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과 여불위.
한 사람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황제이고
한 사람은 그런 시황제를 옹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동시에 큰 추문을 불러일으킨 역사를 바꾼 거상이죠.
그리고 그 두 사람과 연결되어 항상 언급되는 진시황의 모친 조희와 조희의 간통 상대인 노애.
이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마 현대인의 관점에서 봐도 기이하기 그지 없는 역사에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정치 스캔들입니다.
일반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기로는…
진시황의 부친인 장양왕 자초를 후원한 여불위가 그를 왕으로 만들고, 그러는 와중에 슬그머니 자신의 아이를 가진
첩 조희를 보내 진시황을 낳게 하고, 나중에 왕이 된 진시황 덕분에 진나라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죠.
그러나 예전 첩이었던 조희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결국 조희의 관계를 거리를 두기 위해 노애라는 남자를 조희에게
보내서 대신 간통하게 하죠. 그러다 결국 노애의 아이까지 조희가 낳게 되자 노애는 야심을 품고 자신의 아이를 왕으로
삼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이 진압되면서 추문이 세상에 알려지죠.
그 와중에 여불위와 진시황의 관계도 세상에 드러나면서, 안그래도 권력을 독차지한 여불위를 불편하게 여긴 진시황의
손에 여불위는 몰락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죠.
지금까지는 이 이야기가 일반적인 정설이고, 의혹이라고 해봤자 정말로 진시황의 여불위의 아들이냐 아니냐 정도만이
논란이었죠. 이 글을 쓰는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 사건에 대해서 찬찬히 살펴보니깐…
조금 생각치도 못한 이상한 부분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의심을 가지고 보니 아래와 같은 사건이 도무지 말이 안되는 의구심이 드는 부분들이 있더라구요.
한번 정리를 해봤습니다.
- 상식적으로 자기 아들을 왕실에 뻐꾸기 투입하는 것이 도움이 되나? 정통성 문제로 서자나 차남도 왕위에 올라서 시달리던
왕정 시대에 정통성 제로의 자기 아들을 왕실에 밀어 넣어봤자… 제대로 왕이 되기로 어렵고, 되고 두고두고 정통성 문제로
까일텐데? 정상적인 판단이라면 정통 왕손에게 자신에게 큰 빚을 지게 하는 것이 맞지, 그런 미친 짓은 그냥 자살 행위
- 그런 연유로 노애의 반란도 도무지 비상식적임. 장양왕이 죽은지가 언제인데 자기와 조희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에 세워?
명분으로서도, 실제 목적으로서도 도저히 말도 안되는 무리수. 돌지 않았다면 절대 반란을 일으킬 수 없는 명분. 죽어도
입밖에 안내야 할 이야기를 반란의 목적으로 삼다니… 뭔가 대단히 비상식적인 반란 사유
-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조희가 욕구가 강해서 과부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예전 애인인 여불위와 간통하고, 나중에는 정력이
강한 노애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아니, 정말로 그런 문란한 여자라면, 남편인 자초와 여불위가 조나라에서 먼저
탈출하고 진시황과 인질 생활하던 시절에는 어떻게 버텼데? 더 젊고 처지도 곤란하고, 서방도 없으니 사고치고도 남았을텐데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는데?
- 여불위가 진시황에 의해 파면당하고 몰락한 것은 맞는데… 당시 여불위가 단순한 개인이 아니었고, 나름 입지를 가진 진나라
정치의 중심이니 만큼… 그를 파면한다면 그 파벌도 축출하는 것이 맞음. 그런데… 이사는? 나중에 진시황 사후까지 승상으로
활약하는 이사도 확실한 여불위 추천 인사였는데 이 사람은 되려 중용되는 이유가 뭐지? 정말로 여불위 파벌이 당시에
축출된 것 맞나?
- 당시 진나라 정치 상황을 생각해보면 조금 상황이 미묘함. 위에서 언급한 진시황의 아버지가 본명이던 이인을 자초로
바꾸고 아부를 해야 할 정도로 당시 진나라의 정계는 초나라 출신 외척과 관료들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 그런
초나라 세력의 시초는 진시황의 증조부이자 통일의 기초를 세운 소양왕의 모친 선태후가 있었음
- 미월이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선태후는 당대에 보기 드물게 여러 남자와 중혼을 하고 통음을 하는 정사에 확실히
기록된 문란함으로 유명하신 분. 하지만 문란함에 더해서 정치 감각이 뛰어나서 위염과 백기 등을 등용하는 등의
초나라 출신들이 진나라에서 강력한 외척 세력을 형성하는 것에 영향을 미친 여걸.
- 그래서 진시황의 아버지 자초도 후계자가 되기 위해 초나라 출신의 화양부인에게 아부를 해서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야 할 정도로 초나라 출신들의 파워가 강력한 상황이었음. 그리고 이런 흐름은 진시황 즉위 이후에도 이어져
군의 총사령관을 초나라 왕족인 창평군이 맡고 있는 상태에서 초나라와 전쟁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짐
- 군의 관계자도 이 정도인데 외척들의 공간인 조정과 여자들의 공간인 내궁에서 초나라 파워는 상상도 하기 힘들것으로 보임.
그런 상황에서 초나라 출신이 아닌 조나라 출신인 조희가 처했을 상황은 과연? 여자들의 공간에서 혼자 아웃사이더인
주제에 왕의 생모라는 이유로 위치만 높은 그녀가 과연 어떤 입장에 처했을지는 의문스러움.
- 그런 의미로 보면… 여불위의 입장도 조금 미묘함. 초나라 세력이 외척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상황에서… 왕족이나 귀족도
아니고, 한나라 출신인 여불위가 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 과연 실제로 강한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그리고
역사적으로 알려진 진시황과의 불편한 관계… 왕의 입장에서 4대째 권력을 장악한 외척 세력과 한미한 상인 출신의 후원자.
둘중에 어느 쪽이 더 불편한 사이였을까?
이런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니… 조금 파격적인 가설이 떠오르더라구요. 그냥 한가한 망상가의 공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세상에 알려진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한 진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관점으로 당시의 인물들의 입장과 사건을 조금 파격적인 무리수를 둬서 다시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 여불위는 왕위를 노리는 야심가가 아니라, 사실은 당시 초나라 외척 세력으로 인해 불만을 가진 진나라 왕실이 의지를
가지고 결탁한 왕실의 근위 세력. 그리고 여불위는 인식과는 달리 진심으로 진나라 왕실에 충성을 다하는 충신.
- 고대 국가의 왕실은 원래 왕권을 위협하는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자국 내에서 이방인에 가까운 외부 출신들에게
권력을 주거나 군사력으로 삼아 근위 세력을 형성하는 사례가 흔했음. 비잔틴의 바랑기안 근위대나, 무슬림 국가의
크리스찬 근위대가 그 대표적인 사례들
- 원래 따지고 보면 진나라의 초나라 외척 세력도 시작은 그런 외부인에 의한 진나라 기득권 층의 견제를 위해 영입한
것이었음. 나중에는 결국 그들이 더 기득권자가 되어 왕실을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여불위는 그런
초나라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분이 낮지만 재력을 가진 한나라 상인 출신으로 영입된 신흥 친위 세력이었음
- 그리고 당연히 조희도 여불위의 첩이 아님. 조희는 진나라 내부의 초나라 외척 세력을 끊어내기 위해 자초와 여불위가
담합해서 의도적으로 초나라 출신이 아닌 조나라 출신으로 들인 황후였음.
- 4대에 걸쳐 외척 세력을 군림한 초나라 세력에서 보면 예상치 못한 도발이었음. 당시, 범수와 채택 등의 인사가 초나라
세력을 비판해서 실권이 약해지긴 했지만, 백기 등을 등용한 초나라 세력의 기세는 강했고, 그런 그들은 조희의 존재에
자초가 인질로 있음에도 조나라를 공격해버림
- 다행스럽게도 탈출한 자초. 일단 초나라 세력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기에 이름도 초나라 자식이라는 뜻으로 자초로 바꾸고
귀국해서 초나라 세력에 몸을 굽혀서 초나라 세력의 화를 누그러트림.
- 하지만 조나라에 남겨진 조희와 진시황은 죽을 위기를 넘김. 다행스럽게도 조나라 귀족가의 일족인 조희의 신분 덕에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음. 조희가 이 시점에서 몹쓸 짓을 당하지 않고 살아난 것으로 조희의 신분이 낮지 않고 그녀가
들리는 추문과는 무관한 정숙하고 고귀한 신분의 여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 결국 시간이 흘러 진나라로 다시 돌아온 조희와 진시황. 그리고 왕이 된 자초. 자초는 자신을 왕으로 세우는데 공을 세운
여불위를 중용하지만, 그 의미에는 기존에 초나라 세력이 아닌 외부 한나라 출신의 여불위를 중용해서 자신의 근위 세력으로
삼아 초나라 세력과 대항하려는 의도가 있었음
- 그런 자초, 장양왕의 왕이 된 이후 달라진 태도가 못마땅한 초나라 세력. 그리고 장양왕이 즉위 3년 후 사망. 어쩌면 이건
자신들에게 반기를 든 장양왕에 대해 초나라 세력이 암암리에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듬.
- 그리고 덕분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시황. 진시황의 입장에서는 장양왕 마저도 죽은 시점에서 자신의 근위 세력인
여불위를 더 키워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초나라 세력의 방패로 삼을 수 밖에 없었음. 그래서 일족도 아닌 여불위에게
왕의 아버지이자 보호자란 의미로 중보라는 자리를 주고 그에게 실권을 몰아줌.
- 수완이 뛰어난 여불위는 기민하게 행동해서 신속하게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왕실의 근위 세력으로 4군자에 필적하는
정치 세력을 형성함. 그 세력에는 예전에 초나라 세력과 대항하다 실각한 범수의 후계인 채택과 자신이 등용한 이사 등이
포함됨. 한마디로 여불위의 세력은 알려지기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보이지만 사실상 진시황에 대한 근위 세력이었음.
- 그런 여불위의 행보에 위축되기 시작한 초나라 세력. 점점 세력이 위축되기 시작한 그들은 공격의 방향을 왕실이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리는데… 그건 바로 진시황의 생모인 조희였음
- 왕의 모후라고는 하지만 초나라 여자들이 가득한 내궁에서 조희는 고립된 상황. 하지만, 정치적 공세를 막기에도 버거운
여불위와 진시황은 은밀히 벌어지는 내궁의 모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벅찬 상황. 그런 와중에 초나라 세력이 꾸민
조희에 대한 모략은 가장 최악의 것을 고름.
- 그건 바로 시중에 잡배로 대물로 유명한 노애를 불러들여 왕의 모후와 추문을 벌이는 것.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그게 말이 되는 선례가 있었음. 그건 바로 자신들의 세력의 기원인 선태후. 그녀의 과거 문란한 행동의
선례는 아이러니하게도 조희라고 해도 안될 건 없다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하게 하는 근거를 만들어 주었음
- 처음에는 진시황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루머를 퍼트리다, 그게 안먹히자 여불위가 조희와 염문이
있다는 루머를 퍼트린다. 하지만 그것도 잘 안먹히자 최악의 방법으로 노애라는 상종할 가치도 없는 시정 잡배와 염문을...
루머가 아닌 실제로 만들 계획을 꾸민다
- 그것이 실제로 실행하게 된 계기는 진시황의 이복동생 성교의 난. 조희의 아들로 초나라 세력과 무관한 진시황과는 달리
진시황의 이복동생 성교는 초나라 쪽에 가까웠을 가능성이 높음. 그렇다면 성교의 난은 사실 초나라 세력이 성교를 후원해
벌인 반란이었음. 그러나 반란은 실패하고 이로 인해 초나라 세력은 더 위축되게 되어버림. 그래서 초나라 세력은 최후의
수단으로 최악의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정함.
- 다른 곳도 아닌 내궁. 여불위는 물론 진시황도 맘대로 출입이 어려운 곳에 노애를 들이는 것이 가능한 건 다름아닌 내궁의
여자들을 꽉 잡고 있는 초나라 외척 세력. 그러니깐 노애를 거세하고 내궁을 들인 것은 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여불위가 아닌 초나라 외척 세력이었음. 그들은 시정잡배인 노애를 감언이설로 섭외해서 내시로 가장해 내궁에 들임.
- 내궁에서 고립된 상황이었던 조희는 예상치 못한 노애와의 조우에 경악함. 그리고 그에게 저항하려 하나 주변에 도와줄
사람은 전무한 초나라 여자들의 틈에서 결국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게 됨. 하지만 이 사상초유의 상황을 아들인 진시황의 누가
될까봐 밖에다 말할 수도 없던 조희. 결국 그녀는 노애와 그를 보낸 초나라 세력에게 굴복하게 되어버림.
- 그리고 초나라 세력은 자신의 수중에 떨어진 조희를 주변 시선이 없는 곳에서 감금하려 함. 그래서 사서에 기록된 조희를
진의 옛 수도인 옹 땅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임. 그나마 진시황과 여불위의 시선이 닿는 현재의 수도 함양이 아닌
노애의 봉지, 사실상 초나라 세력의 영지인 옹으로 조희를 끌고와 자신들의 손에 넣고 지독한 수모를 안겨주었던 것임
- 그래서 그 결과가 바로... 일국의 황태후가 시정잡배의 아이를 출산하는 역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벌어져 버린 것임
대외적으로는 조희의 외도로 알려진 이 사건은 사실 외척 세력의 지독하게 저열한 정치적 공세에 의거한 강간 범죄였던 것임.
- 그리고 이 상황은 과거 조나라에서 조희를 자초와 주선한 사실을 근거로 초나라 세력에 의해 은밀하게 여불위와 엮인
성추문으로 왜곡하여 대외에 알려지게 됨. 그러면서 슬그머니... 진시황이 진나라 왕실의 혈통이 아닌 여불위의 자식이라는
루머로 치명적인 정통성의 흠집을 내려함.
- 결국 그 시도의 결정타는 바로 노애의 반란. 장양왕이 죽은지가 언제인데 조희의 아이를 왕으로 세운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명분. 사실 이 반란의 실상은 실제 반란이 아니라, 노애의 후견인인 초나라 외척 세력이 저지른 조희와 여불위, 그리고 진시황의
정치적 실각을 노린 더러운 폭로극이었던 것임
- 한마디로 실제 성공하려고 한 반란이 아니라, 노애의 반란이라는 덮을 수 없는 사건을 통해 조희의 외도와 사생아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드러내고, 그로 인해 진시황의 정통성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고, 그런 진시황과 조희의 친위 세력인
여불위를 실각시키기 위한 음모였던 것임
- 하지만 대외적으로 드러나기는 워낙에 말이 잘 맞아떨어지고 모친인 조희가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진시황은 능동적인 대응을
할수가 없었음. 그래서 그 더러운 음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반란 진압의 사령관으로 초나라 외척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창평군을 사령관으로 선임할 수 밖에 없었음
- 노애는 멋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만 했던가, 아니면 정말로 자기 자식이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꿨을지도 모름. 그리고
어쩌면 노애를 사주한 세력의 감언이설에 죽기 전까지 자신이 정말로 죽진 않으리라 믿었을지도 모름. 그렇지 않다면...
진시황의 앞에서 자기 성기를 드러내서 왕의 모친을 범한 사실을 알려지기 전에 자살하는 편이 나았을테니깐.
- 실상과는 무관하게 그 반란으로 인해 진시황은 큰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됨. 그리고 조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통녀로 낙인찍혀
유배를 하게 되었고, 여불위는 그 단서를 제공한 죄로 실각하고 촉으로 유배를 가게 됨
- 하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초나라 외척 세력. 다시 실권을 잡은 그들은 진시황에게 여불위의 처분을 요구했고, 진시황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할 힘이 없어 여불위에게 서신을 보내게 됨. 사서에 기록된 무슨 공으로 중부라는 칭호를 받았냐는 진시황의
힐난... 그건 진시황이 그의 충신이자 후원자에게 아버지로서 마지막으로 도와달라는 간청이었음.
- 그 의미를 알아차린 여불위. 그는 일생 충성을 다하고 마음 속으로는 자신의 아들처럼 여겼던 주군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스스로 자결을 하기로 결정함. 그리고 그걸 말리려고 달려온 이사에게 자신의 숙원을 대신 이뤄달락 자기 파벌의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
- 어쩌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진한 여불위의 결정 덕에 진시황은 겨우 정치적 고비를 한숨 돌림. 그리고
복수심에 불타지만 일단 그걸 드러내지 않고 은밀히 이사를 중용하여 한과 조와의 전쟁을 통해서 초나라 외척 세력과 싸울
힘을 기름
- 그리고 결국 그런 초나라 외척 세력과 진시황의 오랜 암투가 파국을 맞이한 것이 바로 진의 초나라 원정. 이신의 참패로
기록된 그 전쟁에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어떤 식으로든 초나라 외척 세력은 진나라의 패전에 원인을 제공하는
것에 일조했고, 그로 인해 진의 사령관이던 창평군은 망명해서 초나라의 왕이 되고, 진시황의 근위 세력의 주력으로 양성된
왕전은 상당한 지구전을 통해 진나라 내부의 잡음을 제거하고 나서야 초나라의 정복을 시작하게 됨
- 그로 인해 오랜 진시황과 초나라 외척 세력의 투쟁은 막을 내림. 하지만... 그때 하도 지독하게 당한 설움이 남은 진시황은
초나라에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그로 인해 분개한 항씨 집안 아드님이 큰 사고를 치게 되는데... to be continue?
뭐... 이런 망상을 해보았더랍니다. 사서의 기록을 무시하는 음모론적인 망상이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 갑자기 당시
등장하던 인물들의 인물상들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비춰지는군요.
요새 킹덤 덕분에 젊은 층에게 까지도 사서의 괴팍한 이미지가 더 강렬해지는 조희와 여불위가 갑자기 급 이미지 전환이...
뭐 어디까지나 흔한 망상이니 그냥 웃고 넘겨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