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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바지
게시물ID : dream_29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ikguy
추천 : 0
조회수 : 122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03/17 0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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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바지

"그러니까 우겼어야지!"
역시나 엘로드 얘기였다. 지열은 고개를 숙였다.
 "그게..."
"됐어, 됐어. 배달이나 빨리 다녀와."
수선물이 든 빅사이즈 노스페이스 쇼핑백을 어깨에 건 지열이 벌개진 얼굴로 사장에게 목례를 건넸다.
 "매니저 보면 무조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
 열려 있는 수선실문을 나간 지열은 흘끗 엘리베이터 층광판을 보았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아래층인 7층부터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타닥타닥 계단을 뛰어 내려간 지열은 건물 출입구를 나온 뒤 빠르게 무역센터 방향으로 뛰어갔다. 코엑스몰 출입구로 들어선 지열은 에스티코를 지나치며 통유리너머를 훔쳐보았다. 보라 옆에 웬 남자가 서있는 게 보여 자기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보여주자 보라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가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쓰라림과 부러움. 지열은 한결 더 시무룩한 기분이 되었다. 보석과 사치품들이 진열된 백화점 1층매장에서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탄 지열은 3층 리베이지매장에 수선품을 건넨 뒤 닥스 레이디스로 가 갈색빛깔의 모피망토를 전해 주었다. 에스컬레이터로 돌아갈 때 김연주에서 어느 수선집이냐고 물어왔고, 바로바로수선집이라고 지열이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오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수선품을 넣고 4층을 지나 5층으로 올라가면서 지열은 서서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엘로드때문이었다. 어제 잃어버린 바지의 가격을 물어보았을 때 엘로드 매장 매니저가 17만 4천원이라고 대답했던 것을 지열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돈을 자신이 물어내야 한다고,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같다고 지열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물음이 결국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리고 말았고 나오기 전 그 얘기를 들은 사장이 지열에게 화를 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겼어야지!"
 아까 나오면서 사장이 꾸짖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였다. 지열은 (엘로드 매니저를) 또 마주치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막막한 기분이었다. 이틀 연속 도대체 어디에서 그 검은 바지의 배달실수가 발생한 건지 추리해 보려고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수선실에서 잃어버린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사장님과 수선사님들이 전부 다 총동원되어 샅샅이 찾아보았으니 확실할 것이었다. 지열이 생각할 수 있는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였다. 급하게 뛰어가느라 떨어뜨렸을 가능성. 또 하나는 실수로 다른 매장에 전달했을 가능성.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바쁜 데다 덜렁거리는 성격탓에 실제로 수선품이 쇼핑백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고, 실수로 다른 매장에 전달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나시티나 반바지도 아닌 긴 바지를 떨어뜨리고도 자신이 즉각 알아차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하나, 다른 매장의 수선품을 건네받고 모른 척할 매니저가 과연 있을까하는 것이 또 다른 하나였다. 지열의 추리를 더 오리무중으로 만드는 건 이상하게도 자신이 분명 수선된 그 검은 바지를 엘로드 매니저에게 건네준 것같은 기억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엘로드는 거래가 많은 매장이었으므로, 그리고 검은색은 흔한 색깔이었으므로 다른 수선품을 건네던 때의 기억을 착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어쨌든 지열은 답답하고 무거운 기분이었다.
 '17만 4천원... 월급때까진...'
 어쨌든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월급때까지는. 지열이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을 때 에스컬레이터는 어느새 5층에 도착하고 있었다. 지열은 초조한 기분이었다. 엘페와 수미수미는 바로바로수선실과 거래를 하지 않는 매장이었기 때문에 그 두 매장을 지나치면서 지열은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무냐무냐 매장을 지나칠 때 매니저와 눈이 마주쳐 지열은 인사를 했고, 닥스 골프에는 연두색 폴로티를, 띠어리 매장에 실크정장재킷을 전해주었다. 옆으로 뉜 'e'모양의 마크가 새겨진 연분홍색 골프모자를 쓴 서양 여자모델이 광고패널로 붙은 통로 기둥이 보이자 지열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망설이다 그냥 뒤돌아 상행 에스컬레이터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숄더색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울려왔다.
 "네, 사장님."
 "몇층이야?"
 "5층인데요."
 "데무가서 쟈켓하나 받어와."
 "네."
 "받어서 얼른 와. 나갈 거 있으니까."
 "네."
 전화를 끊고 지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쨌든 월급을 받기 전까지 마주치지 않기도 불가능했고, 또 주문을 할 게 뻔했기 때문에 피하지 말자고 마음 속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엘로드를 지나치려고 했을 때였다.
 "수선실!"
 자주 보는 매니저가 아닌 다른 매니저가 지열을 불러세웠다.
 "아, 네."
 대답하며 지열은 급하게 그 쪽으로 뛰어갔다.
 데무에서 받은 재킷을 노스페이스 쇼핑백에 넣고 돌아오는 길에 지열은 엘로드 매니저와 나눈 대화들을 머릿속으로 곰곰히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도 기억 안 나? 큰 일 났네."
 잃어버린 바지는 우선 손님에게 새 바지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손님이 오늘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아직 찾지 못했으면) 이따 손님이 오면 치수를 다시 재서 맡길 테니 그때 오라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매니저가 사장(바로바로수선실)과 통화를 했고, 그 과정에서 다시 두 쪽 다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반이라니요, 사장님. 우리가 맡기고 못 받은 건데..."
 아마도 수선실 사장님이 전화를 걸어온 엘로드 매니저에게 바지값을 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에 반박하는 매니저에게 사장이 또 무슨 말을 했는 지 "그럼 받아놓고 안 받았다고 한단 말이예요, 우리가?" 매니저가 한결 더 언성을 높였고, 지열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곁에서 자신의 전화기로 사장과 대화를 나누는 엘로드 매니저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무조건 우겼어야지!" 아까 수선실을 나올 때 사장이 했던 말이 다시금 지열의 머릿속에 떠올랐고, 얼굴이 벌게져 지열은 얼른 이 난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면서 고개 숙인 채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알았어요, 아무튼. 이따가 맡길 테니까..."
 사장이 뭐라고 얘기를 했는지 다소 누그러진 톤으로 그렇게 말한 매니저가 전화를 끊고 웃으며 지열에게 다시 스마트폰을 건네 주었다.
 "더워요?"
 아마도 지열의 얼굴이 빨개져 있는 것을 보고 더워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지열은 급히 그 자리를 빠져 나왔었다. 에스컬레이터는 3층에 도착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열은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열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솔로몬의 심판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수선품을 받아 수선작업을 하고 그것을 배달하는 과정 어디에선가 일이 잘못 되었는데 각자의 입장과 애매한 기억들때문에 모두가 다른 해결방식을 바라고 있다. 원인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그 해결방식이라는 것도 불합리하게 느껴졌을 뿐더러 그것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지금 사장님과 매장 매니저와 자신이 원하는 방식 역시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은 자신(지열)이 물건을 잃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탓하지도 않으며 그저 지열 자신이 그 자신의 그 애매한 기억을 필사적으로 신뢰하여 그 주장을 관철시키지 않은 것을 탓하고 있고, 매장 매니저는 얘기를 나눠봐야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했기 떄문인지 당사자인 지열과 바지를 잃어버린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역시 탓하지도 않는다. 지열 역시 자신이 확실히 수선실에서 그 바지를 가지고 나왔는지 아닌지에 대한 기억도 애매하고 어쩐지 그 바지를 매장 매니저에게 전달했을지도 모른다는 기억이 있음에도 자기 돈으로 물으려 하는 것이다. 이제 사회에 갓 나와 첫 사회생활인 이 알바를 하게 된 지열에게 이 별수롭지 않은 상황은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로 다가왔던 것이다. 3층에서 내린 지열은 매장 매니저가 자신을 부르지 않는 지 주의하며 빠르게 매장을 한 바퀴 돌았다. 낮시간동안 식사뷔페를 하는 호프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그날 8시 퇴근을 할 때까지 지열은 수선실과 백화점, 그리고 무역센터와 그 부근 의류매장들을 왔다갔다 했다. 아주라곤 할 수 없었지만 꽤 바쁜 날이었고, 덕분에 다른 매장을 갈 때는 잠시 엘로드의 잃어버린 그 바지에 대한 생각을 잊을 수 있었지만 5층을 가거나 엘로드 매장 근처를 지날 때마다 가슴 한 켠이 묵직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후 3시 좀 넘어서는 보라의 매장이기도 한 무역센터 지하에스티코에서 수선의뢰전화가 걸려오기도 해서 잠시 설레이기도 했었지만 보라의 옆에 서 있던 그 남자가 여전히 매장에 있는 것을 보고는 곧 우울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수선물을 맡길 때 보라가 지열에게 지어준 미소는 너무 맑고 친절하고,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자신이 통유리를 지나치며 본 남자에게 지어 준 활짝 핀 웃음을 자신에게 지어주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을 지열은 했다. 이러다 정말 또 짝사랑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함이 들기도 했었다. 사장은 그날 엘로드 바지에 대한 얘기는 더이상 꺼내지 않았지만 그렇게 봐서 그런지 내내 좀 언짢은 얼굴표정이었다. 그게 일하는 내내 계속 지열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8시가 되어 결국 퇴근시간이 되었을 때 지열은 안도감과 함께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다시 또 느껴졌다. 정말로 긴, 그런 하루였다... 다음 날 수선실에 출근하고 나서 지열은 미리 출근을 한 수선사 한 분이 커피를 마시는 동안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미싱이 놓인 미싱사분들 개인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잡동사니들을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사장이 왔고, 자신의 인사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장의 얼굴 표정을 보고 지열은 역시나 엘로드의 그 바지는 찾지 못 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오늘 출근하는 동안 혹시 어제 밤이라도 다른 수선물틈에 끼어 있던 그 바지가 발견이 되지 않았을까 일말의 기대를 품었었던 것이다. 수선사분들로써는 이 수선업무는 개인사업이라고 볼 수 있었고, 수선물들도 매일 급한 것들만 들어오는 것은 아니어서 어쩌면 어제 늦게 퇴근을 한 수선사분이 기일이 좀 넉넉한 다른 수선물을 수선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엘로드의 그 바지가 발견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은근히 품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장의 표정을 보니 그런 기대는 그저 헛된 기대였던 모양이었다. 만약 누군가의 수선물에 끼인 바지가 발견이 되었다면 가장 늦게 퇴근을 하는 사장님이 모를 리가 없을텐데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라면... 9시 40분이 2분 남짓 남았을 때 지열은 아침에 가지고 나가야 할 수선물들을 노스페이스 쇼핑백에 챙겨 넣고 문 쪽으로 갔다. 내실을 지나치며 미싱 앞에 앉아 돋보기로 폴로티 장식부분을 관찰하고 있는 사장을 지나치며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할 때였다. "어어, 그래." 고개를 끄덕이다 사장이 "잠깐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슨 일인가하고 멈춰 선 지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웬 봉투 하나를 지열에게 내밀었다. "이거 엘로드 갔다줘."
지열은 입을 벌린 채 말없이 그 봉투를 받았다.
"다음부터 절대 덜렁거리지 말고."
얼굴이 빨개진 지열은 아주 조그맣게 "네"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 달 그믐 지열은 월급을 받으면서 내일부턴 나오지 말라는 얘기를 사장으로부터 들었다. 지열은 놀라 입을 벌리고 "아, 네."라고 대답했고, 빗자루를 들고 마지막 퇴근 청소를 하려고 했을 때 사장으로부터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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