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
글 : 월향
#1
난 텀플러 속에 얼음을 넣고 다닌다. 요즘 같이 푹푹 찌는 여름엔, 얼음이 나에게 만병통치약과 같다. 오늘도 냉동실을 열어 얼음을 텀블러에 가득 넣는다.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저 밖의 매미소리처럼 여름이 왔음을 알린다.
옷맵시를 단정히 하고, 출근길에 오른다. 오늘도 역시 지하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었다. 서울이라는 개미집엔 사람이 너무 넘친다. 미세먼지도 많은데 왜 이렇게 다들 서울, 서울 하는지. 뭐, 나도 대학생 때부터 서울로 취직하는 게 목표였지만.
“잠시 후 당산, 당산행 열차가 들어옵니다.”
아, 얼음을 먹으려 했는데. 서둘러 열차에 올라탔다. 역시나 사람이 빼곡하다. 오직 사람만이 빼곡하다. 차갑고 이로 부시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텀블러 속의 것이 필요하나, 팔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2
드디어 도착했다. 에어컨의 시원함. 아, 얼마나 그리웠던지. 자리에 앉기 전,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로 향한다. 보리차를 넣어 마시면 더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김 대리. 역시 탕비실로 가장 먼저 오네. 그럴 줄 알고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박 과장님은 눈을 얇게 뜨고는 탕비실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아,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에이, 김 대리. 재미없게 왜이래? 김 대리가 자꾸 날 피하니까 내가 김대리를 항상 찾아다니는 거지~”
더러운 새끼. 결혼한 유부남에, 딸자식도 있는 놈이 내 엉덩이를 주물 거린다.
철컥
“아, 죄송합니다.”
윤 대리다. 자신보다 상사인 과장이 날 성추행하는 걸 목격하고도 문을 닫는 윤 대리를 혹시 마음속으로 욕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알려주고 싶은 게 있다. 윤 대리만이 아니다. 박 과장의 나를 향한 더러운 취미는, 모두가 알고 있다. 팀장 부장 할 것 없이. 심지어 이 글을 읽는 당신조차도.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김 대리. 표정 풀어~ 김 대리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예뻐서. 오늘 야근이지? 기다릴게.”
“과장님.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과장님께서는 아내분도 있으시고, 또 유진이도 이제 일곱 살이지 않습니까.”
“김 대리. 김 대리는 다 좋은데 참 말귀를 못 알아들어. 김 대리 나 아직 그 USB갖고 있는데, 인터넷에 한 번 올려봐야 정신 차리지?”
“...알겠습니다.”
박 과장. 박 과장 이 쓰레기새끼. 이 새끼가 내 자리 밑에 글쎄 카메라를 설치해 놨었다. 그리고 난 회사 방침에 맞게 매번 치마를 입고 온다. 아무리 스타킹과 속바지를 챙겨 입어도 그 각도에서 찍힌 사진, 동영상들은 내게 수치심을 주기 충분하다.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느냐고? 나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나 하나지만, 이전에 또 다른 김 대리가 있었다. 김 대리는 회사를 이기지 못하고, 삶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끝냈다. 내가 다니는 회사를 봐라. 여사원들 의복 규정이 애초에 치마인 곳에서 도대체 뭘 기대하란 말인가. 사건을 덮기에 급급할 것이다. 박 과장이 사장의 낙하산인 것도 이유가 되겠지. 난 낙하산은커녕 우산조차 없다.
“그래, 그래야지. 그럼 먼저 가볼게, 김 대리?”
그래. 어쩔 수 없다. 조금 있으면 엄마의 환갑잔치가 다가온다. 막둥이라고 받기만 하면서 자랐다. 이번엔 엄마가 갖고 싶다던 안마의자를 사드리고 싶다. 누군가에겐 껌 값일지 모르겠지만 학자금 대출에,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는 내게 역부족이다. 더 버텨야 한다.
철컥
“하...”
울고 싶다. 아냐 괜찮아. 할 수 있어. 괜찮아.
눈물이 차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의지 밖이다. 텀블러를 연다. 뭐라도 차가운 걸 먹고 진정을 시켜야겠다.
“...어?”
그런데 이게 뭐지? 내 텀블러에 얼음이란 온데간데없고, 텅 비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다. 텀블러의 끝에, 스테인리스로 된 바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눈이 하나 보인다. 정확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의 왼쪽 눈인 것 같다. 까만색 동공에, 짙은 쌍꺼풀, 커다란 눈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헛것을 본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한 번 텀블러 속을 본다. 이번엔 입이다. 놀란 마음에 뚜껑을 닫고 돌리려는데,
“김 대리.”
“김 대리, 낄낄낄”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 텀블러를 타고 귀신의 목소리가 울린다. 칠판을 긁는 것과 같고, 녹슨 문고리를 돌리는듯한 목소리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제 난 귀신에 씌는 걸까?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나랑 거래를 하자.”
2편은 며칠 후에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쓰다보니 길어지네요 하하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