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겠네"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온 내가 가장 먼저 하는 한마디이다. 몇주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야간업무는 내 피곤을 산처럼 쌓기에 충분했다. 신발장에 구두가 한켤레 늘었다. 매끈한 붉은빛에 싸구려 보석장식이 붙어있는, 애매하지만 심심하지는 않는 디자인이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넥타이를 풀어해치고는 소파에 '털썩'하고 쓰러지듯 앉았다.'쉬이이이익..' 낡은 소파의 바람 빠지는 소리는 마치 나대신 한숨을 쉬어주는듯 했다. 저 구두는 얼마에 샀을까,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제일먼저 보이는곳에 둔걸 보니 남편의 생각이 비디오처럼 뻔히 보인다. 매일 새벽에 들어오는 나를위한 남편의 선물이렸다. 값은 그렇게 크게 상관이 없다. 이왕이면 출근할때 신고다니기 편한 그런 신발이 좋은데.
셔츠를 벗어놓고는 거울앞에 섰다. 아직은 봐줄만하다. 나 자신을 단지 '봐줄만 하다'라고 생각하고 있는것이 참 오묘하다. 내 주위의 사람들도 단지 날 '봐줄만 한 여자'로 생각하고있을까? 거울은 나를 비추는 것으로 하여금 내 주변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잡생각을 하다보니 벌써 집에오고 30분이 지났다. 화장을 지우고 대충 샤워를 한다. 고민해서 사온 바디워시에서 나는 향은 신선한 아보카도의 느낌을 주었다. 옆에있는 알로에향을 살껄그랬다. 알로에는 피부에도 좋다그러던데, 그래도 향만 나는거니 자기만족인 뿐인걸까. 또 머릿속이 산으로 흘러간다. 어쩌면 이것은 지칠대로 지쳐버린 나의 현실도피적 망상이겠다.
식탁위에 바나나 몇개가 놓여있다. 옆엔 '아직은' 날 사랑하는 그이의 손편지가 붙어있었다. 생각해보니 관계를 가진지도 벌써 몇달이 지났다. 남편의 그곳은 날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나에게 충분한,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싶었다. '충분하다.'라는 말은 참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있는것 같다. 바나나는 살이안찐다. 살은 내가 찔 뿐이다. 그래도 이 부드러운 식감과 적당한 단맛은 달콤함에 굶주린 내 내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tv를 틀었다. 개그프로에서 시끄럽게 웃는소리가 터져나왔다. 안방에서 그이가 뒤척이는소리가 들렸다. 행여나 그이가 깨버리진 않았을까 문틈사이로 슬며시 살펴본다. 바보같이, 보이는거라곤 캄캄함 뿐이었다. 아무소리도 안들리는걸 보니 잠에서 깨진 않았나보다.
tv를 꺼버리니 쥐죽은듯 조용하다. 그이의 작은 숨소리가 내 귀를 간지럽힌다. 나도 살살 눈이 감겨온다. 이상하다. 그이는 분명히 자고있다. 근데 이소린 뭐지, 수근거리고있다. 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내 외모를 폄하하고있다. 무섭다기보단 재밌었다. 나의 도피적 망상이 심해졌나보다.
주위의 속삭임들이 점점커져 이내 외침이 되어버렸다. 소리는 점점 시끄러워진다. 소리를 있는힘껏 질렀다 '쉬이이이익' 이게뭐지.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볼록한 내 배 대신 주름진 소파가 보였다. 이건 악몽이다. 악몽이아니면 안된다. 피곤한 나머지 소파에 앉자마자 잠이들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엔 이상황은 현실적이면서도 기괴했다. 남편이 안방에서 나왔다. 아무리 불러도 그는 듣지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는것같다. 물병에 입을대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내가 입대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했는데. 것보다, 지금 이상황이 중요하다. 몸을 꼼짝도 할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참 태평하기도하지. 이미 1시간은 지난것같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누군가 현관문을열고 들어온다. 이집엔 우리둘뿐인데 누굴까. 이사람도 일을 마치고 이제 막 들어오는듯 하다. 그녀는 넥타이를 풀어해치고는 내 위에 털썩 앉았다. 날 보는듯 해서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가슴이 전보다 처지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