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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와서 다시 보는 한국 불교와 진짜 불교의 차이
게시물ID : humordata_18972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루빠
추천 : 2
조회수 : 219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21/03/09 08:20:09

지금 와서 다시 보는 한국 불교와 진짜 불교의 차이
 
1. 영혼의 차이

영혼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단멸론자와 불가지론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영혼의 존재를 긍정한다.
육체는 단지 그릇일 뿐이고 정신 부분이 따로 존재하여 그것이 종교에 따라 
사후 세계로 가던지 윤회를 한다고 생각한다. 2500년 전 인도에서도 브라만교가 그런 논리를 펼쳤다.
그들은 변치 않는 '아트만'이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듯 몸을 갈아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그 당시에 이미 불교의 태동과 함께 박살 났다.

불교에서는 '존재'를 크게 정신과 물질, 세세하게는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무더기로 설명한다.
그곳에 변치 않는 '자아', '영혼', '아트만', 등등의 것은 없다고 말한다.
마치 강물은 고정된 형태가 없지만 '한강'처럼 이름을 붙였을 뿐인 것과 같다.
정신현상 또한 한강이 흘러가듯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에 
내 것이 아니고, 나도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불교다.
다시금 말하지만 영혼 같은 것은 없고 정신 현상도 조건의 영향을 받아서 
일반적으로 육체가 없으면 정신현상도 작동할 수 없다.

2. 사후세계

신을 믿는 종교, 혹은 절대자가 존재하는 종교는 법칙을 가볍게 무시한다.
그러나 불교는 법칙을 설명할 뿐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의도'에 따른 업이 결과를 맺는 '인과'를 설명할 뿐이다.
그렇게 법칙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고 그 사이의 틈이란 것은 없다.
이것을 멈추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오로지 아라한만이 이 흐름을 끊는다.
'확정된 업'이 아니면 다음 생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삶의 마지막 순간 떠오른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 마음은 제어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통 속에서 죽는 대부분의 삶은 악처로 간다. 극히 일부만 선처로 갈 뿐이다.

3. 인간의 조건

'모래사장의 모래'와 '손톱에 올릴 수 있는 모래의 양'은 비교가 힘들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만큼 선처로 가는 사람은 적다. 6가지 세상 중 좋은 곳은 천상과 인간세상 단 둘 뿐이다.
끊임없이 윤회하기에 악처로 가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번 악처에 빠지면 다시 선처로 나오기란 매우 매우 오래 걸린다. 
예를 들어,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선업을 하기 매우 어렵다. 약육강식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악처에서 악행을 하게 되어 악처로 끊임없이 흘러간다.

아주 적은 인간만 선처로 가지만 이런 위험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5계'이다. 5계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대부분 좋은 결과를 가진다.
특히 비구로서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면 그의 바람은 대부분 이루어진다.
선업을 많이 쌓았다면 악행을 했어도 희석되는 부분이 있다.
물컵에 소금을 한 줌 넣으면 매우 짜듯 선업이 적다면 작은 악행으로도 악처에 난다.
강물에 소금을 한줌 넣어도 짜지 않듯 선업이 많다면 작은 악행은 상쇄되거나 사라진다.
불구로 태어났어도 부잣집에 태어나면 돈 걱정은 안 하는 것처럼 선업은 언제나 좋다.
5계는 인간의 조건도 된다. 즉,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예외 없이 선업이다. 
다만 선업이 약하거나 악업이 많다면 정상적으로 살지 못한다.

4. 제사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두려워하지만 죽음이 임박하기 전까지는 선업을 잘하지 않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죽은 뒤에 제사로 퉁치려고 하지만 이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지은 업은 남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악행 또한 비교도 안될 만큼의 선업으로 희석시키지 않는 한 돌아온다.
아라한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논외다.
이미 경전에서 번거로운 제사보다 훨씬 수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5계라고 나온다.

5. 예언

경전에서도 나오고 수행이 잘 된 사람이 예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의 원리는 이렇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보통 평균 수명의 삶을 살 것을 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기대수명도 알 수 있다.
유전학적으로도 그 사람의 수명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수행을 통해 정신현상을 분석할 수 있게 되면 그 존재의 정신, 물질, 과거 업과 미래 업을 분석할 수 있다.
이번 생을 있게 한 '업'과 '지금 시점'에서의 미래까지 흐름을 보게 된다.
미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조건들이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불교는 숙명론이 아니다.
드물지만 조건을 변화시켜 단명할 삶이 장수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도 악업이 지금 발현이 안 될 뿐이다. 조건만 맞으면 악업은 발현될 준비상태가 된다.
'확정된 업'인 경우는 예외 없이 반드시 발현되는데 예를 들어, 부모 살해는 다음 생이 지옥 확정이 된다.
이것은 목이 잘리면 다시 살아날 수 없듯 법칙상 결코 바꿀 수 없다.
아라한인 경우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6. 붓다의 사후?

붓다의 완전한 열반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마치 촛불이 꺼졌는데 촛불이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촛불은 3가지 조건이 이루어져 발생하는 현상일 뿐이다.
촛불이 꺼지면 촛불이 어딜 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존재하기도, 비 존재하기도 한다'
이 네 가지 명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화로에 불이 붙으면 화톳불, 초에 붙으면 촛불, 장작에 붙으면 장작불이다.
불이 꺼지고 난 후 불이 어디 갔느냐고 언급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이 이상하거나 사기꾼이다.

7. 기도

불교는 조건과 현상을 설명하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종교가 아니다.
선업을 짓고 '이 선업의 공덕으로 000 하기를' 바라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아무런 대가 없이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독재국가의 지도자가 수만 명을 죽이면 그에 합당한 결과를 받는다.
그를 지지하는 수 억의 지지자가 그가 좋은 곳에 태어나길 기도 한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악업이 발현될 조건이 만들어진다면, 조건을 변화시킬 힘이나 지혜, 선업이 없을 경우 발현이 된다.

8. 보시

엄밀히 따지면 나쁜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 좋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마치 노름꾼에게 만원을 주는 것보다 착하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한 끼 사 드리는 것이 더 좋은 것과 같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지친 여행자에게 쉴 곳을, 배고픈 자에게 밥을 주는 것은 매우 이롭다.
불교적으로는 계를 더 많이 지킬수록, 수행이 깊은 사람일수록, 결과가 100배씩 차이가 난다.
성인에게는 한 끼만 대접해도 결과를 측정하기 어렵다. 경전엔 이런 예시도 나온다. 
아침, 점심, 저녁, 300명에게 일정기간 동안 식사를 대접해도 
성인인 수다원 한 분에게 한 끼 드리는 것에 1/16도 미치지 못한다.
중생이 내가 아는 만큼 업의 결과를 안다면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지 않고서는 먹지 않을 것이다.

보시의 종류와 이익은 상세하게 설명되어있지만 생략한다.

9. 악업

업의 발생은 조건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이다.
걸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벌레를 밟아 죽인 것이 죄가 된다면 걷는 것만으로도 악업이 쌓인다.
다행히도 법칙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심히 걷는 이유가 있다면 단지 자비심에서다.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전, 의도가 없다면 어떤 것도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
살생이 악업을 불러일으키지만 살생이 업이 되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1. 의도 2. 행동 3. 행위의 성공, 하나라도 없다면 살생의 업은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악한 의도는 언제나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온다. 하지만 행위를 하고, 성공을 해서 오는 악업에 비하면 적다.

10. 선업

기도라고 하고 욕심이라고 쓸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을 제외하고 선업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
존경의 표현 - 향을 태우거나, 절을 하거나, 꽃을 올리거나 하는 것들은 좋은 마음의 업과 행동을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존경의 표현이 아닌 경우 - 음식을 불상에 올리는 것은 도교의 제사나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다.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는 육체적 노동도 마찬가지다. 

11. 사후세계의 재판
따위는 당연히 없다.

12. 부적
도교 꺼, 비구는 도사가 아니다.

13. 사주팔자
도교 꺼, 비구는 계율상 점을 치면 안 된다. 비구는 장사꾼이 아니다.

14. 소림사
불교는 육체적 단련을 위한 곳이 아니다. 비구는 트레이너가 아니다.

15. 염주, 목탁, 
비구는 제사장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리는 금기다.

16. 사찰음식
비구는 요리사가 아니다. 걸식하는 자(빅쿠)다.

17. 대승불교
...


비구계를 보면 지금의 불교가 얼마큼 괴리가 심한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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