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를 쓴다.
엄마 말에 의하면 나는 찌질하게 펑펑 쓰는 타입이라고 한다.
태어나 지금까지 아껴 써본 적이 없다.
그러나 큰 일이 났던 적이 없다. 찌질하게 펑펑 쓴 덕분이다.
결혼을 하고 남편 카드를 받았다.
내 카드도 쓰고 남편 카드도 썼다.
나는 장을 보니까. 집안에 필요한 가전, 가구 다 내가 고르고 사니까.
남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어달에 한번 카드 명세를 같이 확인했는데 또 쓸데없이 쓴 건 없었다.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이유없이 쓴 것도 없었다.
혼자 살 때 한 달에 10만원 쓰던 남편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남편이 나한테 뭐라 하지 못했던 건
내가 나를 위해 쓰는 게 먹을 것 밖에 없었던 탓이다.
남편 옷은 폴*에서 사도 임신 이후 내 옷은 이마트나 인터넷 최저가로 샀었다.
남편은 내 옷도 좋은 옷 사라고 한다.
내가 강경하게 안 살 뿐.
옷도 가방도 안 사고 먹는 걸로 펑펑..
아내한테 먹는 것으로 타박하는 건 남편 입장에서 좀 그렇잖아..
적지 않은 월급에도 3년 동안 모은 게 거의 없자 남편은 불안해 하는 모습이 부쩍 눈에 보였다.
나도 쫌 불안해졌다.
구글 드라이브에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한 달 됐다. 남편계정으로 공유해서 언제든 들어가서 볼 수 있다.
목돈은 다 남편 명의다. 예적금, 주식 다 내가 관리한다.
난 명의는 상관없다. 얼마인지만 보이면 된다.
장 볼 때마다 얼마씩 보내달라고 한다.
27,700원 이런 식인데 그 때마다 보내달라고 하고 남편은 그 때마다 보내준다.
하루에 3번 보내달랄 때도 있다.
서로 귀찮은 거 싫어하는 타입이라
목돈으로 50만원 줄테니 그거 가지고 알아서 써라/쓰겠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서로 안한다.
나는 덕분에 먹고 싶은 거 좀 참아진다.
남편한테 맨날 머 사먹게 돈 달라고 하기 쫌 그렇잖아.
그런데 그게 편하다. 처음으로 식욕을 제어하는 느낌적인 느낌? 뿌듯뿌듯.
남편은 ㅎ 어차피 가계부를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
그러니 내가 어떤 품목을 어떤 이유로 사게 얼마 보내달라고 하니 생활비가 보이는 듯해서 좋은 것 같다.
당분간 이런 생활이 계속될 듯하다.
나쁘지 않다. 재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