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땅따먹기에 가깝다. 여기부터 여기까진 내 땅, 저기서 저기까진 네 땅. 우리가 함께 걷던 거리, 자주 가던 카페, 함께 메뉴를 고민하던 음식점, 영화관. 둘이 공유했던 커플의 일상을 이제는 서로 분리해야 한다. 몇몇 땅은 분별하기 너무나 쉽다. 내가 바래다주던 너희 집 앞. 내가 자주 간다 말했던 포장마차. 너가 좋아하는 올리브영과 롭스. 나의 공간에 너를 초대한, 너의 공간에 나를 초대한 장소들은 다시금 본인이 가지면 되었다. 내가 너를 만나고 싶다면 너의 공간 안으로 간다면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너 역시 나를 만나고 싶다면 나의 공간으로 온다면 만날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헤어졌기에 서로의 공간에 침범할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본인이 가지고 있던 땅이 아닌 만남을 통해 얻게 된 공간은 어찌할까?
봄. 꽃잎으로 도로가 회색에서 분홍색이 되는 계절. 너와 나는 벚꽃놀이를 갔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바라보며 이날을 꼭 꽃놀이를 가자고 그렇게 약속했고. 나도 웃으며 “그래” 라고 말했다. 너와 나 둘 다 사람이 붐비는 것을 싫어했지만 여자친구의 손을 잡고,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벚꽃놀이를 가는 것은 싫은 일이 아니었다. 이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고, 이 사람이 내 여자친구라고 자랑 할 수 있는 그럴 일이었다. 예정된 날. 예보대로 날을 맑았고 따듯했다. 여의도로 가는 길.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모든 주차장이 만차인지 갓길에는 차량이 빼곡하니 놓여져 있었다. 주차된 차를 보며 너는 내 손을 잡으며 “지하철 타고 오길 잘했다 그치?” 라고 물었고 나는 너에게 또 다시 웃으며 “그래”라고 말했다. 벚꽃 근처에는 수많은 커플들이 있었고 우리는 그 수많은 커플 중에 하나의 수였다.
여름. 거리에는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근처 카페로 피신했다. 평소 조그마한 개인카페를 즐겨찾던 우리였고 체인점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우리였지만 그날 거리에 놓여있던 카페베네는 시원한 에어컨 옷자락을 팔락거리며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우린 엄마에게 삐져있던 어린아이가 “소시지 해줄까?” 라는 엄마의 물음에 그간의 불만도 잊고 “응!” 이라 외치며 달려가 다리 아래에서 삐약거리듯 점원에게 메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넌 파르페. 같이 먹을 카라멜 시나몬 브레드. 진동벨이 울리기 전 너는 나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울꺼면 차라리 바다에서 덥던가.”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그 말이 곧 계획이 되었는지 넌 나에게 다음 주말에 바다를 가자고 했다. 나는 잠깐 생각해보고 “그래”라고 답했다. 너는 내 대답에 다시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휴가도 아니니까 부산은 좀 그렇고.......” 너는 휴대폰을 켜고 이리저리 검색을 시작했고 때마침 울린 진동벨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주문한 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너는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며 을왕리로 가자고했다. 휴대폰 화면 속에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수욕장은 어디일까?’라는 기사제목이 적혀 있었다. 나는 너에게 파르페를 건내주며 “그래”라고 말했다.
가을. 뜨거웠던 여름과 앞으로 차가워질 겨울.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얼마 되지 않는 계절. 그 짧은 시간에도 너는 나와 함께했다. “지난 이맘땐 뭘 입고 다녔지?”라며 공원 벤치에 앉아 너는 옆에서 투정부렸다. 나는 너를 보지 않고 저 앞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러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았다. 행여나 낙엽을 쫒아 뛰다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너는 내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걸 알아채곤 나와 같은 곳에 시선을 맞췄다. 아이들이 뛰는 모습. 떨어지는 낙엽을 보더니 넌 나에게 말했다. “드라마에서 봤는데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데” 너는 드라마 속 여주인공처럼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너가 하늘에 원하던 낙엽은 번번히 너의 손을 비껴나갔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마치 너가 단풍잎을 향해 더욱 다가간다면 잎이 너에게 다가오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낙하하는 잎들은 너의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속절없이 떨어져 이미 먼저 와있던 자신의 친구들 옆에 누워 공원 바닥의 자리 한 켠을 차지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너는 한숨을 푹 내쉬으며 폴짝임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곤 방금 전까지 너가 잡으려 했던 수많은 아이들 중 가장 단풍을 잘 머금고 있는 잎을 주워들었다. “그런거 믿기엔 좀 그렇지?”라며 너는 내 옆으로 돌아와 앉았다. 나는 너의 질문에 “그래”라고 대답했다.
겨울. 날은 추웠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할까 하며 만나기로 한 그날. 한파주의보가 휴대폰 알람을 울렸다. 너는 저 멀리서부터 새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리털 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채운 너는 그럼에도 추운지 고개를 푹 숙이고 걷기에 바빴다. 너는 내 앞에 다가와서야 고개를 치켜들더니 “추워 들어가자”라고 말했고 나는 “그래”라고 말하며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너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였다. 꾸역꾸역 잠실역까지 도착했지만 이런 날 놀이공원을 가면 놀이기구고 뭐고 얼어 죽겠다는 너의 말에 나는 동의했다. 갑작스럽게 생긴 일정의 공백에 나는 멍하니 있었다. 너는 그런 나를 바라보더니 “나 옷 좀 봐도 될까?”라고 물었고 나는 “그래”라고 말했다. 너는 백화점 방향으로 발을 돌렸고 나는 너의 뒤를 쫒았다. 백화점에 들어가기 전 너는 오리털 패딩을 벗었다.
겨울이 끝나기 전 너는 나에게 이별을 말했다. 나는 그때도 “그래”라고 말했다.
우리의 연애기간동안 함께한 여의도, 을왕리, 공원, 백화점. 이러한 공간을 나는 너에게 주겠다. 분명히 너와 나의 공통분모였지만 내가 너에게 의지하는 공간이었다. 매일 면도를 하지 않으면 얼굴에 살색보다 검은색이 눈에 들어오는 내가 혼자 갈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손님을 공주님이라 부르는 화장품가게처럼 나는 너에게 의존했던 수많은 공간을 나는 포기해야 했다. 나는 혼자가기 껄끄러우나 너는 그러한 장소에서도 당당했으니 내가 포기하는게 당연할 터였다.
이렇게 나는 내가 지닌 얼마 안되는 땅만, 연애하기 전보다 줄어든 나의 영역에서만 지내겠다. 이 범위 안에선 널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이별 후 수도 없이 하게 되던 상상. 거리에서 널 만나면 어떻게 하지. 인사를 해야 하나 모른 척 지나가야 하나 하는 고민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이 범위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너를 피해왔다. 회사일이 끝나면 너와 함께 즐겨가던 술집보다 포장마차를 즐겨갔다. 주말에는 그저 집에서만 굴러다녔다. 너와 사귈 때 너는 이때쯤 전화해 “또 누워있지?”라며 잔소리를 시작했겠지만 이젠 그럴 사람이 없으니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밥도 대충충 먹기 시작했다. 내가 오뚜기 카레나 비비고 닭곰탕을 카트에 담을 때 마다 “좀 해먹어 나보다 요리 잘하면서”라며 내가 담아온 물건을 빼던 너가 없으니 프라이팬에는 뭔지 모를 하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일상에서 너를 지우며 내 공간에서 너를 지우며 생활했다. 이렇게 하면 너를 만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말이다. 너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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