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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읽어볼만한 김기춘 인생사
게시물ID : sisa_9886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노란운동화
추천 : 20
조회수 : 1315회
댓글수 : 37개
등록시간 : 2017/10/13 21:14:45
그는 까마득히 먼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50여년간 검사,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검찰총장, 법무부 장관, 국회의원 등을 두루 지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선 정권 유지를 위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그를 일컬어 ‘법비’, 즉 법을 악용한 도적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최근 기억력이 많이 쇠퇴한 것 같은데, 그를 대신해 그의 인생 ‘10장면’을 복기해보려 합니다. 미처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망령처럼 떠도는 작금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를 다시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유신헌법 제정에 간여하다
김기춘은 서울대학교 3학년 때인 1960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합니다. 부산과 서울에서 검사 생활을 하다 1971년 법무부 법무과 검사로 발령이 납니다. 신직수 당시 법무부 장관이 그의 ‘후견인’으로 꼽힙니다. 유신헌법 제정자로 알려졌던 전 국회의원 한태연은 생전 한 학술대회에서 “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고 폭로했습니다. 자신은 ‘자구 수정’ 정도만 했다는 것입니다. 1981년 4월27일치 <경향신문>에 따르면 김기춘은 텔레비전 방송에 나와 유신헌법에 대해 ‘명해설’을 하기도 했답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의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게 하는 등 박정희 영구 집권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젊은 검사 김기춘은 유신헌법 제정 공포 뒤 이례적으로 승진,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이 됩니다.
 
2. 육영수 피격한 문세광 자백을 받다
신직수는 1973년 말 중앙정보부장이 됩니다. 이때도 그는 김기춘을 중앙정보부로 불러들여 부장의 법률보좌관에 앉힙니다. 법률보좌관 김기춘이 대공수사국장이 된 결정적 계기는 육영수에게 총을 겨눈 문세광의 자백을 받아낸 일입니다.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이 김기춘을 신뢰하는 가장 큰 이유로 꼽는 일도 이것입니다.
 
정말 문세광이 쏜 총탄에 대통령 부인이 희생된 것인지 지금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당시 수사당국은 ‘육영수 살해범은 문세광’으로 단정지었습니다. 김기춘은 공을 인정받아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합니다. 서른다섯살에 중정에서 가장 막강한 부서의 책임자가 된 것입니다. 2013년 <주간경향> 보도를 보면, 박정희가 김기춘을 ‘김똘똘’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신임했다고 합니다. 김기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이 유신 체제와 연결돼 있었습니다.
 
3.‘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을 수사하다
김기춘 대공수사국장의 대표작은 1975년 11월 중정이 발표한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입니다. 최근 영화 <자백>(감독 최승호)이 주요하게 다룬 사건이죠. 당시 한국에 있던 재일동포 유학생 200~300명 중 10%가량이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중정에 끌려간 이들은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합니다. “인간의 비명 소리가 아닌 소리를 들었다”(재일동포 유학생 김동휘)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3년간 감옥에 갇혀야 했던 이철씨 등 십수명은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법원은 ‘불법구금, 고문으로 받은 허위진술에 근거해 간첩으로 조작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김기춘이 수사책임자였던 ‘북괴간첩단’ 사건은 ‘간첩조작’ 사건입니다. 한홍구 교수는 “김기춘은 유신정권 7년 중 4년 반을 중정 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본격적인 조작간첩 사건의 시대를 열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영화 <자백>에서 최승호 피디는 김기춘을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합니다. 김기춘은 뭐라고 답했을까요? “기억나지 않는다”는군요.
 
4. 검찰총장이 되다…“좌경세력은 무좀 같아”
전두환 정권에서 ‘암흑기’를 보내던 김기춘은 노태우 정권 출범 뒤 첫 임기제 검찰총장(1988년 12월~1990년 12월) 자리에 오릅니다. 당시 <한겨레> 기사를 보면 김기춘 검찰총장은 대검 부장, 대검·서울지검 공안 관계자 전원을 총장실로 불러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를 역설했다고 합니다.
 
그는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일시적으로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나곤 한다. 체제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고 지시합니다. 성당·교회 등에도 공권력을 직접 투입해 공안사범을 철저히 검거하라는 지시도 내립니다. 당시 <한겨레> 논설고문이었던 고 리영희 선생도 ‘북한방문 취재계획’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구속합니다. 이후 김기춘 검찰총장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최대의 탄압자’로 불립니다.
 
5. 법무부 장관으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지휘하다
검찰총장에서 물러나고 얼마 되지 않아 김기춘은 다시 일선에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법무부 장관입니다. 1991년 정부의 실정과 공권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대학생·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랐습니다. 이른바 ‘분신정국’입니다.
 
검찰은 분신 자살한 김기설의 동료인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방조했다며 기소합니다. 분신에 조직적 배후세력의 개입이 있다는 희한한 주장이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강기훈은 사건 발생 24년 만인 올해 5월에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그는 2013년 <한겨레> 인터뷰에서 “분신정국이 이어질 때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법무부 장관이 바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라고 말했습니다. ‘학원침투 북괴간첩단’ 사건에 이어 그가 총지휘한 사건이 또 다시 조작으로 밝혀졌네요.
 
6. 초원복집에서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고 말하다
1992년 12월11일은 한국 선거사에 가장 치욕적인 날로 기억된 날입니다. 막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김기춘은 부산의 음식점 ‘초원복집’에 김영환 부산시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등을 불러모아 제14대 대통령 선거 관권 개입 방안과 지역감정 조장 등을 집중 논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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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리에 진행된 이 자리를 국민당 대선 후보였던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 의원 쪽에서 도청해 공개했죠. 김기춘은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라며 불법 선거운동을 권유했습니다. 김기춘이 “부산 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냐 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고 말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가 이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검찰은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을 선거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했습니다.
 
7.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내 과거에 변명 않겠다”고 말하다
김기춘은 3선 의원이기도 합니다. ‘초원복집’ 사건이 그의 인생에 치명적인 상처가 될 줄 알았으나, 그가 1993년 4월 법원에 대통령선거법 제36조 1항과 제162조 1항에 대해 위헌심판제청 신청을 내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처벌대상인 일반 국민의 선거운동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듬해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검찰의 공소가 취소됩니다.

변호사로 활동하던 김기춘은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남 거제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됩니다. 유신 전력, 초원복집 사건 등으로 당시에도 ‘문제적 인물’로 꼽히던 김기춘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관련된 얘기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유신이 이뤄진 1972년에 나는 당시 임용된 지 7년 된 만 32살의 평검사였다. 나는 내가 역사를 왜곡하는 데 직접 참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복국집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내가 경남 분들이 표를 몰아줘야 한다고 얘기는 했지만 호남을 비방한 적은 전혀 없다.”
 
8.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소추의결서를 헌재에 내다
국회의원 김기춘이 가장 대중의 주목을 받은 때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입니다. 당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던 김기춘은 탄핵소추의 검사 격이었는데, 3월12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자마자 그날 오후 직접 헌법재판소를 찾아 탄핵안을 접수했습니다.
 
2006년 12월에는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사이코”라고 말해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노 대통령이 예비역 장성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박근혜 당시 의원도 한 말씀 보탰는데요, “국민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갔으면서 지금 와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항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합니다.
 
9. 7인회에 들다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김기춘은 2007년 대선 한나라당 경선 당시 박근혜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는 등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부터 간여하고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 원로 자문그룹 ‘7인회’ 멤버이고요. 김용갑 전 의원,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등 박정희~노태우 정부 시절 각종 요직을 거친 이들이 뭉친 것으로 알려진 이 모임은 막후에서 박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청와대에 입성하기 직전인 2013년 7월에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아 박정희-박근혜 2대에 걸친 끈끈한 관계를 보여줬습니다.
 
10. 국회에서 “세월호 당일 대통령이 어디 있었는지 모른다”고 말하다
2014년 7월7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김기춘은 당시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이하 박) :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님, ‘대통령께 세월호 참사가 있던 날 서면 보고로 10시에 했다’라는 답변이 있었지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하 김) : 예.
박 : 지금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이때 대통령께서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김 : 그것은 제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국가안보실에서 1보를 보고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 : 그러니까 대통령께서 어디에 계셨는데 서면 보고를 합니까?
김 : 대통령께 서면 보고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중략)
박 : 그럼 대통령께서 집무실에 계셨습니까?
김 : 그 위치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박 : 비서실장님이 모르시면 누가 아십니까?
김 : 비서실장이 일일이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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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7720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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