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환자들의 비명으로 울렸다. 그들은 죽음을 달고 내게로 와 피를 쏟았다. 으스러진 뼈와 짓이겨진 살들 사이에서 생은 스러져갔다. 미국에서 베껴온 protocol을 간신히 끼워 맞춘 외상외과 전임 강사가 내 보직이 되었으나 삶이 전보다 나아진 것은 없었다. 단 한 치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한국은 애초에 ‘중증외상시스템’이라는 게 없는 곳이었다. 몰려오는 파도 앞에 타고 나아갈 배는 없었다. 병력도 없었다. 싸워야 할 기반 없이 홀로 물가로 내몰렸다. 홀로 싸울 방도를 찾아 헤맸지만 가망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서 본 것은 완벽히 갖추어진 함대, ‘시스템’이었다. 그곳에는 충분한 배와 병기와 병력이 있었다. 공중에는 환자를 싣고 오는 헬기가 기동했고 지상의 엠뷸런스들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아무도 혼자 싸우지 않았다. 그 안에서 사(死)에 가까운 이들이 생(生)으로 건져 올려졌다.
어쩌면 병원은 이런 과 하나쯤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돌아와서 적당히 자리나 지키며 하던 대로 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맡겨진 보직이 외상외과 자리였고, 그것이 내 밥벌이였다. 난 죽지 않아도 될 이들이 살아나가는 법을 알고 있었으나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도 기반을 마련해주지 않았으므로 홀로 싸우는 법을 익혔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중증외상시스템을 국제 표준에 맞게 운영하는 이들은 주한 미군이었다. 그들을 치료했고 그들과 같이 일하면서 배웠다. 외국의 유명 외상외과 의사들을 초청했다. 컨퍼런스도 열었다. 때로는 미 해군 의료진과 함께 파견을 나갔다. 보고 배운 것들을 실제로 하고자 했다. 외상외과 의사로서 원칙대로 환자를 처치했고 써야 할 약품과 기기를 썼다. 수술은 필요한 만큼 했다. 스러져가는 숨을 끊어놓는 사신을 막아 서려 애썼다. 몸부림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잠시 해외 연수를 다녀와서 지금까지의 관행과 관습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중증외상환자들은 버스, 택시를 운전하거나 배달을 했고, 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위험하게 일했다. 일하던 중에 굴착기에 끼거나 지게차에 깔렸고, 공사 현장에서 추락했다. 5천 RPM으로 회전하는 기계에서는 볼트와 너트가 튕겨져 나와 환자들의 몸을 꿰뚫었다. 더 위험한 고강도의 노동은 계약직이나 하청 노동자들이 담당했다. 위험은 부상을 부르고 부상은 생명을 앗아가는데 위험도와 돈벌이는 비례하지 않는 처지는 나와 같았다.
이런 이들이 의식을 잃고 사지가 찢어지고 장기가 부서져 병원으로 실려 온다. 당연히 외상외과적 수술과 치료는 필수적이다. 수술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필요한 생명 유지 장치와 특수 약품의 수는 적지 않다. 그들은 그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비용을 많이 지출하는 대형병원들은 투입된 자본에 비해 수가가 받쳐주지 않으므로 중증외상환자를 반기지 않았고 응급실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중소병원들은 가능한 한 모든 환자를 유치하려 했으나 치료 여건이 받쳐주지 않았다.
사고의 크기만큼 중증외상환자들의 상처 범위는 넓고 깊다. 타 과와의 협진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도 환자는 넘쳤다. 내게 오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늘 긴박했고, 산다 해도 많은 경우 장애가 남고 후유증의 위험이 도사렸다. 승리가 담보되지 않는 싸움이다. 이긴다고 해도 공은 불분명하고 패배의 책임은 무겁다. 모르는 체 할 수 없으나 반가울 수도 없는 존재가 나의 환자들이었다. 목숨과 돈, 관계의 문제들이 뒤얽혔다. 고개를 숙이고 사정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보험심사 팀에서 오는 경고는 잦았다. 보건복지부는 의료 행위나 약제에 대해 급여 기준을 정해두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병원이 그 기준을 준수하는지를 확인했다. 병원 내의 보험심사팀은 수술이 진행될 때 사용한 기기의 수와 약품의 양, 그것들의 적합성 여부를 살폈다. 보험 기준에 맞춰 진료가 되었는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조사했다. 보험심사팀은 삭감률을 줄여야 했으므로 삭감이 될 만한 진료비에 대해 미리 경고했다. 그러나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필수적인 치료를 줄일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줄여야 할 항목이 아닌 목숨을 살려낼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그들의 기준은 외상외과에 적합하지 않았고 교과서를 복사해서 재심을 청구해도 묵살했다. 난 날아드는 경고를 외면했다. 어쩔 수 없이 모르는 척 치료를 강행하면, 몇 개월 뒤 어김없이 건강보험공단 심사평가원으로부터 차가운 진료비 삭감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전화기 너머 보험심사팀장의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나는 거듭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언젠가부터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간호사들도 나의 눈을 피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나중에는 건강보험공단 심사평가원의 삭감청구서가 거대한 화살이 되어 나를 정조준했다. 나는 자꾸 궁지로 내몰렸다.
‘받아야 하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의 원인이 모두 내게 있었다. 틈틈이 심사평가원에 사정하는 글을 써 보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약품과 장치들을 기준에 비해 초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함을 적었다. 그럼에도 삭감진료비 회수율은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사유서는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읽었다 해도 정상참작은 요원한 일이었다. 심사위원 중에 외상외과를 전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세계적으로 쓰이는 외상외과 교과서의 표준 진료지침대로 치료했다는 내용의 자료를 수십 차례 제출해도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환자마다 쌓여가는 삭감 규모가 수천 만원에서 수억 원까지도 이르렀다. 결국 교수별 진료실적에 기반을 둔 ABC 원가분석이 더해져 나는 연간 10억 원의 적자를 만드는 원흉이 됐다. 매출 총액대비 1~2 퍼센트의 수익규모만을 가지고 간신히 유지되는 사립대학 병원에서 나는 일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불러오는 조직원이었다.
학교에서 주는 월급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내가 학교에 일부러 불이익을 안길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새 적자의 원흉이 되어 있었다. 병원과 다른 과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외상외과 치료의 원칙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얼음장 같은 시선들 사이에서 수시로 비참했다. 무고했으나 죄인이었고, 나아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목숨이 내게 오는 환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속에서 우는 피에 숨이 잠겼다.
시간이 흘러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공약 일성은 건강보험을 통한 보장성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난 현재 건강보험재정상태로 얼마나 확대가 가능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의 병원들은 대부분의 선진국뿐 아니라 개발도상국가에 비해서도 의료인의 인력을 절반 이하 수준으로 고용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젊은 의사, 간호사 및 의료기사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대학병원들은 컨베이어시스템처럼 고도로 효율화된 진료체계를 구축해서 간신히 수지를 맞추었지만 최근 20년 동안 한국사람들의 삶을 지향하는 자세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적절하게 휴식과 보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어려운 일은 안 하면 그만이다. 난 국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해주겠다고 앞다투어 나서는 정치권의 사람들이, 병원 내 의료인들을 획기적으로 증원할 수 있도록 하지는 않으면서, 간신히 조금씩 해마다 남기고 있는 건강보험 재정을 새로운 보장성을 확대하는 선거철 공약사업 해결에 사용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을 보고는 경악했다. 한국 간호사들의 이직률이 극도로 높은 이유는 너무 소수의 인원으로 많은 환자를 돌봐야 한다는 근본적인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사실, 어느 누가 진정성 있게 타 분야의 문제를 들여다 보겠는가. 관료나 정치인들은 1년이 멀다 하고 현재 자리에서 떠나거나 보직이 변경되기 마련이고, 각종 학회나 개별 기관들도 철저히 자신의 입장에서 움직인다. 먼 앞날을 내다본다고 하는 것은 그저 그렇게 하는 척할 뿐이다. 다 자기 자리에서 먹고 살자고 할 뿐, 진정성은 없다. 그래서 보건의료정책은 여태껏 헛돌았고 앞으로도 계속 헛돌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난 그런 의료계 중에서도 가장 코너에 몰려있는 느낌이 들어 계속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