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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에 져버리는 꽃이여
너를 처음 마주했을 때, 여명이 찾아왔다.
어스름한 새천년의 도시에 날아드는 여명.
아직은 옅지만, 확실하게 내리쬐는 광선에 나는 깨어났다.
너는 나를 보며 화알짝 진한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의 도시는 또다시 여정을 부르짖고
숨어 있던 신록의 생명들은 약동하기 시작한다.
도회지를 거닐다 귀퉁이에서 개화 직전의 한 무리의 꽃을 보았다.
그대가 나를 호명(呼名)하는 것만으로 꽃들은 만개했다.
드리웠던 그리움이, 외로움이 사그라듬을 느낀다.
몽환을 즐기며 살아가다 별안간 황혼이 찾아든다.
그 동안의 소요는 모두 미몽이었나
나의 세계가 스러진다.
어느샌가 어둠이 몰려왔다.
밝게 비추던 이정표가 모두 소실되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초조해 하는데
저 꽃들은 내 속내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둘 씩 모가지를 꺾는다.
황혼에 져버리는 꽃이여
나를 버려두지 마시오
애처로운 나의 고함소리 들리긴 하는지, 그대여
나를 버려두지 마시오
허무한 외침은 높디 높은 폐건물에 부딪히며 칼바람과 함께 나락에 빠졌다.
생명이 꺼졌다. 도시가 죽었다.
초롱불 한 점 없는 새천년의 도시는 검게 칠한 광야가 되었다.
또 이렇게 되었구나, 돌아 갈 순 없겠지.
이제는 영원의 밤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빛을 알아버린 망자는 그럼에도 초연하게 어둠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