신속히 박상병의 총기를 회수하고 탄약고 근무를 2시간씩 복초근무로 돌렸다.


행정반에 돌아와서도 반 넋이 나간 사람처럼 흐느적 거리는 박상병의 목덜미를 당직하사가 움켜 쥐었다.


"야 x친 놈아. 정신차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박상병에게 소대장은 물었다.


"무슨 일이야?"


고개를 떨구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르는 분비물을 떨구며 박상병은 입을 열었다.


"소대장님. 귀신을 봤습니다."


이 한마디에 행정반에 있는 사람들은 몇 초동안 아무말도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탄약고 초소 새벽 2시 근무자인 박상병은 이전 근무자와 교대를 하였다.


이전 근무자로부터 특별한 이상 징후를 보고 받지 않았기 때문에 박상병은 늘 그렇게 자연스럽게 근무에 임했다.


탄약고 초소는 조금 특이하게 만들어져 있다.


블럭벽돌로 가슴 높이까지 쌓아올린 구조에 천장은 슬레이트로 덮어져 있다.


벽돌과 천장 사이에는 네 개의 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고 정면의 공간은 유리, 그리고 측면과 후면은 비닐로 둘러싸여 있다.


20여분이 지났을까? 박상병은 바람소리 사이로 들리는 작은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박상병은 스스로 강건해지려고 했지만 정체모를 그 소리 때문에 초소밖으로 일단 뛰쳐 나왔다. 그리고 초소 뒤쪽 공동묘지가 있는 언덕을 향해 총을 겨눴다.


"아...신발 뭐야?"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면서도 박상병은 계속 자신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 여자의 소리는 조금씩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야..........하하하......'


박상병은 자신도 모르게 총알 한발을 장전하였다.


전에 있었던 귀신소동이 사실이 아니길 바랬지만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야이 신발년아 나와!!!!!!!"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 미터 언덕 위에 나타난 희멀건 형상.


극도로 흥분한 상태임에도 박상병은 천천히 초소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인터폰을 집어들었다.


"탄약고 초..초소에 누가 있습니다...지금.."


인터폰으로 통화를 하는 와중에 박상병은 부시럭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바로 코 앞의 유리창 정면에 나타난 희멀건 형상.


박상병의 온몸은 굳어버렸지만 오른쪽 엄지손가락은 조용히 소총의 안전핀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고개를 돌렸다.


유리창에 나타난 그 희멀건 형상이 자신의 뒤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박상병은 고개를 모두 돌려 그 정체모를 형상의 얼굴을 확인할만큼 강심장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는 와중에 박상병은 방아쇠를 당겨 허공에 총탄을 날린 후 미친 듯이 초소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나무다리를 건너 참나무 아래에 웅크린 후 초소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래도 난 아직도 박상병이 엄청난 강심장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일 그 여자 형상이 초소안에서 내 뒤에 있다고 생각되었다면 난 그자리에서 기절하였을지 모른다.


모든 얘기를 마친 박상병은 내무반으로 조용히 이동하였다.


이미 내무반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였고 무슨 영문이지도 모르는 부대원들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들어오는 박상병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야. 당분간 박ㅇㅇ, 야간근무 열외시켜."


행정반에서 들리는 소대장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무표정한 얼굴의 박상병은 침상에 걸터앉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두 세번의 긴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몇몇 병장들의 괜찮냐는 질문에 박상병은 괜찮다며 근무복장을 조용히 해체했다.


그러나 빨갛게 충혈된 박상병의 두 눈을 보고 더 이상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그 뒤로 박상병은 며칠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다.


위병소에 이어서 이번엔 탄약고라니........

 

 





부대 전체는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공포가 서서히 엄습해 왔다.



박상병 사건 이후로 위병소와 다른 초소는 정상적으로 돌아갔지만 탄약고는 두 시간 교대 복초로 바뀌었다.


밤 근무를 두 시간씩이나 서야 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혼자 공동묘지를 끼고 산속에 한 시간동안 처박혀 있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견 나간 부대원들이 돌아오면 한 시간으로 줄기 때문에 당분간은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귀신소동은 드디어 나에게까지 찾아왔다.


그 날은 정말로 기분 나쁠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새벽 2시 근무였는데 하늘에 구멍이 났는지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나는 판쵸우의를 뒤집어 쓰고 밖에 서 있었으며, 나의 사수인 정ㅇㅇ상병은 초소안에 처박혀 무엇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끄러웠다. 판쵸우의로 덮은 헬멧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주변 숲의 나무잎을 강타하는 빗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게다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장대비가 쏟아져서 그야말로 전방 1미터안의 물체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말로 누가 바로 코 앞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내가 그 형상을 발견한 건 근무시작 20분이 지났을 때였다.


난 아직도 그 시간을 기억한다. 새벽 2시 20분.....


내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시계에 내장된 조명등을 켜고 봤을 때이니까.




2시 20분.....시간을 확인한 나는 다시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전방 십수미터 정도에 희멀건 형상이 미류나무쪽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너무나 어두워 미류나무에 매달려 있는 건지 그냥 떠 있는 건지 모르지만 그냥 미류나무쪽이었다.


난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고참들이 얘기해 준 적응시라는 말이 떠올랐다.


"불빛을 보고 아주 어두운 곳을 쳐다보면 망막에 잔상이 남는다. 보통 파르스름하게 잔상이 나타난다.


그 때는 눈을 10초 정도 감았다가 떠라.


그리고 한 곳을 오랫동안 쳐다보지 마라. 니 머리가 사물을 왜곡시켜 표현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속으로 10초를 세면서...


그리고 눈을 떴다.


그러나 나는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그것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10초를 세는 동안 나는 이미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다시 눈을 떴다. 아직도 그 형상이 있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고 나는 입 속에 빗물이 쏟아져 들어감에도 위를 향해 입을 크게 벌려 긴 호흡을 하였다.


그 희멀건 형상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나를 내 스스로 진정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형상을 주시한 채 정상병을 불렀다.


"정ㅇㅇ 상병님!!!!!!!"


들릴 리가 없었다.


4~5미터 거리지만 서로 볼 수도 없을 뿐더러 내 목소리는 이미 빗소리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정상병이 있는 반대편 초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만히 초소안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정상병을 불렀다.


"정ㅇㅇ 상병님!!!!!!!"


그러자 갑자기 정상병이 움찔하더니 나를 뒤돌아 보았다.


"앗.. 신발 놀래라.....무슨 일이야?"


"잠깐 나와 보시기 바랍니다."


"뭔데?"


"저기 미류나무 쪽에 뭐가 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정상병은 판쵸우의를 뒤집어 쓰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내가 가리키는 쪽을 쳐다 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영화처럼 조금 전만 해도 미류나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런데 정상병은 내 말을 믿어주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보였단 말야?"


"네."


"어떻게 보였는데?"


"그냥 희뿌옇게 보였습니다."


"어디로 갔어?"


"미류나무쪽 중간 쯤 있다가 아래로 내려오는 것까지 봤습니다."


"그 귀신년인가 보다. 이 신발년 죽여버리든가 해야지..."


상병 말호봉인 정상병은 짬밥에 걸맞게 아무 것도 아닌 냥 나에게 겁먹지 말라고 충고했다.


정상병은 내가 걱정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는지 초소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와 똑같이 비를 맞으며, 내 옆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다소 안심이 되었지만 그 편안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번엔 소리가 들렸다.


천지에 쌀알이 쏟아지는 듯한 빗소리에 섞인 작은 소리........


"에..엑..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가 없었지만 몇 십초가 지나자 곧 알아들을 수 있었다.


토하는 소리였다.


"우...에..엑......우.....에..엑"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오금이 저리다는 것을 느껴봤다.


전기를 맞은 것처럼 무릎관절이 찌릿거렸다. 정말로 주저앉고 싶었다.


정상병도 나와 똑같은 소리를 듣고 있는게 확실했다.


"이....신발년...."

 

정상병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욕을 내 뱉았다.

 

 

내 머릿속의 두뇌는 어떡해서든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수 만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열심히 작업중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적당한 답안을 제시했다.


"개구리..........."

 


"뭐?"


"정상병님..개구리 소리 아닙니까?"


나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정상병은 그제서야 내 말에 맞장구를 쳤다.


"잘 들어보니 그렇기도 하다."


아무 말없이 잠시 그 정체모를 소리를 듣고 있던 정상병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아까 니가 봤다던 건 뭐야?"


"그게...저..............."


내 머릿속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안 되겠다. 요 앞까지 순찰 좀 해보자."


"순찰 말입니까? 그냥 본대에 연락하심이...."


"이 새끼 겁 졸라 많네. 당직사관 오늘 누군지 알아? 수송관이잖아. 그 미친 똘아이 새끼.

그 새끼가 니 말을 믿어 주겠냐고? 아마 군화발로 이단 옆차기 할거다."


난 나름대로 강심장이라고 생각하며 내 스스로를 단련시켜왔지만 솔직히 겁이 많다.


차라리 수송관한테 욕먹고 이 상황을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더 간절했다.

그러나 수송관 못지 않은 성격의 정상병은 이런 나의 생각에 절대로 동의할 인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우리 둘은 손전등을 손에 쥐고 그 토악질하는 소리를 향해 조금씩 걸어나갔다.


장대비 속에서 손전등을 비추는 것은 그야말로 무의미했다.


빗줄기에 빛이 산란되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우...에....엑.....우...에....엑.."


거의 십수미터 전방까지 다다른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깨에 매달린 K-2소총의 개머리판을 펴고 총구를 들어올려 전방을 조준했다.


내 머리는 더 이상 전진하지 말것을 명령하고 있었지만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철커덕!!!!!!!!!!!"


정상병이 갑자기 장전을 했다.


안전핀을 풀었는지 안풀었는지 모르지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


제발 정상병이 미쳐 날뛰지 않길 바랄 뿐이다.


행여나 정상병이 나를 귀신으로 본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 멀어야 10미터 전방이다.


땀인지 빗물인지 모르는 액체로 내 얼굴은 이미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런데 수미터 앞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고안한 답안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분명 사람소리였다. 개구리 소리가 아니었다.


아직도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렸지만 이건 분명 사람소리였다.


"우......에..엑!!......우.......에..엑!!"


손전등을 비추었지만 확인이 안되었다.


잡초와 잡목으로 우거진 덤불속이라 직접 파헤치지 않는 한 그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정상병은 떨리는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형체를 조준하며, 수하를 했다.


"누..누구냐?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그러자 갑자기 소리가 멈추었다.


심장이 터질 듯 했고, 온 몸이 오그라드는 듯 했다.


그 토악질 소리가 들리지 않자 빗소리만이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그 시끄러운 빗소리도 우리 둘에게는 무섭도록 소름끼치는 고요한 적막이나 다름 없었다.


"써치라이트 켜!!!"


"예?"


잠시 넋이 나간 듯 나는 정상병의 명령을 놓치고 말았다.


"초소의 써치라이트 켜라고 새꺄!!!!!!"


그제서야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치며, 초소로 향했다.


위병소는 야간 근무 중에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써치라이트를 켤 수가 없다.


써치라이트를 켜면 그 날 근무일지에 보고를 해야 되며,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 저것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초소 안의 스위치... 그것을 올리는 것만이 나를 진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난 초소에 들어가기도 전에 내 바램이 어긋났음을 알게 되었다.


초소문을 열자 초소안에 누가 있는 것이다.


손전등에 비친 흰색과 검은색...


전설의 고향에서나 볼 수 있는 처녀귀신이라고 부르던 흰 소복의 검고 짙은 긴 생머리....


어쩌면 단순한 흰색과 검은색을 내 머리가 그렇게 해석했는지도 모른다.


눈으로 보이는 검은색 두 점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더 이상 내 두다리는 버티지 못하였다.


기절해 보았는가?

 

 

 

 

 

 

 





창피한 얘기지만 나는 훈련소에서 행군 중에 탈진으로 기절해 본 적이 있다.


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수통의 물을 한꺼번에 들이키는 바람에 염분부족으로 탈수와 탈진이 동시에 온 것이다.


6시간 넘게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과 천근만근같은 몸을 이끌고 난 계속 걸었다.


그리고 도착지점 200여미터를 앞두고 안도감이 밀려오자 나는 바로 쓰러져 버렸다.


그런데 그 때는 기절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난 내가 잠깐 잠이 든 줄 알았다.

조교와 동기들의 도움으로 난 몇 초만에 바로 깨어났다. 그리고 행군을 완료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나른해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미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외마디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헉!"


내가 소리낸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러나 이건 소리도 아니다.


숨이 나오다가 목에 걸린 것이다.


영화 속의 비명은 다 거짓이었다. 정말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갑자기 사물이 멀어지고 눈 앞의 영상이 시선 중심으로 모아지면서 주변이 TV화면 꺼지듯이 어두워진다.


그래도 난 군인이었나 보다.


무릎을 털썩 꿇어 주저앉으며 기절 직전까지 갔지만 내 오른손의 소총은 놓지 않았다.


내 머리는 그 여자를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떨어뜨린 손전등 때문에 그 형상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소총을 들어 쏘라고 명령하였지만 정말로 바늘하나 들어올릴 힘조차 없었다.


"저..정ㅇㅇ 상병님....정ㅇㅇ 사..상병님...."


난 미친 듯이 정상병을 불렀지만 만취한 사람처럼 혀가 구부러져 발음이 되지 않았고, 가는 숨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기세에 눌린 나는 바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뭐하고 있어 강아지야!!!!!!"


정상병의 미친 듯한 외침이 들렸다.


"야 이 신발놈아!! 불켜라고!!!"


그런데 나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자세로 머리를 숙인 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장대비만 계속 맞고 있었다.


'차라리 기절해 버렸으면 좋겠다. 바보같은 내가 정말 싫다. 개병신이다. 머저리같은 새끼. 지랄맞은 새끼'


이런 내 스스로를 자책하는 생각이 머리속에서 맴돌자 눈물이 쏟아졌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정상병이 참지 못하고 돌아왔다.


내 오른쪽 뺨에 손전등이 비춰지는 것이 느껴졌다.


"야....너 왜 그래?"


조용히 다가와 내 얼굴을 확인하던 정상병이 또 다시 물었다.


"야 신발놈아. 초소에 불 켜라고 했는데 너 뭐하고 있는거야?"


난 그제서야 고개를 천천히 돌려 울먹이며 거친 말을 내뱉았다.

"이...씨..신발..초소안에 있단 말입니다."


 

 

 

 

헉헉대는 정상병의 거친 숨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뭐? 뭐라구?"


"그 신발년이 초소안에 있단 말입니다."


평소 거친 언행을 하지 않는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뱉는 욕설을 막을 수 없었다.


정상병은 후다닥 총을 초소쪽으로 겨누고 천천히 손전등을 비추었다.


이리저리 살피던 정상병이 내게 물었다.


"뭐 ....뭐......뭐가 있다는 거야? 응? 아무 것도 없잖아"


화가 난 듯한 정상병은 초소문을 부셔져라 쾅 닫아 버렸다.


오늘 그 여자가 날 엿먹이려나 보다.


이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갑자기 군화발이 내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정상병이 욕설을 내뱉으며 나를 발로 밀어버린 것이다.


"이 강아지야! 정신 안 차려!!"


무릎을 꿇은 상태에 넘어진 나는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바보같이 보이는 내가 미웠는지 정상병은 다시 한번 군화발로 내 가슴팍을 밀어붙여 나를 넘어뜨렸다.


"병신같은 새끼!! 일어나 이 강아지야!! 이런 일로 주저앉아 있냐? 이 xx새끼야!!"


내가 상체를 다시 일으키자 정상병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나를 넘어뜨렸다.


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무능한 군인처럼 보이는 내 자신이 미울 뿐이었다.


수 차례 정상병의 발길질이 끝나자 그제서야 나는 제 정신이 드는 듯 했다.


온 몸에 독기같은 기운이 솟아나는 느낌이었다.


난 정상병의 마음을 이해한다.


나도 내 자신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정상병은 한 동안 내 앞에 서서 거친 숨을 수차례 몰아 쉬었다.


"헉헉...뭐가 있다는거야? 강아지...헉헉."


이 말이 끝나자 정상병은 초소문을 거칠게 열어제끼고 들어가 서치라이트 스위치를 올렸다.


순간 전방 50여미터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역시나 장대비 때문에 빛이 산란되어 사물은 정확히 확인이 안되었다.


주변이 밝아졌음을 느낀 정상병은 다시 그 소리가 나던 덤불 숲으로 미친듯이 뛰어갔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소총을 움켜쥐고 정상병을 따라 뛰어갔다.


"이 신발년아!! 나와!! 어딨어? 이 신발년!!!"


미친 사람처럼 정상병은 덤불 숲속에 들어가 발길질을 하고 소총의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이 개년 죽여버리겠어!!! 나와 이 썅년아!!"


무려 5분여동안 미친 듯한 행동을 반복하던 정상병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상병이 덤불숲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판쵸우의의 여기저기가 찢겨있고, 그의 온 몸은 빗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뒤집어쓴 판쵸우의와 헬멧라인 아래로 콧날과 입만 보이며 긴 숨을 내 뱉고 있는 정상병의 모습은


조금 전의 그 형상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돌아가자."


좀 전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나즈막한 억양으로 정상병이 말을 했다.


정상병이 총을 쏘지 않은 걸 보면 행동은 미친 듯 보였지만 정신은 있었나 보다.


초소로 돌아와서야 우리는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정상병은 초소 문앞에서 한 번 멈칫하더니 천천히 초소 문을 열고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통신보안, 상병 정ㅇㅇ입니다."

서치라이트의 스위치를 조용히 내리며 정상병은 수송관에게 서치라이트를 켜게 된 경위를 보고하고 있었다.


"자세한 건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치광이 수송관이 우리 말을 믿어줄까 염려가 되었지만 정상병의 판쵸우의가 여기저기 찢겨있고, 두려움에 휩싸인 듯한 우리 둘의 모습을 본 수송관은 30분이 넘도록 조용히 우리 얘기를 들어 주었다.


결론은 역시 내가 헛 것을 본 걸로 끝났다.


"들어가 쉬어라. 오늘 들은 얘기 내일 중대장한테 보고하겠다."


그 날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적은 이 부대에 처음 배치받은 날 빼놓고 처음이다.


다음 날 우리는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결론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날 만큼은 중대장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군인정신 부족같은 훈계는 하지 않았고, 근무에 열중하라는 말만 하였다.


그 날 이후로 정상병은 말이 없어지고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쉬는 시간이면 내무반 뒷뜰에 혼자 앉아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우리는 소대별로 돌아가면서 일주일 동안 식당청소와 아침 근무자 식사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주는 우리 소대가 담당이었다.


밥을 챙길 수 없는 아침 근무자의 식사는 담당 소대가 미리 준비해놔야 한다.


그런데 배식과 청소에 열중한 나머지 아침 근무자의 식사가 늦어진 것이다.


근무자가 돌아왔을 때 부대원들은 거의 식사가 끝나가는데 근무자 식사가 준비 안된 것이다.


근무자인 1소대 이상병이 우리 소대 일병들에게 다가와 짜증을 냈다.


"이 자식들이 어디다 정신팔고 다니는거야?"


그제서야 근무자 식사를 깜박했다는 사실을 안 일병들은 밥을 먹던 도중 급히 일어나 사과했다.


"시정하겠습니다. 곧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일병 막내축에 속하는 나는 후다닥 식판 두 개를 들고 배식판으로 향했다.


이상병은 계속 아니꼽다는 듯이 성질을 냈다.


"2소대 왜 그래? 정신차려 임마!! 니네 귀신 나타났다고 위병소에 불도 켰다며?"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정상병이 음식물이 담긴 식판을 이상병에게 던져버렸다.


"이 신발새끼가 어디서 지랄이야!!"


욕설과 함께 미친 사람처럼 눈을 부릅뜨고 정상병은 이상병에게 달려들어 주먹과 발길질을 사정없이 날렸다.


며칠 전 밤에 보았던 정상병의 그 모습이 다시 재현된 것 같았다.


여느날 같았으면 뜯어말리고 끝날 일이었지만 그 날은 정상병이 큰 실수를 하였다.


중대장이 사병식당에서 식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중대장 앞에서 사병들간의 그런 험한 꼴을 보였으니 난리가 아니었다.


분노한 중대장은 정상병과 이상병에게 군장을 매고 연병장을 돌 것을 명령했다.


늘 보는 얼차려이지만 다른 점이라면 그 날은 군장 속에 모래와 자갈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중대장은 굉장히 엄했다.


반나절동안 쉬지 않고 뺑뺑이를 돌리는 것도 모자라 점심시간이 되자 식당까지 포복으로 기어서 가도록 했다.


서서 밥먹는 중에도 군장을 벗지 못하게 했고 식사가 끝나자 다시 포복으로 연병장까지 기어가 뺑뺑이를 돌게 만들었다.


부대 분위기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침체되어 있었다.


무슨 조치를 취해야 했지만 무엇을 해야 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룻동안의 얼차려가 끝나자 정상병은 이상병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낸 후 조용히 내무반 뒷뜰로 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몸은 물을 끼얹은 듯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그가 괜히 나 때문에 얼차려를 받은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정ㅇㅇ 상병님.. 괜찮습니까?"


나의 물음에 정상병은 아무 대답도 없이 담배만 깊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멍하니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담배만 빨던 정상병이 입을 열었다.


"야.....이ㅇㅇ"


"일병! 이ㅇㅇ!!"


"그날...니가 귀신봤다는 날...."


"예.."


"니가 초소안에 그 여자가 있다고 했을 때 말야..내가 확인했잖아"


"예.."


정상병은 계속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지막 한 모금의 담배를 빨며 말을 이었다.





"나도 초소안에서 그 여자 봤다.."

 

 

"예?"


"나도 너처럼 그 여자 봤다구..."


"그런데 왜 가만히 계셨습니까?"


정상병은 담배 꽁초를 슬리퍼 바닥으로 짓이기고, 다시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말을 이어갔다.


"반투명한 희멀건 여자형상이 허공에 반쯤 떠 있더라. 그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어. 내가 어떻게 해 볼 상대도 아니었어.

너무 겁이 나서 얼른 문을 닫았어. 정신 차리고 뭔가를 해야겠는데, 아니 미친 척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니가 그러고 있는 걸 보니까 화가 갑자기 치밀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수송관이나 중대장한테 그 얘기 안하셨습니까?"


"넌 부사수고 난 사수 아니냐. 게다가 다음 달이면 병장 달 놈이 그런 소리하고 있으면 날 뭘로 취급하겠냐?

본의 아니게 너만 찌질한 놈으로 만든 것 같다."


그 해의 장마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조금씩 정상병은 정상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부대원들은 야간근무에 대한 공포감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조명이 없는 탄약고에 백열등이 설치되었고, 조금만 이상한 징후라도 보이면 위병소에 불이 켜지기 일쑤였다.


우리는 빨리 파견 나간 부대원들이 돌아오길 염원했다.


또 한번의 소동이 벌어진 것은 장마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완전히 장마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며칠동안 구름만 껴있고 비가 거의 오지 않았다.


그 날은 야간사격을 하는 날이었다.


주간 사격때는 보통 소대장이 인솔을 하는데 그 날은 중대장까지 참가를 하였다.


우리 부대는 자체 사격장이 있다.


연대나 사단규모 사격장보다 작고, 표적도 자동화 타겟이 아니지만 150미터까지 표적을 설치할 수 있는 비교적 중급 규모의 사격장이었다. 대신 사로의 수는 작아서 동시에 5명 정도만이 쏠 수 있었다.


조그만 산 중턱쯤에 사격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사로로부터 뒤쪽 10여미터 아래에는 작은 연습장 겸 대기소가 있다.


그날 야간사격은 영점조준용 종이타겟을 25미터 전방에 놓고 실시하였다.


야간 사격을 할 때는 가늠자와 가늠쇠에 형광물질을 바른다.


야간 사격은 가늠자 구멍을 통해 조준이 어렵다. 따라서 두 군데에 발라놓은 형광물질의 위치를 일치시키고 대충 쏘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표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표적을 맞추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 누가 보름달도 아닌 구름 낀 그믐달 아래서 보이지도 않는 25미터 거리에 있는 A4규격의 황토색 재생용지를 맞추겠는가?


그냥 감으로 쏘는 것이다.


때문에 가끔 말년 고참들은 소총의 안전핀을 단발이 아닌 자동으로 놓고 9발을 그냥 드르륵 갈겨버리기도 한다.


말년 병장들이 하니까 중대장이 모르는 척 하는거지 내가 그랬으면 당장 얼차려를 받을 일이다.


"1조 탄창 삽입!!!"


"탄창 삽입!!"


"탄알 일발 장전!!"


"탄알 일발 장전!!"


"준비된 사수부터 사격 개시!!!"


"탕..타타타타탕..."


난 화약 냄새가 좋다. 어깨를 전해지는 소총의 반동이 좋다.

그리고 이산 저산에서 메아리치는 소총소리가 좋다.


난 총을 잘 쏜다. 논산 훈련소 자동화타겟에서 전진무의탁 자세로 20발 중 19발을 맞춘 적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쏴 보는 총이었는데 조교가 사회에서 총 쏴봤냐며 물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격은 나에게 군생활 동안 고마운 존재엿다. 나에게 휴가를 한번 더 보내줬으니까...



안전검사를 마치고 1조 사격이 끝나자 뒤에 서서 대기하던 2조가 사로로 진입했다.


바로 그 때였다.


"사격 중지!!!!!!!!"


중대장의 엄명이 떨어졌다.


중대장이 왜 사격을 중지시켰는지 사로에 서 있던 모든 부대원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표적 너머 숲이 시작되는 곳에 희멀건 형상이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몇몇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대부분은 볼 수 있었다.


사람일리는 없다. 사격장 주변은 목책과 시멘트 방호벽으로 이중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람이 들어올 수 없을 뿐더러 일단 부대 반경 3km이내에는 민가가 없다. 인접한 부대도 없다.


간첩이라면 x친 놈이 아니고서야 사격장 표적 근처에서 자신을 드러내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사격 전에 표적지 주변을 순찰하고, 사격 5분 전에는 사이렌까지 울리고 경고방송까지 한다.


집단 최면이 아니라면 우리 대부분은 두 눈으로 그 형상을 본 건이다.


사격 중지를 명령한 중대장은 한참동안 말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움직이지 않는 형상만을 주시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그 형상에게 큰 소리로 말을 걸었다.


"어이!! 거기 누구요?"


메아리처럼 중대장의 목소리가 사격장 주변을 맴돌았다.


아무 반응이 없는 그 형상.


갑자기 중대장이 그 형상이 있는 표적지 뒤의 숲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중대장...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얘기 좀 합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형상은 말이 없었다.


가까이 접근한 중대장은 그 형상이 뭘로 보였을까?


목책과 방호벽 때문에 어쩌면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격장은 사로에서 표적지까지 완만한 U자로 구부러진 형태라 표적지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면 목책과 방호벽 뒷편이 보이지 않는다.


중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왜 우리 부대원들에 이러십니까? 우리 얘기 좀 합시다. 왜 우리 부대원들을 괴롭히십니까?"


그런데 중대장의 이런 질문에 돌아온 것은 외마디 비명소리였다.



"으아아아악!!!!!!!!!!!!"


우리는 동시에 살을 에는 듯한 전율과도 같은 소름에 할말을 잃어버렸다.


내 옆의 고참들의 숨소리같은 말소리가 들렸다.


"와...신발 잠이 다 확 깬다."


중저음의 여자 목소리. 톤은 낮았지만 확실히 남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냥 비명소리가 아니었다.


TV 사극에서 고문을 당할 때 고통에 못 이겨 울부짖는 소리!!!!!!!


우리를 깨운 건 중대장의 외침이 들렸다.


"야..밑에 있는 부대원들 전원 소집시켜!!!!!!!!"


우리는 근무자를 제외한 한 명의 열외도 없이 총과 손전등을 준비하고 표적지 주변으로 모였다.


"잘 들어라. 오늘 그 년이 누구인지 잡는다.


1소대는 사격장 왼쪽, 2소대는 사격장 오른쪽 외곽으로 돌아라.


3소대는 정면 쪽문을 통해 나가서 숲속을 뒤진다.


그리고 4소대는 나와 함께 위병소 뒤쪽의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숲속을 살핀다.


그리고 탄창 분리해라. 절대로 총을 쏴서는 안된다. 싸우더라도 총을 쏴서는 안된다.


소대장은 내려가서 위병소 포함 부대 내의 모든 근무자들에게 불을 밝히라고 해라.


모두 산 정상까지 올라가면, 수색을 종료한다."


이렇게 해서 1시간 동안 우리의 야밤 순찰은 시작되었다.

 

2소대에 속한 나는 사격장 오른쪽 외곽으로 진입하여 목책과 방호벽 외곽 주변을 샅샅히 수색하기 시작하였다.


며칠 동안 비가 거의 안왔음에도 아직도 산속의 흙은 걷기 불편할 정도로 질퍽거렸다.


게다가 나무 사이 사이에 있는 무성한 덤불과 잡목은 우리의 전진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부대원들이 같이 있음에도 수색작업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우거진 덤불 속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손으로 하나씩 열어제낄 때마다 누군가가 바로 코 앞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산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우리 부대는 가을에 이 산에서 싸리나무 채취작업을 한다고 했는데...


길을 잘 모르는 졸병들이 길을 잃을까봐 고참들은 수시로 2미터 이상 서로 떨어지지 말 것을 계속 강조했다.


30여 분이 지나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속에서 부대쪽을 내려다 보니 부대 전체가 하얗게 밝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 뿐만 아니라 거의 부대원들의 생각은 같을 것이다. 이 여자는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의 예상은 맞았다.


수색 시작 1시간 뒤 쯤에 우리는 모두 아무런 소득없이 산 정상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그 날 야간사격은 그렇게 끝났다.




밤 12시가 넘도록 행정반에서 중대장과 소대장, 그리고 말년 병장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소동을 겪었던 모든 사병들과 말년 병장들, 소대장, 수송관 모두가 다음날 아침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물론 나도 거기에 속해 있었다.


모두들 하나부터 열까지 빠짐없이 얘기를 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듯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부대에 오기 한 참 전에 한 사병이 외곽 초소 근무 중에 총을 난사했다고 한다.

다행이 같이 있던 근무자를 포함 아무도 상해를 입지 않았지만 그 사병은 군기교육대로 끌려갔고, 부대에 복귀하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다른 부대로 전출갔다는 것이다.


당시 그 사병은 무엇에 홀린 듯 미친 사람처럼 욕설을 하며 근무지 주변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야기가 한 시간 쯤 지나자 우리 부대에서 5년 넘게 근무 중인 수송관이 목매달아 죽은 그 여자 얘기를 꺼냈다.


중대장은 이 부대에 부임한지 2년이 채 안된다. 때문에 그 여자 얘기를 처음 듣는 것이었다.


중대장은 신기한 듯이 수송관의 얘기에 귀를 귀울였다.


중대장은 이 얘기를 부대원들이 모두 알고 있느냐 물었고, 수송관은 대부분 알고 있을거라고 대답했다.


잠시동안 입을 굳게 닫고 있던 중대장이 무엇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도 군생활동안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기이한 얘기를 많이 들었었고, 직접 몇 번 경험도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무시하고 지나갈 수준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좀 다른 것 같다.

지난 번 처음 사건을 보고 받았을 때 나는 사태의 심각성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대장에게 보고하겠다."


이에 수송관이 물었다.


"보고해서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천도제라도 지내야 되지 않겠나?"


"예? 천도제요? 이승을 떠도는 귀신을 달래서 저승으로 보낸다는 그 천도제 말입니까?"


"그렇네. 지금 부대원들의 사기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짚푸라기라도 잡아야 되지 않겠나?"

"에이...대대장님이 기독교 신자인데 허락하시겠습니까?"


"안돼면 내가 나서서라도 해야지."


이 때 대대장이 부대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우렁찬 경례소리가 위병소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잠시 후 중대장을 포함 모든 간부들은 CP앞에 정렬하여 대대장을 맞이했다.


나중에 소대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인데 중대장이 대대장의 설득 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무속이 아닌 불교식의 천도제를 지내기로 했다.


며칠 후 중대장의 사비로 음식을 간단히 준비하고 불교 군종병의 섭외로 인근 절의 주지스님을 모셨다.


천도제는 오전 10시 위병소 옆 공터에서 그녀가 살던 집을 마주보고 시행되었다.


근무자와 취사병을 제외한 모든 부대원이 집결하였다.


물론 대대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주지스님을 대대장 1호차로 모셔오라고 명령했다.


대대장 1호차를 타고 누군가가 위병소 정문 앞에서 내렸다.


나이는 들어보였지만 깨끗한 승복을 입은 아주 선하고 강직한 인상의 스님이었다. 오늘 천도제를 주관할 분이었다.


제단 앞에 서서 열중쉬어 자세를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그 스님은 입을 열었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는 요절, 횡사, 자기 집이 아닌 타관·거리에서 죽는 객사, 결혼하지 못하고 죽는 미혼사, 자살·타살로 인한 죽음, 교통사고 등의 사고로 죽은 사고사 등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도 저승에 들지 못하며 이승을 떠돌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원귀가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통 지박령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지방령들은 처음에 죽었던 곳에 머물며,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거나, 또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살아서 하던 일을 계속하기도 합니다.

이런 원혼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나 자신을 방해한다고 생각이 들면, 처녀귀신이나 몽달귀신같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천도제란 이런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행해지는 의식입니다.

그들의 가슴에 맺힌 한과 억울함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이지요.

이곳에 오기 전에 오늘 제를 지내게 될 원혼에 대한 슬픈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원혼은 자신을 버린 남자을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군인들에 대한 원한으로 이 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하느님을 믿으시는 분은 그 원혼이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고, 부처님을 따르시는 분들은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시기 바라며, 종교 없으신 분들도 오늘만큼은 꼭 이 원혼이 편안히 잠들 수 있도록 기원해 주십시오."


원래 천도제는 보통 두 세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천도제는 30분 정도로 간단하게 행해졌다.


주지스님은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며 중간중간 절을 하였다.


기독교 신자인 사병들은 서서 기도를 했고, 나머지 사병들은 엎드려 주지스님을 따라 절을 했다.


표현의 방식은 달랐지만 오늘 우리 모두의 바램은 모두 같았다.


거의 막바지쯤 술을 올리고 스님은 알아듣기 힘든 내용의 천도제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그 제문을 불태웠다.


30여분 간의 의식이 끝나자 목탁소리가 멈추었다.


끝난 것 같았다.




그리고 주지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쳐들고 무엇인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젊은 처자양반.

이승에 연이 닿지 않는다하여 이렇게 미련을 가지고 구천을 떠돌면 어떡하나?

이승에 연이 없으면 반드시 저승에서라도 연이 닿는 법, 반드시 다음 생에는 자네의 인연을 만날 것이네.

산 자를 괴롭히는 것은 극락왕생을 바라는 죽은 자의 도리가 아닌 법, 이제 그 한서린 마음을 풀고 부디 이승의 끈을 놓게나."


주지스님의 그 말에 감동을 먹었는지 아니면 그 동안의 겪은 일이 서러웠는지 나를 비롯한 몇몇 부대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천도제를 지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다니 왠지 오늘은 그녀가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우연인지 아니면 주지스님의 애절하고도 간곡한 부탁이 통했는지 그녀의 눈물같은 비가 한방울 두방울씩 흩날리기 시작했다.


"중대장님. 한 마디 하시겠습니까?"


"예?"


주지스님의 갑작스런 부탁에 중대장은 머뭇거렸지만 곧 모자를 벗어 왼쪽 품에 안은 후 제단앞에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대원들을 대표하여 이전에 있었던 불미스런 일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이제 우리 부대원들을 용서해 주시고 편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단체 경례를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


 

장마가 끝난 후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잘못을 빌고, 죄를 씻었다는 기분 때문인지 천도제 이후로 부대원들은 사기를 되찾았고, 더 이상 귀신소동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진짜 귀신은 우리 마음 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평안을 되찾자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가 시작되어 훈련이 줄어들면서 파견 나갔던 부대원들이 속속 복귀하기 시작했다.


근무일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부대 생활은 정상으로 돌아갔다.


그 동안의 일어났던 일들을 복귀한 부대원들에게 얘기하자 그들은 마치 재미있는 영화라도 보는 냥 신기한 듯 듣고 있었다.


아직도 그 미스테리한 일련의 사건들의 전말은 풀리지 않고 있지만, 확실한 건 이제 그 일들이 한밤의 해프닝처럼 느껴질 정도로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대 후 나를 또 한번 잊혀졌던 그 어두었던 기억속으로 몰아넣은 일이 있었다.


 

 


영화 '알 포인트'를 봤을 때였다.

 

 


출처 http://pann.nate.com/talk/311239874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