텀블러
글 : 월향
“나랑 거래를 하자.”
“...”
“너, 저 쓰레기를 죽이고 싶은 거 아니야? 낄낄낄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고.”
박 과장을 죽인다고? 내가? 무슨 수로?
“네가 죽였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내가 장담하지. 그러니까 어서 뚜껑을 열어 보라고.”
아무도 내가 범인인 걸 모른다니. 그게 가능할 리가. 아니, 애초에 텀블러 바닥을 통해 귀신을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떻게 죽인다는 거죠?”
“낄낄낄. 드디어 열었구만 그래. 원래 이 텀블러에 담겨 있던 얼음. 그걸 사용하는 거야. 이 얼음을 그 자식에게 먹여. 커피에 얼음을 띄워 녹여 먹이든 깨물어 먹이든. 한 알이면 충분해.”
“단순히 먹이기만 하면 죽는다고요? 박 과장이 순순히 얼음을 먹을까요?”
“너도 참 바보 같구나. 네가 가져온 얼음은 보통의 얼음이잖아. 그걸 먹으면 죽는다는 걸 아는 건 너와 나뿐이라고. 그걸 먹이면 밤10시 이후에, 너를 제외하고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몸에서 또 다른 얼음이 나올 거야. 그럼 넌 그걸 내게 주기만 하면 돼. 얼음에 담긴 그 사람의 영혼을 내가 먹는 거니까. 지옥의 여름도 폭염이라, 영혼얼음이 필요하단 말이지. 너도 그 사람이 평생 벌 받길 바라잖아? 내가 있는 이 곳은 지옥이야. 그 인간을 죽어서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낄낄낄”
“하지만, 실패하면요? 만약에 죽지 않으면 어떡하죠?”
“걱정도 많은 대리님이구먼, 일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보라고 낄낄낄”
“저기요, 저기요!”
맙소사. 사라졌다. 눈 깜빡하는 그 잠시 사이에 귀신의 입이 평범한 얼음으로 바뀌었다. 텀블러를 통해 귀신을 처음 봤을 때와는 또 다른 참담한 기분이다.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일단 얼음을 먹이자. 근데 이걸 어떻게 줘야 박 과장이 자연스럽게 마실까? 먼저 물어보고 커피를 타줄까? 아니야, 안 먹는다고 하면? 그럼 무작정 커피를 타줘? 아침부터 마실까? 아니 그 전에, 그럼 난 살인자인 거잖아. 아무리 더러운 놈이라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남편에, 소중한 아빠일 텐데.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울고 싶다 정말.”
#3
“자, 밥들 먹고 합시다.”
점심시간이다. 드디어 점심시간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분명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 강 팀장님은 내게 커피심부름을 시키실 게 분명하다. 얼음을 넣을까, 말까.
“김 대리, 밥 안 먹어? 왜 가만히 앉아 있어?”
“아, 전 속이 안 좋아서, 하던 업무나 마저 하려고요. 죄송해요.”
도저히 밥이 들어가질 않을 것 같다. 긴장감에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장기들이 살려 달라 외치고 있단 말이다. 혹시, 박 과장에게 얼음을 먹이지 않았다고 날 죽이는 건 아니겠지? 그냥 텀블러를 갖다 버릴까? 아, 어쩌면 얼음이 문제일지도. 앞으로 평생 얼음을 먹지 않고 살면 되지 않을까?
“그럼 우리끼리 먹고 와야겠네.”
“네, 맛있게 드세요, 부장님.”
철컥
모두가 나갔다. 혹시 모르니 탕비실로 향하곤, 문을 잠근다. 텀블러를 여는데, 역시나 얼음뿐이다.
“저기, 저기요!”
“그, 귀신님!”
“야!”
여전히, 얼음뿐이다. 제기랄. 제기랄!
#4
바깥이 소란스럽다. 모두가 돌아온 것 같다.
철컥
“아니, 그래서 우리 애가 재롱잔치에서 센터에서 춤을 추지 뭐야.”
“어머, 정말요?”
“그래, 어찌나 귀엽고 또 잘 추던지. 커서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는데, 내 눈에도 재능이 보이더라니까~하하하”
박 과장은 결혼한 유부남에, 일곱 살인 딸이 있다. 유진이. 나도 사진으로 많이 봤다. 유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겠지. 그래. 나쁜 마음먹지...
“김대리. 보고 싶었어.”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 와중에, 박 과장이 귓속말로 보고 싶었다, 중얼거린다. 그 와중에 손은 가슴을 스친다. 다른 사람들은 애써 눈을 돌린다. 아, 웃기다. 지금 이 상황. 너무 우습다.
“박 과장님. 커피 타 드릴까요?”
“오, 좋지.”
“다른 분들은요?”
“아, 그럼 고맙지 김 대리!”
철컥
얼음을 넣을까, 말까.
#5
“김 대리, 오늘 야근이구나. 고생해요, 난 먼저 들어가 볼게?”
“네, 팀장님. 조심히 가시고, 내일 봬요”
“저희들도 그럼 가볼게요. 김 대리님, 박 과장님 내일 봬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 나랑 김 대리는 야근 열심히 할게~ 조심히 들어가세요.”
타다다닥
사무실엔, 키보드 소리만 울린다. 박 과장은 내가 업무를 마치길 기다리며 자고 있다.
[딩-동. 10시. BO라디오가 10시를 알려드립니다.]
드르륵
또각 또각
박 과장의 자리로 갔다. 그래, 귀신의 말이 맞았다. 박 과장은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는데, 입 앞에 검은색 얼음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박 과장은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꼴좋다! 하하하하! 이 더러운 새끼! 더러운 새끼!”
한껏 열을 내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다. 텀블러를 여니, 귀신의 눈이 보인다.
“낄낄낄. 표정을 보니 성공했구만 그래. 어서 얼음을 보여줘.”
“...”
“오, 검은색 얼음이구만. 투명한 얼음이 짙어질수록 죄가 많은 것인데, 이 자식의 영혼은 죄로 가득 찼구만. 아주 시원하겠어. 자, 어서 얼음을 줘.”
순식간에 귀신의 입이 보인다. 지옥의 냄새가 여기까지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이는 날카롭고, 혀에는 지진이 난 듯 균열이 나 있다. 박 과장의 영혼을 지옥에, 그것도 지옥에 있는 더러운 귀신의 입속에 보내려니...이렇게 즐거울 수가! 드디어 해방이다! 난 텀블러에 미끄러지듯 얼음을 넣었고, 곧 귀신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아주 시원해. 고마워, 김 대리? 낄낄낄.”
“잠시만요!”
귀신이 사라질 듯 싶어, 얼른 붙잡았다.
“제가 한 짓이란 걸 사람들은 정말 모르나요?”
“당연하지. 귀신들은 계약을 할 때만큼은 진지하다고. 영 못 믿겠으면 내일 출근해봐. 그리고 사람들이 너란 걸 알면 다시 나를 부르라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단은 기다리고 있도록 하지. 낄낄낄”
#6
“안녕하세요.”
“어머, 김 대리. 잠깐 이리 와봐.”
“어? 윤 대리?”
“김 대리. 글쎄 박 과장이 어제 야근을 하다 심장마비로 죽었다지 뭐야.”
“네?”
“아니, 어제 우리 다 같이 퇴근해서 박 과장 혼자 야근했잖아. 그래서 새벽에 아무도 몰랐다가 아침에 경비아저씨가 발견했다지 뭐야. 그동안 김 대리 고생 많았어. 그놈은 죽어도 싸. 지옥에 가도 싸다니까?”
박 과장이 죽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애초에 낙하산이라 하는 업무도 적었고. 여전히 사무실은 돌아갔다. 그리고 난 탕비실로 가, 텀블러를 열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아무도 내가 한 짓인 줄 몰라요.”
“낄낄낄. 그래, 내가 이 정도라니까? 낄낄낄”
“그래서 그런데 혹시, 얼음 더 필요하지 않아요?”
“...”
“몇 개 더 드릴 수 있는데.”
귀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블라인드 너머로, 몇 명이 더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