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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에세이 : 병수발과 가방과 이메일과 그리고 엄마.
게시물ID : lovestory_9198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제인산초
추천 : 1
조회수 : 79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6/11 09:58:23
매일 브런치에 글을 쓰고있어요. 어제는 엄마생각이 나서
글을 써봤습니다. 종종 글 나눔하러 올게요^^
 
여름나무의 브런치 운영하고있어요. 
원글 링크: 
https://brunch.co.kr/@rainyhojin/209


2011년, 사고로 허리가 골절됐다. 스물여덟의 딸은 응급차로 천안에서 분당까지 실려왔다. 새집을 석 달 동안 쓸고 닦느라 골병이 든 엄마는 딸 병수발을 했다. 전치 12주 부상. 한 달은 병원에서. 두 달은 엄마의 집에서 숙식하며 주 1회 재활치료를 했다.

허리 수술 한지 오년된 엄마는 딸년의 허리골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딸의 내장기관은 멀쩡했다. 엄마는 사골과 도가니탕을 끓여다 먹였다. 입원 초 3주 동안은 화장실도 못 가고 누워 지냈다. 내장기관이 멀쩡한 딸년의 소화는 매우 잘돼서 엄마는 나이 오십넘어 나로 인해 험한 꼴을 다 봤다.

한 달 만에 퇴원했다. 플라스틱 허리보호대를 차고 크록스를 신고 대충 자란 머리를 묶고서. 병원비를 내고 학교와 보험사에 낼 진단서를 받다가 깜짝 놀랐다. 독립하고 통장에 가장 돈이 많아서. 월급을 쓰지만 않아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곧 보험금도 입금되었다. 재벌 부럽지 않았다.

엄마가 외출을 한 어느 날, 죽전 신세계백화점으로 갔다. 허리보호대 위에 박스티를 입고 프로스펙스 더블유 분홍 운동화를 신고 반바지를 입은 채 마을버스를 타고. 오십오만 원을 주고 코치 가방을 사 왔다. 엄마는 가방을 보더니 단호히 본인 스타일이 아니라며 다음날 직접 교환해왔다. 그 후, 엄마는 오십만 원 넘는 가방은 처음이라며 모든 외출하는 곳에 그 가방을 들고나갔다. 무척 뿌듯했다. 아직도 후회된다. 보험금 다 털어서 루이뷔통 스피디 30을 사드리지 못한 것을.

곧 집에서 놀고먹는 생활을 시작했다. 동생들은 아파서 본가에 온 장녀의 신선놀음을 부러워했다. 누워서 허리찜질을 하고 죙일 피망 고스톱을 치면 일당 십만 원이 입금된다며. 나는 매일 올인당하고 리필을 받으며 부러우면 교사 되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4년 차 찐따 일알못 교사인 나는 복직하는 게 두려웠다. 솔직히 스무 살에 독립해 재수 1년 잠시 들어와 살다가 다시 한 달 넘게 엄마와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참 좋았다. 케어 받고 싶었던 본능을 이렇게 충족했다. 그러나 엄마는 싫었겠지 생각할 무렵,

컴퓨터에 앉아 글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천안으로 돌아갈 때도 가까워진 거다. 엄마는 오전 열한 시마다 어딘가에 글을 쓰는 나를 궁금해했다. 뭐 쓰냐고 하면 엄마 흉본다고 했다. 흉이라도 있으면 볼걸. 그런 것도 없이 늘 성실했던 엄마를 흉볼 게 없었던 게 아쉬웠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글을 쓰고 싶어 했던 소녀 엄마를. 외갓집에 박제된 엄마의 시 쓰기 흑역사를. 닭을 삶고 있던 엄마를 급하게 불렀다. 엄마는 식탁의자를 갖고 와서 내 옆에 앉았다.

엄마엄마. 이거 봐 바. 주민번호 이거 맞지? 봐봐. 엄마 생일이랑 전화번호랑 요래 조합해서 이거. 아이디야 아이디. 종이에 써줄게. 비밀번호는 요거요거. 그리고 써봐바. 어어. 됐다 로그인. 여기 이메일 있지? 어어 여기에 글씨 써봐. 자판 연습하면 금방 늘어. 안녕이라고만 쓸 거야? 그럼 다음에 길게 보내줘. 이게 내 이메일 주소인데, 주소 몰라도 로그인 한 다음에 내 이름 누르면 바로 편지 쓸 수 있어. 우리 편지 주고받아서 책으로 묶자. 엄마 나이 들기 전에 책 내야지. 작가 하자.

내가 이렇게 떠드는 동안 엄마는 말이 없었다. 이메일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서는 한참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앞치마를 두른 몸으로 갑자기 나를 꽉 안았다. 내가 기억이라는 걸 시작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달래기 위해 아기였던 동생을 안아주는 것 말고는 나에게 이렇다 할 애정표현을 한 적이 없었어서. 나도 순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울컥하는 마음도 있어서 꽃무늬 엄마 앞치마에 얼굴을 묻고 둘이 한참 울었다.

일찌감치 집 나가서 살아서 고생만 한다. 엄마가 잘해주지도 못하고...
엄마가 어렵게 뗀 한마디.

엄마처럼 잘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한참 있다 겨우 한마디를 뗐다.

아유 닭이 다 됐나. 하고 엄마는 주방으로 갔다. 잠깐 취했던 사람들처럼 나도 엄마의 계정에서 로그아웃했다.

그 후 종종 엄마에게 물었다. 언제쯤 신춘문예 응모할 거냐고. 엄마는 그럴 정신이 어딨냐고 했다. 내가 노트와 커버를 사다 주니 무척 좋아했다. 그래 글 한번 써야겠다 했다. 엄마가 환갑 때는 가능하지 않을까? 말하길래 등단 하든안하든 꼭 책 내 주께 하고 2018년에 창작하라 여우비 독립출판사를 등록했다. 그리고 엄마는 2020년 환갑을 한 달 남기고 거짓말처럼 떠났다.

내가 엄마와 외할머니 살던 얘기 좀 써주라 했던 노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노란 포스트잇에 신장에 좋은 요리. 뇌졸중에 좋은 요리가 메모되어 있었다. 장롱 깊은 곳에는 내가 조공한 코치 가방이 있었다. 그 가방과 노트를 지금 우리 집으로 들고 왔다. 가방에는 엄마가 쓰던 포스트잇과 볼펜. 그것도 내가 다스로 사다준 것들. 화장품 샘플이 있었지.

돈 벌기 시작하며, 화장품 세일을 하면 습관적으로 하나를 더 샀다. 엄마 이거 써보니까 좋더라. 하고 나눠썼다. 얼마 전 주문한 비비크림이 두 개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뜯지도 못한 비비를 화장대에 넣고서 한참 멍하니 있었다. 왜 두 개를 주문했더라 생각하다가 장롱을 열었다. 가방을 꺼내보고 그 속에 있던 손수건을 꺼냈다. 주황색 노란색 도트가 있는. 그 손수건을 빨아서 말린 다음에 내 가방에 옮겨 넣었다.

그리고 오늘, 요즘은 잘 안 쓰는 다음 메일을 찾아봤다.


떨어져 지낸 세월이 길었다. 빨리 독립했다고 생각했고 엄마에게는 나는 늘 골칫거리라고 애써 거리 두었다. 결혼하고도 애를 낳고도 나를 그리 걱정했다는 엄마를 원망했다. 흉잡히기 싫어서 그리 애를 쓰고 살아도 소용없군. 이라는 잘못된 신념이 나를 쥐고 살아서 그렇다. 엄마가 꽝인 내 패션감각과 정리못하는 내 자취방을 동생들에게 흉보는 시간이 나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이었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닌가. 진짜 흉본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 생각도 하기 싫으면 얘기도 안했을테지.

엄마에게는 나의 흔적이 없겠지 했다. 그리고 나를 못미더워하는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고 나는 애써 생각했다. 엄마는 날 빨리 잊었을 거야. 하지만 온통 그 사소한 소품들이 엄마 가방에. 주머니에. 그리고 여전히 몇 개씩 엄마와 나눠 쓸 물건을 넉넉히 사고 마는 나. 그리고 이 메일을 간직하고 싶어서 계정을 소중히 간직하는 나. 서로를 향한 마음이 어디에나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생각한다.

이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작은 기억을 흘려보낸다.
잘 있어. 가끔 내 꿈에도 나와줘.

Fin..
출처 https://brunch.co.kr/@rainyhojin/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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